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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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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천년을 시작하는 2000년에는 정년퇴임과 원로 선생님들의 대거 명예퇴직으로 해성학원은 16명의 신임교사를 공개 채용하였는데, 그 중 우리학교 교사는 이승영, 한병기, 양봉만, 김희봉, 박찬정, 문자희 6명이었다. 그 해 5월 해성고에서 대희년 행사를 치렀다. 이병호 빈첸시오 이사장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성심여중.고, 해성중.고, 4개 학교 모든 선생님들이 모여 체육활동과 더불어 친목의 시간을 가졌다.

2000년 6월2일, 우리학교는 제1회 축제를 열었다. 축제 명칭은 우리학교 상징 꽃인 옥잠화를 넣어 ‘옥잠화축제’라 했다. 제1회 옥잠화 축제는 학생부장을 맡고 있던 김호윤 선생과 부원으로 있던 박정근 선생이 주도적으로 했으며 이후 축제는 학생회에서 주관하기 시작했다.
2001년 1월 우리학교는 전북 남녀 학교 최초로 KBS도전 골든벨을 울렸다 당시 2학년인 박지영 학생은 50번째 문제 정답 ‘대전통편’을 맞추어 18대 골든벨 수상자의 영예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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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8월23일부로 우리나라는 IMF관리 체제에서 벗어났다. 이즈음 우리학교는 45억여원을 들여 운동장에 신축 본관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예산 부족으로 교실 크기나 복도 크기가 다소 작게 설계되었지만 50년 된 건물에 비하면 최고의 환경이었다. 이처럼 당시 최고의 시설과 환경에도 불구하고 우리학교는 전주시 일반계 고등학교 중, 성적이 하위권에 있어 학부모나 학생들로 하여금 좋지 못한 평을 들었다. 학교와 교사들은 열심히 가르치고 교육의 방향이나 학교 풍토가 나쁘지 않음에도 대부분 거주지가 전주 신도시와 외곽으로 번성해 가며 구도심에 있던 우리학교는 좋지 못한 소문이 돌며 1지망으로 지원하는 학생 수가 적었다.

이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교육의 여건을 혁신적으로 개선하고 우리학교가 좋은 교육 환경임을 알리는 학교홍보가 절실히 필요했다. 교감이었던 김낙완 선생이 중심이 되어 홍보팀을 구성하고 범진일 선생이 초대 홍보부장을 맡았다. 학교 설명회를 위해 현수막을 전주시내 곳곳에 부착하였고, 중학교별 홍보 담당 교사를 배정하였으며 버스 11대를 동원하여 전주시 중학교 정문에서 하교하는 학생들을 태우고 와 설명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홍보 팜플렛도 대량 만들어 시내 중학교에 배포했으며 홍보 팜플렛 표지 제목은 ‘중딩, 너희가 성심을 아느냐?’였다. 이후 2003년부터는 홍보 모델을 선발하여 팜플렛 사진이나 홈페이지 화면 구성 이미지로 활용했는데, 첫 홍보 모델은 송창순, 백소담. 김지현, 박서연, 강지은 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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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김경주 교장의 정년퇴임으로 교감이었던 김낙완 선생이 교장으로 승진 임명되었다. 김낙완 교장은 의욕이 넘치고 모든 일에 열정이 넘쳤다.
그 해 6월 우리나라는 월드컵 4강 진입의 신화를 썼다. 전주 월드컵 경기장에서는 8강 진입을 다투던 미국과 멕시코의 경기가 있었는데 전주시의 후원을 받아 전교생이 경기를 관람하였다. 당시 동계올림픽 때 김동성 선수가 오노신지 선수의 헐리우드 액션으로 반칙패를 하여 금메달을 빼앗긴 감정과, 2002년 월드컵 당시 예선에서 미국과 비긴 것 때문에 멕시코를 일방적으로 응원했다. 하지만 멕시코는 2:1로 미국에게 패해 8강 진출을 하지 못했다.

2002년 우리학교 종교감인 이종원 토마스 신부의 임기가 끝나자 성심여중 종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김영태 토마스 신부가 종교감 신부로 부임해 왔다.

