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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 열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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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 열사 이야기
작성자 금지중 등록일 21.10.28 조회수 368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에서 아버지 김재계와 어머니 권찬주 사이의 3남 2녀 중 차남(넷째)으로 1944년 10월 7일에 태어났다. 할아버지 김태종은 해방의 혼란기에 면장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조합장을 지낸 천석꾼 부잣집이었다. 김주열이 어린 나이에 죽었으면서도 비교적 많은 사진이 남아 있는 것은 이미 사진기와 전축을 가진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이다. 어머니 권씨는 경상남도 함양군 사람으로 ‘함양댁’이라 불렸으며 이는 김주열의 영남 지방과의 인연을 암시하고 있다. 1956년 용지국민학교(현 금지동초등학교), 1959년 남원 금지중학교를 졸업했고 이어 진주고등학교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반대해 남원농업고등학교(현 남원용성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적성에 맞지 않았는지 몇 달을 다니지 않고 집에서 재수를 시작했다.

1년 후 아버지의 병환이 깊어져 가세가 서서히 기울자 김주열은 서울로 올라가 학비가 별로 들지 않는 철도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치르지만 실패하고 서울고등학교에 원서를 냈다. 그러나 형 김광렬의 친구이며 형같이 따르던 하용웅의 "집안을 일으켜 세우려면 은행원을 하는 것이 지름길이다."라는 권유를 받고 마산상업고등학교에 다시 원서를 내게 된다. 마산상업고등학교 입시를 치르고 돌아와 1960년 3월 14일로 예정된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 형 김광렬과 함께 마산으로 갔지만, 3.15 부정선거를 앞두고 군중이 모이는 것을 극도로 꺼린 교육청에서 합격자 발표의 연기를 종용해서 3월 16일로 연기되어 있었다. 그래도 하용웅 선배의 담임 선생님을 통해 합격했음을 확인하였지만 당시에는 마산에서 남원까지 꼬박 하루가 걸려서[7] 첫차를 타지 못하면 도중에서 유숙해야 했기 때문에 곧장 남원으로 귀향하지 못했다. 당시 김주열의 이모할머니는 열렬한 민주당 당원이였는데 자유당의 부정 선거로 인해 투표 통지표가 전달되지 않아 종일 울분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산에서의 부정 선거가 들통이 났고 학생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자 이를 목격한 이모할머니가 집으로 와서 두 형제에게 시내에 나가보라고 한다. 이에 형제는 시위에 합류하게 되었지만 김주열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들의 행방불명 소식을 들은 어머니 권씨는 마산으로 달려가 아들을 계속 찾아 헤멨으나 끝내 아들을 찾지 못하고 4월 11일 남원으로 돌아온다. 이 와중에 별별 소문이 다 났는데 권씨는 이름모를 경찰관이 와서 "나도 김주열 군 또래 아우가 있답니다. 주열 군이 사라진게 남의 일 같지 않네요. 자세히 알면 확실히 가르쳐 드리는데 저도 모르겠고 소문으로 듣자하니 주열 군이 시위 도중 살해되어 시체가 경남도청 앞 호수에 버려졌다는 소문이 있더군요."라는 말을 하고 서둘러 사라진 적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권씨가 이걸 크게 외치면서 시위대가 경남도청 앞 호수를 경찰들과 같이 샅샅이 찾아봐도 없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권씨가 집으로 돌아가던 날 11시경 마산의 중앙 부두에 최루탄이 눈에 박힌 시신이 떠올랐다. 사망한지 1달 가량 지났지만 당시 바닷물이 굉장히 차가워서 거의 냉동 상태였기 때문에 김주열의 시신은 부패되지 않았다. 링크 참조(시신 사진이니 주의) 김주열의 시신 사진은 당시 부산일보 기자 허종(1924~2008)이 찍어 특종으로 보도되었으며 시신이 김주열로 확인되자 용공 분자의 난동과 좌익 폭동으로 내몰린 마산 시민들의 울분이 다시 터져 올랐다. 이는 4.19 혁명으로 이어졌고 이후 전개는 4.19 혁명/진행을 참조
(네이버 나무위키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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