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엔 문학교과서 2(2) 스노우맨 교과서 미수록 부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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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이혜영 | 등록일 | 19.04.01 | 조회수 | 793 |
새해 첫날이 토요일이라는 건 좋은 징조 같았다. 직장에 매인 사람들은 몇 달 전부터 연휴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떠 있었다. 여행사들은 발 빠르게 기획 상품을 출시했고 그것들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나 고속버스, 기차, 비행기를 타고 짧거나 긴 여행을 떠났다. 도시에 남은 사람들은 각종 모임에 참석해서 송년과 신년의 분위기를 즐겼다. 과음과 과식 이후에도 숙취와 소화불량을 해소해줄 휴일이 하루 더 남아 있다는 건 근사한 일이었다. 새해의 첫날, 도시는 일찍부터 깨어 움직였다. 새해에는 늦잠을 자지 않겠다고 다짐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간밤의 여흥에 젖어 아침까지 번화가와 유흥가 근처를 배회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날이 밝자 브런치 약속이 있는 사람, 가족 단위로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려는 사람, 새해 첫날을 색다르게 시작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기상이변 때문에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지만 해가 기울고 가로등이 불을 밝히자 도시는 한결 따뜻해 보였다. 눈송이는 먼지나 보푸라기처럼 사뿐하게 내려앉았으나 그걸 발견한 사람들은 소란스러웠다. 누군가는 요란하게 침을, 누군가는 입버릇이 되어버린 욕을 내뱉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 오는 장면을 찍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흐지부지 내리다 만 첫눈 이후 도시에 처음 내리는 눈이었다. 거리를 걷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카페나 술집에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던 사람들도 와, 하며 입을 벌렸다. 새해 첫날 저녁, 고요하게 나부끼는 눈송이는 꽤 괜찮은 이벤트처럼 보였다. 남자는 다른 날보다 서둘러 출근 준비를 마쳤다. 새해 첫 출근인데다 긴 연휴 끝의 출근이라 얼굴도장을 제대로 찍어둘 필요가 있었다. 12월 초부터 흘러나온 인사발령에 대한 소문은 몸집을 계속 부풀려가는데다 실체도 또렷해졌다. 남자는 이번 발령에 내심 기대를 걸고 있었다. 더 이상 승진에서 밀려나면 곤란했다. 이발한 머리와 말끔하게 면도한 턱, 새하얀 셔츠와 잘 다린 양복을 입고 거울 앞에 선 남자의 모습은 패기 넘치고 믿음직스러웠다. 그러나 빌라 출입문 앞에서 남자의 어깨는 단번에 처졌다. 밤새 눈이 얼마나 내렸는지 유리로 된 공동현관문의 삼분의 이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한눈에 봐도 남자의 허리를 넘어서는 높이였다. 눈 더미가 바리케이드처럼 버티고 있어서 문이 열리지 않았다. 온 힘을 다해 밀어붙여봐도 유리문과 그 너머의 눈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몇 번 더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남자는 숨을 몰아쉬었다.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안될 것 같았다. 남자는 101호와 102호의 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왼쪽에는 칠십대의 노파가, 오른쪽에는 유도선수같은 인상을 한 삼십대의 남자가 살고 있었다. 안면은 없지만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들어가는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시간을 확인한 다음 남자는 102호의 벨을 눌렀다. 세 번 네 번 눌렀는데도 대답이 없었다.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남자는 다시 현관의 유리문을 밀어보았다. 반응이 없기는 유리문 쪽도 마찬가지였다. 급한 마음과 상관없이 사간은 정확하고 고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그다지 여유있다고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아내라도 부르려고 휴대폰을 꺼내는데 102호의 문이 열렸다. 102호 남자가 문밖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잠이 깨지 않아 눈이 반쯤 감긴 얼굴이었다. 문틈에서 따뜻하게 데워진 술 냄새가 새어나왔다. “......벨 누르셨어요?” “주무시는데 깨워서 죄송합니다.” “......누구세요?......무슨 일로?” “4층 사는 사람인데 지금 밖에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현관문이 열리지 않아요. 힘을 합치면, 저도 그렇고, 이따가 출근하실 때 수월할 것 같아서요.” 102호 남자가 슬리퍼를 챙겨신고 밖으로 나왔다. “와......눈이 정말 많이 왔네요. 근데......죄송하지만 다른 분께 도움을 청하시는 게 빠를 것 같습니다. 전 이제 출근할 일이 없거든요. 31일부로 그렇게 됐습니다.” 102호 남자가 하품을 하며 말하는 동안 남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잠자코 있었다. 