2001년부터 운동장에 공사 중이던 본관 신축건물은 완공이 되었는데, 건물 명칭을 초대 교장의 이름을 따 규승관이라 칭했다. 유난히도 더웠던 2002년 7월16일, 50년간 정든 건물을 비우고 선생님들과 전교생이 함께 힘을 합쳐 하루 만에 새 본관 건물 규승관으로 이사했다. 내외적으로 학교는 점점 좋아졌고 우리학교의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한 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열정적인 학교 홍보 등의 영향으로 우리학교는 1지망 지원자가 많아져 지역 사회에서도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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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학년도 수능부터는 성적표에 원점수, 백분위점수, 표준점수, 변환표준점수는 그대로 표기하고 총점 대신 영역별 등급과 5개 영역 종합 등급을 9등급으로 나눠 표기하였다. 2003년 3학년 6월 전국모의고사에서 이지혜 학생이 당시 변환 표준점수 388점으로 전국 수석을 차지했으며 서울대 의예과에 합격하였다. 2002년 7월16일 신축 본관 건물로 이사 한 후 옛 건물을 철거하고 그 자리 일부에 학생식당과 체육관 등이 들어설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이 건물은 우리학교 설립 당시 토지를 기증한 이춘화님의 이름을 따 ‘춘화관’이라 칭하고 2003년 완공 하였다. 춘화관은 500석 규모의 학생식당과 4면의 배드민턴 구장이 형성되고, 1천여명이 동시 행사를 할 수 있는 체육관, 350석이 마련된 소공연장(성당), 면학당, 헬스장, 동아리방 등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면학당은 당시 400석의 독서대를 마련하여 3학년 모든 수험생이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면학당 현판은 성심여중 교사로 재직하다 퇴임한 김승방 선생의 글씨로 새겨졌다. 동문 조윤숙님은 면학당에 가로 7미터 크기의 ‘청춘예찬’ 서예 작품을 기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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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이 운영되기 시작했다. 각 학교 정보부장들은 많은 혼란과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우리 학교 역시 마찬가지였다. 교육부 지침에 따라 기존의 C/S프로그램에서 NEIS로 자료를 이관하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전교조 등에서 정보독점과 개인정보침해 등을 이유로 프로그램 사용에 필요한 인증을 거부하기도 했는데, 여러 시행착오와 오류를 해결해가며 오늘날까지 운영되고 있다.

김낙완 교장은 학교 발전을 위해 동분서주 했으며 절실히 필요했던 기숙사를 설립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그러던 중 부영건설 이중근 회장에게 쓴 감동의 편지가 계기가 되어 부영건설은 공사비 13억에 달하는 기숙사를 우리학교에 기증하기로 하였다. 이 일화는 ‘13억짜리 편지’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기숙사는 2004년 6월11일 착공하여 같은 해 12월15일 준공식을 갖고, 명칭을 이중근회장의 호를 따 ‘우정학사’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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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 임기 4년차인 2005년, 김낙완 교장은 부임한 2002년부터 2010년 까지 8년간 장기 발전 계획을 수립하였다. 계획안의 제목은 ‘VISION 2010’ 계획 수립의 기본 방향은 이렇다.

  • 늦더라도 가능한 한 모든 교직원과 함께 한다.
  • 당면한 현실 문제를 해결하되, 이상(理想)의 끈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
  • 성장 가능성이 있는 것부터 시작한다. 있는 것을 쉽게 없애지 않는다.
  • 새로운 것을 만들 때는 신중하게 선택한다.
  • 적은 사람이 많은 일을 하기 보다는 많은 사람이 일을 적게 분담한다.
  • 계획은 점진적으로, 전체적으로 진행한다.
  • 미래지향적인 자세를 유지한다.라고 정했다.

또한 장기 목표를 다음과 같이 세웠다. 전 교직원이 마음을 한 데 모아 법인의 설립 이념이 우리 지역사회에 제대로 구현되도록 하며, 우리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은 한 독립된 인간으로 살아갈 능력과 고매한 인품을 동시에 지니도록 교육 받고, 교직원은 학교의 성장을 통해 보람과 기쁨을 누리며, 학교의 위상은 우리나라 중등교육의 향도자가 된다. 라고 세웠다. 학생들의 성적 향상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인성과 덕성 계발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도 만들었으며 이 밖에도 학교 시설 등, 교육환경 개선에 대한 자세한 계획들을 세웠다. 대학 입시에서 매년 서울대 두 자리 수 합격, 서울10대 대학 20명 이상, 교육대 두 자리 수 이상 합격 시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전국 최고의 학교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른 지금, 불가능할 것 같은 계획들이 현실화 된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하고 미완의 과제로 남은 것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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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0월에는 전국 여고 최초로 2학년 학생들이 지리산 천왕봉 완주에 도전하였다. 당시 180명이 해발 1,915m 정상 정복에 성공하였으며 해가 갈수록 그 인원은 점점 늘었다.

