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술(남성고 8회) 미래산업 창업 회장 별세 “미래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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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남성고 | 등록일 | 24.06.14 | 조회수 | 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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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술 미래산업 창업 회장 별세 “미래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 글로벌이코노믹 (g-enews.com)
반도체 장비 국산화 성공, 나스닷 최초 상장 ‘벤처 1세대 대부’ 채명석 기자 입력2024-06-13 16:35
1997년, 정문술 미래산업 창업자에게 한 부서 과장이 개인 면담을 신청했다. 업무상담이겠거니 생각했는데, 막상 마주앉아 들어보니 재미있는 사연이었다. 아들이 학교에서 숙제를 받아왔는데 아버지가 다니는 사훈을 적어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과장 자식의 숙제를 해결해주기 위한 고민이 시작됐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만든 것이 ‘우리는 미래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창조하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이었다. 이후부터 미래산업은 회사를 상징하는 대외용 카피로 사용하고 있다.
‘벤처 대부’로 불리는 정 창업자는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공무원으로 18년간 근무하다가 1980년 5월 신군부에 의해 강제 해직을 당했다. 당시 나이 마흔셋, 갑작스런 해직 통보에 충격 상태였던 정 창업자는 지인의 소개로 풍전기공이라는 회사에 퇴직금을 투자했다가 사기를 당한 뒤 공장을 인수, 기업가로서의 새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금형 사업은 초보 사업가가 하기엔 너무 어려웠다. 더군다나 하청업체라는 한계 때문에 발주처인 대기업들로부터 배신만 당하고, 1년 만에 사업을 접었다.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오기로 정 창업자는 2년간의 와신상담 끝에 반도체 사업을 하기로 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가 갖고 있던 호기심에 첨단산업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참여자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판단에서 비롯됐다.
아이템을 정한 그는 사명도 직접 짓기로 하고 고민하다가 신문에서 우연히 접한 ‘미래산업’을 발견하고 이를 회사명으로 결정했다. 정 창업자는 “단순하면서도 진취적인 이름이었다. 앞으로 내가 만들어가고 싶은 회사의 이미지와도 너무 일치했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1983년 2월 정 창업자를 포함 여섯 명으로 시작한 미래산업은 첫 작품 ‘리드 프레임 매거진’이라는 장비를 개발하며 성공의 기쁨을 맛봤다. 하지만 두 번째로 도전한 ‘무인 웨이퍼 검사장비’ 개발에 4년간 18억원이라는 막대한 시간과 자금이 투입했는데 정작 성공하고 나니 기술자가 육안으로 검사하는 것보다 느렸다. 이 실패로 미래산업은 파산 직전에까지 이른다.
정 창업자가 가족들에게 동반자살을 생각하자 모두가 동의했던 게 이때다. 청계산에 홀로 올라가 자살을 눈앞에 둔 상황. 정 창업자는 최악의 상황에서 희망을 봤다. ‘무조건 잃은 게 아니다. 실패는 했지만 기술은 남아있다. 기술 수준이 한 단계 낮은 제품을 개발하면 된다.’
다시 회사로 출근한 정 창업자와 직원들은 ‘핸들러’라는 설비를 개발하기로 했다. 새로운 도전 끝에 최초의 회사 고유모델인 ‘MR-3000’을 개발했다. MR-3000을 통해 능력을 인정받은 미래산업은 고객사의 제안으로 ‘메모리 테스트 핸들러’ 국산화를 추진 ‘MR-5000’을 탄생시켰다.
이후 미래산업은 중간중간 어려움이 있었지만 반도체 장비 생산업체로 입지를 다져나갔다.
정 창업자가 마흔셋 이후 겪은 고통을 견딜 수 있었던 배경은 끊임없이 미래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미래를 위해 살았다. 뒤를 돌아보며 후회하는 것만큼이나 뒤를 돌아보며 대견해하는 것은 부질없다. 내가 겪었던 실패도, 내가 경험했던 성공도, 사실은 기업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맛보았을 흔하디 흔한 것이다. 다만 내게 유별난 것이 있다면 지독한 미래지향성이다”고 그는 말했다.
정 창업자에게 있어 기술 개발은 종교와 다름 없었다. 다음은 그가 자서전 ‘왜 벌서 절망합니까’에 실은 기술 개발에 대한 소신이다.