상대의 이기적인 태도에 화가 나기도 하고 잠을 깨워서 미안하기도 하고 젊은 나이에 안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문을 연다고 해도...... 출근하기는 힘들 것 같은데요.” 102호 남자가 거리를 쓱 훑어보더니 한마디 덧붙이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 말을 무시하고 남자는 유리문을 몇 번 더 밀어보았다. 문이 아니라 벽을 상대하는 것 같았다. 현관문 너머는 지나치게 고요했다. 평일 이 시간 빌라 앞은 출근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 길이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지름길인데다 이 지역의 인구밀도가 꽤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거리에는 아무도 없다. 비현실적 두께의 눈 위에는 어떤 발자국이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소리와 움직임이 사라져서 문밖은 정지된 화면처럼 보였다. 빌라 밖의 생명체가 모두 사라졌거나 생명활동을 멈춰버린 것 같았다. 바람이 불자 쌓여있던 눈만 황량하게 흩날렸다. 그래도 남자는 시무식에 늦어 부장에게 한 소리 들을까봐 조마조마했다. 입김이 나오고 손가락이 곱을 정도로 추운데도 겨드랑이의 땀샘은 활발하게 가동했다. 남자는 회사 동료의 번호를 찾아서 눌렀다. 신호가 가는 동안 그가 다른 도시에 산다는 사실이 기억났고 그쪽 사정은 어떨지 궁금했다. 동료의 전화에서는 ‘지금은 통화중이오니......’라는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다시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에 전화를 걸어야 하나. 남자는 119와 112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민원신고센터 번호를 생각해내곤 재빨리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기억해낸 보람도 없이 ‘현재 모든 상담원이 통화 중이오니......’라는 기계음만 들을 수 있었다. 남자는 휴대폰을 듣 채 몸으로 계속 유리문을 들이받았다. 지각이 거의 확실시되자 남자는 이 사태가 이 지역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상사가 납득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범지역적인 재앙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가 움직임을 멈추자 주위가 다시 고요해졌다. 주머니 속에 든 휴대폰의 진동이 여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과장의 전화가 반가운 건 입사 이래 처음이었다. “김 대리, 어, 나도 현관문 앞에서 발이 묶였어. 아파트라 야간근무한 경비들이 몇 있긴 한데 그 사람들로는 어림도 없지. 연휴가 길었잖아. 암튼 상황을 좀 지켜보자고,. 일단 출근은 무리인 것 같으니까...... 무슨 조치가 있겠지. 변동사항 있으면 연락이 갈 거니까......” 남자는 네네, 하며 경직돼 있던 얼굴을 풀었다. 땀에 폭 젖은 러닝셔츠와 와이셔츠가 비로소 불쾌하게 느껴졌다. 집에 들어가자 네 살배기 딸에게 밥을 먹이고 있던 아내가 놀라며 쳐다봤다. “뭐 놓고 갔어?” “아니,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출근 못할 것 같아.” 아내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창문부터 열었다. 옮긴 지 일년밖에 안된 회사였다. 눈이 많이 왔다는 사실보다 출근을 못하겠다는 말이 그녀를 더 불안하게 만드는 게 분명했다. “회사 전체가 쉬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 “세상에......”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아내가 탄성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남자도 옆에 서서 밖을 내다봤다. 하룻밤 사이에 거리의 색감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폭설은 땅 위의 것을 공평하고 동등하게 덮어버렸다. 하얗게 빛나는 눈더미 속에 건물들의 하체가 고스란히 묻혀 있었다. 누군가 눈에다 전봇대와 가로수를 듬성듬성 꽂아놓은 것 같았다. 일 미터가 넘게 쌓인 눈은 밟으면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나는 보드라운 존재가 아니라 단단한 콘크리트 덩어리처럼 보였다. 그쳤던 눈이 다시 흩날리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속은 평화로웠다. 예정돼 있던 광고가 이어졌고 녹화된 드라마의 타이틀이 차질 없이 올라갔다. 뉴스는 연휴 동안 있었던 사건 사고 소식을 간추려 전했다. 고속도로에서 일어난 삼중추돌 사고와 A시의 한 공장에서 일어난 화재, 그리고 이 도시에 사상 최대의 폭설이 쏟아졌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눈이 쌓여서 도로가 마비된 화면은 확보하지 못했는지 함박눈이 쏟아지는 모습만 몇 장면 등장했다. 눈이다! 화면 속의 눈을 보고 딸애는 환호성을 지르며 팔짝팔짝 뛰었다. “저것 봐. 뉴스에도 나오잖아. 저래서 지금 출근을 못한다니까. 눈 때문에 빌라 현관문이 안 열리면 말 다 한 거지.” 수긍이 간다는 듯 아내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남자는 원래 연휴가 하루 더 남아 있었던 것처럼 소파에 길게 드러누웠다.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는데 배가 몹시 고팠고 피곤이 밀려왔다. 아이의 밥을 다 먹인 아내가 남자를 위해 밥을 새로 안쳤다.
