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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사제동행 동학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남원답사
작성자 *** 등록일 24.11.02 조회수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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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가 돌아가신 지 160,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30년 된 2024.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이 오롯이 남아있는 남원에서 학생들과 존귀함과 보국안민, 갑오년의 꿈이라는 주제로 답사를 진행하였습니다.

2. 광한루 완월정을 갔습니다. 광한루는 춘향전의 무대인 만큼 춘향전을 통해 조선 후기의 시대상을 이야기하기에 딱 좋습니다. 동학사상의 탄생 배경과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시대 상황을 춘향전을 통해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또한 조선후기 남원성문밖 시장은 이 근처이니 최제우의 서형칠 약방 방문으로 인한 전라도 첫 포교와 남원을 대표하는 김홍기 동학농민군의 처형지이니 이곳은 남원 동학의 시작과 남원 동학농민혁명의 끝이기도 합니다.

3. 교룡산 은적암으로 갔습니다. 올라가는 아이들이 힘들어하기에 186112월 그믐. 최제우의 이 길은 어떤 생각과 어떤 고민으로 채워졌을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교룡산 은적암은 매년 1231일 최제우를 생각하면서 오르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시끄럽지 않게. 소소하게. 한 학생이 검결을 칼춤을 추면서 암송하였습니다. 운율에 따라 연습한 몸짓과 낭송이 재미있었습니다.

4. 은적암을 오르면서 동학공원을 보고 올랐는데 내려오면서 잘 정돈된 공원이 가을 햇살과 어울려 예뻐 보였습니다. 평온, 평화의 따사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5. 남원 문화원 주차장으로 왔습니다. 조선시대 남원부 관아가 있었던 터였기에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호남좌도 대도회소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김개남은 개벽된 세상을 열고자 하였습니다. 개벽된 세상은 새로운 세상이고 그 새로운 세상의 주인은 민중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집강소 활동은 의미가 있습니다. 민관상화 틀속에서 민중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해 보는 과정이었을 것입니다.

6. 남원읍성으로 왔습니다. 남원성 성벽을 따라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에 모였습니다. 이 느티나무는 300년쯤 된 것이라 정유재란의 남원성 전투는 보지 못했지만 동학농민혁명의 남원성 전투는 보았을 것입니다. 더 정겹게 느껴지고 130년 전의 동학농민군은 어땠냐고 무언으로 많은 말을 건넸습니다. 광제창생, 보국안민은 양반 지배층의 몫이었습니다. 정유재란은 그 몫을 외세에 의존하였고 동학농민혁명은 민중들이 담당하려고 했던 것이 차이입니다.

7. 이백면 쪽뚤로 가는 길, 버 스안에서 고남산 관음재, 방아치, 방학산성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보았습니다. 130년 전 남원동학농민군들이 그토록 넘고 싶었던 저 선.

8. 이백면 쪽뚤에서 남원평야와 운봉고원을 가르는 백두대간에 대해서 설명하였습니다. 예전에 방아치 전투의 실상을 알기 위해서 여원재에서 고남산까지 산행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남원 평야 쪽은 상당히 가파르고 운봉 고원 쪽은 완만하였습니다. 동학농민군의 의지는 강하였지만 전략과 전술은 상대방보다 낮았지 않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금치 전투도 그렇고 청주성 공격도 그렇고. 역사는 착하다고 편들어주지 않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9. 깃대바위에 갔습니다. 깃대바위이니 깃대를 세웠을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이 깃대에 매단 천에 동학농민군은 어떤 글귀를 써넣었을까? 질문하니 보국안민, 척왜척양이라 했습니다. 답사 맛은 이런 것이지요. 그럼 2024년에는 무슨 글귀를 써넣을 수 있을까?

10. 방아치 전투지 비석이 있는 곳으로 왔습니다. 남원의 동학농민군이 그렇게 넘고 싶었던 방아치. 동학 농민군이 이 고개를 넘어 운봉을 점령하였다면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전봉준의 우금치 전투가 119, 김개남의 청주성 공격 실패가 13일이다. 방아치 전투가 1114~15일이니 남원의 동학농민군은 이 사실을 알았을까? 아니면 오로지 혁명의 기운이 영남으로 스며들기를 바라는 순박한 마음이었을까?

11. 운봉고원으로 넘어와 서림공원에 있는 갑오토비사적비에 왔습니다. 일명 000 장군비라 합니다. 이 비석은 예전에 냇가 빨래터의 빨래판으로 이용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한 000 불망비가 있는데 이 비석은 곰보처럼 비석이 상처가 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돌을 던져 낸 상처 같은 것이지요. 그냥 전해져 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이 궁금합니다. 왜 이런 이야기가 전승되어 올까요?

12. 류태홍 묘에 왔습니다. 류태홍은 남원의 동학농민혁명과 3.1 운동, 신간회 운동,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을 함으로써 남원 근현대사의 증인입니다.

13. 사람은 누구나 평가를 받습니다. 필부도 죽을 때 자식들의 평가를 받는 것 같습니다. 하물며 권력을 쥔 자들은 역사의 평가를 당연히 받겠지요. 연산군이 두려워했다는 것 하나가 역사적 평가였다고 합니다. 역사의 무게감을 감당할 수 있는 리더들이 많았으면 합니다.

14. 운봉에서 학교로 오는 길. 동학사상과 동학농민혁명을 내면화하여 오늘날 어떻게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을까? 이야기 나눔과 함께 답사 소감을 나누었습니다. 따스한 가을 햇살 같은 우리 아아들과 함께한 시간이 마냥 행복하였으며 우리 학생들도 우리 지역의 역사를 알고, 오늘의 경험이 추억과 성장으로 나아가는 길이 되기를 바랍니다. 쉬고 싶고 놀고 싶은 토요일. 함께 해줘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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