미래산업은 이른바 대기업의 ‘협력업체’이다. 국내의 몇몇 대기업들이 우리의 고객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기업의 생리에 대해서 얻어듣는 바도 많고 내가 짐작하는 바도 많다.
연구직은 말 그대로 연구하라고 맡겨진 직책이다. 그러니 연구직이라면 다른 무엇보다 기술개발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제일이다. 그러나 어떤 대기업에서는 기술개발마저도 단기간의 매출성과와 연관을 짓는다. 심지어는 연구부서에 구체적인 매출목표를 할당하기도 한다. 당연히 그 결과에 대해 책임추궁이 뒤따르고 고과도 움직일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연구부서에서 새 프로젝트를 기획했다고 치자. 기안을 올리면 위에서는 예산 절감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규모를 축소하고 액수를 깎아내린단다. 내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저 오래된 습관일 뿐이다. 어찌어찌해서 통과가 되었다 치자. 이번에는 위로부터 언제 날벼락이 떨어져 백지로 돌아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대기업의 연구개발 부서만큼 인사이동이 많은 곳도 없다고 한다. 프로젝트가 좀 길어진다 싶으면 그 팀은 이미 풍전등화 신세란다. 하긴 연구소장쯤 되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성과 없는 프로젝트를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자신한테 불리할 테니 말이다.
3M이라는 미국 기업은 첨단 기계에서부터 사무용품에 이르기까지 온갖 아이디어 제품을 개발하고 판매한다. 3M의 리처드 칼튼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 회사는 정말 우연히 새로운 상품을 개발해왔다. 그러나 무엇인가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연히라도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휴렛팩커드의 빌 휴렛도 거기에 덧붙인다.
“3M은 진정 존경할 만하고 배울 만한 기업이다. 3M조차도 그들이 무엇을 새로 개발하게 될는지 모른다는 것이 바로 3M의 매력이다. 그러나 그들이 계속 발전하리라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기업드은 실패를 지나치게 두려워한다. 병적일 정도의 안전주의에 중독되어 있다. 괜한 도박을 하느니 가만히 있자는 주의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조건이기 때문에 그렇다. 없는 돈으로 확실한 일에만 쓰기에도 급한데 불확실한 일에 쓸 돈이 어디 있느냐고들 항변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우리나라에는 3M 같은 유능한 기업이 없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에디슨은 어려서부터 말썽꾸러기였다. 궁금한 것은 무엇이든 확인하려고 들었기 때문에 어른들이 보기에 그는 말썽꾸러기일 수밖에 없었다. ‘있는 것’을 ‘그냥 있다’고만 생각하지 않고 끊임없이 ‘왜’를 물었고 눈으로 확인했다. 에디슨은 줄곧 실패하고 또 실패했다. 주변사람들에게 항상 욕을 먹었고, 또한 수없이 파산했다. 그 덕분에 에디슨은 오늘날까지 칭송받는 발명왕이 될 수 있었다.
끈기와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연구 작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아닌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엉뚱한 착상에서 나온다. 엉뚱한 착상은 모험을 통해 검증된다. 물론 실패도 있고 성공도 있다. 실패는 사소한 것도 있고 심각한 것도 있다. 그러나 실패를 두려워한다면 성공도 없다.
요즘의 신세대 엔지니어들이란 다른 무엇보다 연구에 몰두하는 행위 그 자체가 너무 좋아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밤낮없이 그것에만 열중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또한 그것에서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업풍토는 그들의 취향을 고려할 만큼 너그럽지 못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모든것을 제쳐두고 그것에만 열중할 수 있다는 점이 신세대들의 장점이다. 반면에 기성 사회의 복잡한 절차와 예절, 책임과 의무감 따위에는 진저리를 친다는 것이 또한 그들의 단점이기도 하다. 반짝이는 재치와 열정만 가지고 세상에 막 뛰어든 그들이 대기업의 꽉 짜여진 관료조직 속에서 받아야 할 압박감이야 오죽하겠는가.
요즘도 그렇거니와 앞으로는 더욱 셀프 리더(Self Leader)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한다. 예스맨이니 복지부동이니 하는 말들은 이미 흘러간 노래가 되었다.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주어진 일에만 묵묵히 매달리는 사람들을 ‘로봇형 인간’이라고 한다면, 스스로 기획하고 스스로 행동하며 스스로 책임지는 신세대형 일꾼들을 일컬어 ‘셀프리더’라고 한단다.
