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학교의 뿌리를 알기 위해서는 18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전주 주민들은 전주본당인 전동천주교회 초대 주임 보두네(Francis Xavier Baudounet 윤사물)신부에게 학방(學房) 설립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설립 인가를 추진하면서 운영권자가 전주 주민에서 프랑스 선교사로 바뀌고 천주교 소속 학방(學房)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다가 학방은 어학당으로, 그리고 다시 여학당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경제적인 사정이 어려웠고, 1896년경부터는 성당 신축이 더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어 학교 설립을 매듭짓지 못했다.
1926년 프랑스 출신 라크루(Marcello Lacrout )신부는 성당 내에 어린이를 대상으로 문맹퇴치와 교리교육을 위해 해성강습소를 열었다. 그 뒤 김양홍 신부는 교우 어린이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주야(晝夜)강습소 설립하여 교리교육과 일반 학교교육과정을 가르치며 비로소 해성학원을 세운 것이다. 이 때 전주본당은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자금을 모으는데 전념하였으며 이에 호응한 이학수 회장은 1930년 봄, 큰아들 이춘화(李春華 토마스)를 시켜 자신의 전답 1백여 마지기(약 2만평)을 학교 설립의 기본 자산으로 교회에 기증하였다. 전주본당은 1931년 감목대리구(監牧代理區) 설정으로 여념 없었지만 앞으로 자치교구로 설정될 것에 대비하여 학교 설립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40년 전 보두네 신부가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성당과 인접한 곳에 학교 부지 1,500평을 마련해 두었고, 기본 설립 자산으로 전답 56두락이 있었지만 학교 건물을 세울 재력은 없었다. 학교를 세우려면 건물뿐만 아니라 교사 자격증을 소지한 수녀들을 초빙해 교육을 담당해야 했기 때문에 수녀원 또한 필요한 실정이었다. 당시 김양홍 신부는 학교 신축을 위해 공사를 시작하려 했지만 자금이 문제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춘화, 이춘의 형제는 학교 건물과 수녀원을 설립하기 위해 3천원을 부담하여 1백평 규모에 교실 4칸과 직원실 1칸, 2층에는 연와제와 수녀원이 있는 벽돌 구조 양옥 건물을 1932년에 신축하였다. 그동안 전주 본당이 꿈에 그리던 숙원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후 1937년, 이춘화님이 1만원을 희사하여 107평 규모의 연와제와 강당 겸용 교실4칸을 신축하였다. 이처럼 독지가들의 도움이 있어 이듬해인 1938년 3월20일에는 우리학교의 모태가 된 해성심상소학교가 초등교육기관으로 설립인가를 받아 5월9일에 개교하였다. 일제는 1941년 학교의 명칭을 국민학교로 바꾸고 우리말 학습을 폐지하고 일본 역사를 국사로 가르치게 하였다. 이후 제2차대전 말기인 1945년 4월에는 마침내 학교를 폐교하고 학교 건물을 저금관리국으로 징발하였다. 해방이 되자 전동 천주교회의 주임 이상화 신부를 중심으로 여성교육의 전당 성심여학원을 설립 하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이 일에 참여한 사람들은 강윤식 보좌 신부와 전동성당 청년회 허일만, 임철중, 이현섭, 이인석, 이진규, 박영섭, 김규승, 김순성, 김박중, 전진, 그리고 샤르뜨르 성바오로 수녀원의 배정자, 최계주, 정혜규, 송만섭 이다. 이 때 김현배 교구장은 교구로서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할 자본 1백만원을 조성하도록 요청하였다. 이에 청년회원 이인석 10만원, 이진규, 이완규, 이광규 삼형제가 30만원, 전북제사 김금석 사장이 50만원을 희사하였다. 나머지 10만원은 본당 회장 조행룔이 3만원을 희사하고 나머지는 본당 교우들이 십시일반 모았다. 보두네 신부가 여성교육을 시도한지 55년만에 그 숙원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1946년 8월1일 전주성심여학원 설립 인가가 났고 그해 10월3일 드디어 학교 문을 열게 되었다. 학생수는 37명이었으며 초대 학교장은 이상화 신부가 취임하였다. 성심 동창회는 전주성심여학원의 설립 인가가 난 이날을 기념하고자 매년 10월3일 정기 총회일로 정해 모임을 갖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성심여학원은 이듬해인 1947년 2월, 학교 봉헌식을 갖고 예수성심을 주보(主保)로 모셨다. 신앙을 바탕으로 명실상부한 여성교육의 전당으로 발돋움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