2005년 즈음 학교 엠블램이 규격화된 그래픽 파일이 없어서 왜곡되거나 형태 또한 중구난방으로 쓰이는 것을 바로 잡기 위해 그래픽 파일로 공식 엠블렘을 만들었다. 또한 학생들의 영어교육을 위해 처음으로 원어민 교사를 플브라이트 재단을 통해 초빙하였다. 초대 원어민 교사는 미국 뉴욕 출신의 로저 윌리엄(Roger William Jennings Mahon )선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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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3월20일 14처가 제작되어 강당에 설치되었다. 2004년 말 부터 5개월간 작업하여 테라코타로 완성한 14처를 강당에 설치함으로써 치명자산까지 가서 하던 ‘십자가의 길’을 그 해 부터는 강당에서 실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 십 년간 철조망과 콘크리트로 학교를 막고 있던 담장을 허물고 허리 높이의 낮은 담장으로 바꿨다. 어두웠던 담장 밑이 밝아지고 꽃과 나무가 심어져 쾌적한 공간으로 탈바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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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0월24일은 전주시 여고 중 처음으로 중국과 일본으로 해외 현장체험학습을 3박4일간 실시하였다. 해외 현장체험학습을 원하지 않은 학생들은 제주도로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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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23일, 우리학교 강당에서 허경택 교장의 영결식이 있었다. 우리학교에서 수년간 근무하며 교감까지 역임하고 성심여중 교장으로 근무하던 허경택 선생께서 갑작스럽게 운명을 달리 하시어 성심 뜰안은 온통 슬픔에 잠겼다. 선생께서는 재미있고 화려한 언어 구사로 교직원 회의 시간을 유쾌하게 만들어, 오늘은 어떤 어록이 나올지 내심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

- 바위도 미소짓는 봄이 봄이 왔습니다. (2003.03.04 직원조회)
- 天崩之痛의 아픔을 겪은 박은경 선생님께 위로의 박수를 보냅시다. (2003.03.17 직원조회)
- 멸치 잘 먹이면 고등어 돼냐 그런 말이 있는데 요, 멸치를 미끼로 고등어는 잡을 수 있습니다. (2003.03.24 직원조회)
- 우리가 살면서 떠올리면 향기가 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사랑, 우정, 아내....투병중인 아내를 바라보며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박정근 선생님께 힘나는 박수를 보냅시다.(2003.03.24 직원조회)
- 내가 하는 말은 박물관이야~!(왜요?) "역사적이지~!"
- 내가 하는 말은 오솔길이야~!(왜요?) "사색적이지~!"
- 내가 하는 말은 주말연속극이야~!(왜요?) "다음 주 가 기다려지지~!"(2003.04.14 학생들에게)
-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남자는 적금통장을 보고 여자는 거울을 본다. (2003.11.24 직원조회)
- 사막의 물 한 잔과 이쪽 지역 사람들의 물 한 잔은 다르다. (2004.04.17 직원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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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학교 교감으로 재직시절, 밤 늦게까지 일하는 교사가 있으면 초과 근무 대장을 내밀며 작성토록 하여 초과 근무 수당을 직접 챙겨 주기도 하였다. 또한 선생님들의 공문을 일일이 챙기시고, 교사들이 실수하지 않도록 공문 발송 날짜를 직접 메모해 놨다가 알려주는 자상함을 보였다. 또한 학교 홍보를 위해 연극 대본 처럼 써 낸 '진선미를 위한 보고서' 라는 특색있는 홍보 자료를 만들어 배포하기도하였다.

2006년은 성심학교 개교 60주년 행사를 치렀다. 이 행사는 당시 중학교 교감 이나영 선생과 우리학교 김영자 선생이 주축이 되어 준비 위원회를 결성하고 행사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행사는 가히 감동의 물결을 이루었다. 앳된 소녀들이 백발이 되어 만나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가하면, 지금은 백발의 노인이 된 당시 총각 선생님을 만나 서로 안고 이야기하고 노래하며 만남의 기쁨을 한껏 느끼는 시간을 가졌다. 그 행사를 계기로 동창회가 활성화되어 2억 2천 여 만원의 장학금이 조성되어 쓰여 지고 있다.