지금까지 한국을 지탱해왔던 ‘로봇형 인간’들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앞으로는 발랄한 신세대들이 이 사회를 이끌어갈 것이라는 말이다. 신세대들에게는 복음처럼 들리겠지만 순종과 인내가 전부인 줄 알았던 구세대들에게는 용도폐기를 선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컴퓨터니 인터넷이니 하는 낯선 질서에 적응하기 위해 애달캐달하는 중늙은이들이 그래서 생겨난다.
이런 위기감은 이 땅의 모든 기업이 피부로 절감하고 있는 문제다. 그래서 체질개선 얘기가 나온다. 젊은 사람들의 창의성과 모험정신이 극대화될 수 있도록 체질개선을 하자는 것이다. 자율복장이나 자율출근제니 하는 것들 말이다. 한때는 그러한 체질개선운동이 대기업마다 유행처럼 번졌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상력과 일부러라도 삐딱해지려는 개성 같은 것이 신세대들의 힘이다. 그러한 태도가 일과 합치되는 공간이야말로 바로 그들의 놀이터이자 일터가 될 수 있다. 그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로 만들어주지 않고서 기발한 조직개편만 계속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공무원으로 보낸 덕분에 나는 관료제도의 경직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전통’과 ‘합리’라는 이름으로 용인되는 비능률이다. 그것이 단순한 이벤트나 사내운동 따위로 쉽게 개선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님도 잘 알고 있다. 경영주가 직원들을 전적으로 신뢰해주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직원들을 백프로 믿어주고 맡겨주는 기업만이 셀프리더들을 고용할 자격이 있다.
‘우리를 가장 가치 있게 관리할 수 있는 회사는 미래산업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는 고광일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은근히 자랑스러웠다. 엔지니어들 사이에서 우리 미래산업이 ‘연구원들의 천국’으로 통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가장’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는 정말 그들을 가치 있게 관리할 자신이 있었다. 놀이터 같은 직장, 그 안에서 마음껏 망가뜨리고 부서뜨리는 에디슨들,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미래산업의 모습이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정 창업자가 12일 오후 9시30분께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향년 86세.
1999년 11월에 국내 최초로 미래산업을 나스닥에 상장시킨 정 창업자는 2001년 “착한 기업을 만들어 달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회사가 위기를 겪을 때 온 가족 동반자살을 생각했던 정 창업자는 그러나 미래산업이 성공가도를 달리는 동안 친인척은 물론 부인과 자녀들 조차 회사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또 다른 저서인 ‘아름다운 경영:벤처 대부의 거꾸로 인생론’에서 “주식회사란 사장의 개인 소유물이 아니어서 2세에게 경영권을 넘길 권리라는 게 사장에게 있을 턱이 없다”며 “역사가 가르치듯이 ‘세습 권력’은 대부분 실패한다”고 적었다.
자식들이 다니는 직장 상사를 찾아가 “우리 아들은 회사를 물려받지 않을 것이니 잘 키워달라”부탁했고, 은퇴를 선언하기 직전에 혹시라도 미련을 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심정에 두 아들을 불러서 “미래산업은 아쉽게도 내 것이 아니다. 사사로이 물려줄 수가 없구나”라고 양해를 구하자 두 아들이 “아버님께서는 저희에게 정신적인 유산을 남겨주셨습니다. 저희는 언제까지나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할 겁니다”라고 말하더라고 덧붙였다.
2001년 KAIST에 300억원을 기부한 데 이어 2013년 다시 215억을 보태 바이오·뇌공학과, 문술미래전략대학원을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당시 개인의 고액 기부는 국내 최초였다. 카이스트 정문술 빌딩과 부인의 이름을 붙인 양분순 빌딩도 지었다.
고인은 2014년 1월10일 기부금 약정식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기여하고 싶은 마음과 ‘부를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개인적 약속 때문에 이번 기부를 결심했다”며 “이번 기부는 개인적으로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소중한 기회여서 매우 기쁘다”라고 밝혔다.
국민은행 이사회 의장, 2009∼2013년 KAIST 이사장을 지냈다. 2014년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의 ‘아시아·태평양 자선가 48인’에 선정됐다.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과학기술훈장 창조장을 받았다.
유족은 양분순씨와 사이에 2남 3녀가 있다. 빈소는 건국대병원 장례식장 202호실, 발인 15일 오전 9시. 02-2030-7940.
채명석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oricms@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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