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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와 우리말

이름 강예현 등록일 17.08.17 조회수 435

필자는 퇴근 때 서울 신문로 한글회관 앞을 지나 다닌다. 얼마 전 이 붉은색 6층 건물 입구에는 ‘한글학회 창립 99돌 기념식’이란 작은 펼침막이 내걸렸다. 한글학회의 전신인 국어연구학회가 1908년 8월31일 창립됐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펼침막이나 건물 앞 주시경 선생 흉상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1층에 세든 골프가게의 유리창을 덮은 커다란 광고판이다. 한글회관과 골프광고.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이는 마치 ‘외세’에 밀려나고 천대받는 한글의 처지를 상징하는 것 같다.

백기완씨는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모태가 된 시 ‘묏비나리’의 시인이자 통일운동가이면서 열렬한 우리말 운동가이기도 하다. 그가 만들어 낸 순우리말에는 새내기, 달동네, 동아리 등이 있다. 이에 얽힌 일화도 많다. 일본말인 ‘하꼬방’ 대신 ‘달동네’란 말을 쓰자 경찰이 그를 잡아 문초했다. 일본말을 싫어하면 ‘빨갱이 새끼’라면서. 남산의 ‘터널’ 대신 ‘맞뚫레’로 하자고 주장했다가 조국 근대화 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두들겨 맞기도 했다고 한다. 

고 이오덕씨나 백기완씨 등 적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말 사랑에 헌신적 노력을 기울여 왔고 지금도 그런 노력이 계속되고 있음에도 한글의 환경은 악화되고 있다. 어째서인가.

-갈수록‘영어권하는사회’변모- 

그 원인을 세계화에서 찾을 수 있다. 세계화에는 국가와 개인 차원의 양극화란 어두운 얼굴이 있지만 오늘날 한글의 위기 상황도 또 다른 세계화의 그늘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는 상당 부분 ‘영어화’와 겹친다. 영어를 잘하는 것이 세계화의 물결에 성공적으로 합류하는 것이다. 영어 광풍은 세계화 논리와 결합해 쓰나미처럼 밀려오고 있다. 

어제 서울 서초구는 5년 안으로 주민 3명 중 1명이 영어로 의사소통 가능토록 하기 위해 4곳에 영어몰입 복합센터인 ‘잉글리시 프리미어 센터’를 설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공무원들의 영어능력 향상을 위해 간부회의를 영어로 진행한다고도 한다. 이것은 가장 최근의 소식일 뿐 영어 광풍은 벌써 오래 전부터다. 부산과 인천시는 5000억원 이상을 들여 ‘영어도시’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전국 40여곳의 영어마을이 이미 실패한 것으로 드러났는 데도 더 큰 규모로 사업을 벌이겠다는 것이다. 참으로 집요한 영어 숭배의 모습들이다. 한문 숭배가 물러난 자리에 영어 숭배가 들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들은 ‘글로벌 리더’를 키운다며 영어로만 하는 강의를 경쟁적으로 늘리고 있다. 그러나 본질인 강의의 내용은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강의 준비에 몇배나 시간이 드는 데다 수업 중 깊이 있는 토론도 어렵다. 모국어로 하는 사유의 공간이 줄어든다. 대학이 이런데 젊은 가수들이 노래 가사의 태반을 영어로 부르는 게 이상할 것도 없다.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우리말 파괴도 세계화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세계화의 다른 이름을 정보화라 할 때 인터넷은 그 첨병이다. 오늘날 세계는 전자매체를 통해 하나로 연결된 지구촌이 됐다. 인터넷에서 쓰는 통신언어는 오로지 빠른 소통을 위해 준말을 쓴다. 따라서 약어, 은어, 축약, 생략, 숫자·알파벳 사용 등이 빈번히 나타난다. 비속어, 맞춤법 파괴도 예사다. 문제의 심각성은 많은 젊은이들이 통신언어를 일상어로 사용한다는 데 있다. 

-정보화 맞물려 한글 파괴까지- 

근래 다인종사회 논의가 활발하다.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인구의 2%에 가까울 정도로 늘었다. 이 또한 세계화의 한 모습이다. 이를 근거로 단일민족 의식을 버려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은연중에 한글이 우리의 소중한 재산이란 의식도 퇴색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설사 한국이 다인종 사회로 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말의 순수성을 포기해도 될 구실이 될 수는 없다. 프랑스는 프랑스어와 영어가 섞인 프랑글레를, 독일은 영어식 독어 뎅글리시를 몰아내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다. 모국어를 잘 가꾼다는 것은 폐쇄적 민족주의와는 전연 다른 문제다.

그럼에도 세계화가 급가속 페달을 밟을수록 한글은 천덕꾸러기 신세다. 세계화의 이름으로 한글의 끝없는 추락이 진행되고 있다. 언론의 외래어·외국어 남용도 위험 수준이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며칠 전 “선대본부는 과거보다 ‘슬림’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어는 우대하고 우리말은 ‘언문’ 취급을 하는 이 풍토를 어찌할 것인가.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9041755051&code=990344#csidx5a584fc4de377269a805af4a0918a1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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