이 시기에는 학교 발전을 위해 선진학교 탐방을 많이 실시하였다. 당시 입시 제도에서 논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논술 지도를 위해서는 논술 전문 교사가 절실히 필요했기에 선정된 교사(양봉만, 오경택, 조재연, 양정원)들은 매주 서울로 올라가 논술 특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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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 제2대 원어민 교사를 초빙하였다. 이름은 케이트(Kathleen Walro) 미국 하버드대 정치학 석사 출신이었다. 교직원들과 융화력이 있고 학생들에게 열정적이며 적극적인 수업을 하여 학생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학생들의 자기주도적 학습을 위해 고민하던 우리학교는 여러 학교의 사례를 본받아 다각적으로 연구하던 중 스터디 플래너인 생활스케치를 만들었다. 종교감 신부인 김영태 신부가 주도하여 여러 논의 끝에 탄생한 학습 플래너로써 현재까지 학생들이 애용하고 있다. 이 생활스케치는 계획하고, 실천하고, 반성하는 반복적인 활동을 통해 스스로 자기 주도 학습을 이루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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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가을에는 학교 중앙 정원 공사를 시작하였다. 10월9일 김낙완 교장과 김경호 행정실장, 교사 1명은 봉동까지 가서 정원에 심을 조경수를 하나하나 직접 골랐다. 중앙 정원은 12월 경 마무리 되었으며, 김낙완 교장은 중앙 정원 한 켠에 학생들에게 교훈이 될 만한 말로 NONSIBI라는 라틴어를 표지석에 새기기로 결정했다. ‘나만을 위해서가 아닌 삶’이라는 뜻으로,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며 그러기 위해서 나보다는 상대에 대한 배려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표지석은 김낙완 교장, 김영태신부, 이나영 성심여중 교장, 교사 1명이 2007년 12월14일 충남 보령을 방문하여 직접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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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제3대 원어민 교사를 초빙하였다. 이름은 올가(Olga Klinger)이며 러시아 상트페테스부르크에서 태어나 7세때 미국으로 이주하여 미국 캘리포니아 포모나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였다.

2008학년도 수능은 성적표에 등급만 표기했다. 그러다 2009학년도 수능부터는 2005~2007학년도처럼 다시 표준점수, 백분위가 다시 기재되었다.
2008년 9월24일 우리학교는 옛 중학교 터에 성심 60주년 기념관을 짓기 위한 첫 삽을 떴다. 이 기념관 1층은 성심 박물관이 자리 잡아 성심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세미나를 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2층에는 생활관, 예절관 등이 있다. 특히 박물관에는 성심 연대표를 비롯해 60여년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사진 자료와 물품들이 있다. 성심60주년 기념관은 2009년 2월 준공식을 가졌다. 이날은 제9대 교장 김낙완 선생이 만 7년간의 교장 임기를 끝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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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완 교장의 정년퇴임으로 2009년 3월 재10대 교장에 해성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이희수 선생이 임명되었다. 그해 교육과정운영계획서 우수학교로 선정되었고, ‘특색 있는 학교’로 선정되어 거금의 교육 예산을 배정 받았다.

2009년 8월, 신종 인플루엔자가 전국으로 확산되고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현장체험학습, 축제 등, 학교의 모든 단체 활동이 금지되었다. 매일 아침 우리학교 교사들은 등교 시간 정문에 배치되어 줄지어 들어오는 학생들을 일일이 발열 체크를 했으며, 체온이 38도 가까이 되는 학생은 귀가 시키는 진풍경도 있었다.

2009년 9월, 제4대 원어민 교사를 초빙했다. 이름은 에이프럴(April Cherilee N. Arrozal) 미국 출신으로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관심이 있어 지원했다고 한다. 특히 대학에서 레크레이션을 전공하여 학생들에게 흥미를 유발하여 자연스럽게 영어와 친해질 수 있는 수업을 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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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별 필독 도서를 선정하여 읽도록 권장하고 독서노트를 제작하여 학생들에게 독서 교육을 강화 하였으며, 전북논술경시대회(지도교사 양봉만)에서 2년 연속 대상을 수상하는 등, 그동안 우리학교가 노력한 결과들이 하나씩 빛을 보기 시작했다. 이희수 교장은 친화력이 좋았으며 권위를 내려놓고 교사와 소통하는 낮은 자세로 학교를 운영하여 1년간의 짧은 임기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퇴임식을 하는 날 많은 박수를 받으며 학교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