다음 날 남자는 일어나자마자 공동현관문으로 내려가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눈의 높이는 어제와 비슷해 보였고 유리문은 밖으로 좀더 빌렸다. 하지만 네다섯살 된 애가 겨우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틈이라 출근은 무리일 것 같았다. 남자는 유리문에 바짝 붙어서 밖을 내다봤다. 어둑한 거리, 불 꺼진 상점, 발자국 하나 없이 깨끗하지만 녹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완강한 눈 더미, 집 밖은 공동묘지처럼 음산했다. 남자는 손을 겨드랑이에 끼고 어깨를 웅크렸다. 변동사항이 있으면 연락이 갈 거라고 했던 과장의 말이 떠올랐다. 출근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이 변동사항에 해당하는지 잠시 혼동이 됐다. 추운 겨울날 가족들이 한 집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면은 따뜻해 보이지만 실상이나 속내까지 따뜻한 건 아니다. 연휴 동안에도 세 사람은 집 안에서만 뱅뱅 맴돌았다. 딸아이의 감기가 심해서 나들이나 여행을 떠날 수가 없었다. 저녁 외식을 하러 집 근처의 갈빗집에 간 게 유일한 외출이었다. 연휴 내내 남자는 텔레비전을 보거나 온라인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 아내는 청소기를 돌린다 빨래를 넌다 하면서 종종거리며 움직였다. 게임 하는 아빠 옆에 있어봐야 재미없다는 걸 아는지 딸애는 엄마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그게 귀엽기도 하고 간마에 아빠 노릇 좀 하고 싶어서 장난을 걸면 딸애는 입을 삐죽거리다가 “아빠 싫어”하고는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아내가 집안일을 마치고 앉아서 쉬려고 하면 남자는 이상하게 배가 고팠다. 밥때여서 그런 건데도 남자는 자신의 시장기가 불법처럼 느껴졌다. 딸애의 감기 때문에 보일러는 하루 종일 작동 중이었다. 집 안의 온도는 필요 이상으로 높았다. 덥지 않다고 하면서도 아내의 얼굴은 붉었다. 딸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은 크리스마스 전부터 방학이었다. 그때부터 아이와 지내면서 씨름해야 했던 아내는 남자의 휴일까지 길어지자 더운 한숨을 토해냈다. 밥때가 가까워지면 아내는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한 끼는 라면으로 때우는데도 아내의 얼굴은 점점 더 붉어지고 부채질 횟수는 늘어났다. 아내가 한숨을 쉬면 남자는 슬그머니 일어나서 베란다로 나갔다. 남자는 어쩐지 집이 자꾸 좁아지는 것 같았다. 소파에 앉아 있으면 천장이 내려오고 벽이 다가와서 나중에는 옴짝달싹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옮겨가도 마찬가지였다. 사방이 밀폐용기처럼 꽉 막혀 있었다. 남자와 아내, 딸애 세 사람은 밀폐용기에 담긴 김치처럼 각자의 상태와 부피에 맞게 발효되고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밀폐용기는 터지기 직전까지 팽창하다가 남자가 담배를 피우러 나가거나 아내가 전화로 누군가와 수다를 떨 때 한숨처럼 공기를 뱉어내며 아슬아슬하게 모양을 유지했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남자는 사무실에 있는 자신의 자리가 그리워졌다. 자신의 진짜 자리는 거실 소파나 컴퓨터 앞 의자가 아니라 그 딱딱한 철제 책상과 흡연자들끼리 모여서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던 비상구 계단인 것 같았다. 찬바람이 들어온다고 아내가 잔소리를 했지만 남자는 자꾸 베란다에 나갔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는데 건너편 빌라의 현관문 앞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이틀 만에 처음 보는 외부인이었다. 검은 외투를 입은 여자는 빌라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눈을 파헤치고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왔는지 발치에 트렁크와 짐가방이 놓여 있었다. 손이 얼고 힘이 빠지기 전에 문을 열기 우해서 여자는 안간힘을 썼다. 뚫어놓은 구망으로 팔을 집어넣어 손잡이를 당기려다 뜻대로 되지 않자 몸으로 밀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자 허둥대다가 눈 더미에 발이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여자는 이따금 주위를 둘러보며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을 찾는 것 같았지만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혼자라는 걸 깨들은 여자는 체념하고 다시 눈 더미와 씨름했다. 담배를 다 피운 후에도 남자는 눈을 퍼내는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모습은 생크림 케이크 위에서 허우적거리는 한 마리의 개미처럼 보였다. “내 친구네 남편은 오늘 출근했다는데......당신도 나가봐야 되는 거 아냐?” 저녁을 먹는 동안 아내가 한 말은 그것뿐이었다. 무심한 듯 눈을 내리깔고 있지만 얼굴에는 의혹과 불안, 원망 같은 게 서려 있었다. 출근하는 게 나았겠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아내의 말이 야속하게 들렸다. 하지만 남아 있는 저녁 시간의 평화를 위해 남자는 잠자코 있었다. 사상 최대의 폭설로 완전히 마비되었던 도로와 거리가 경찰과 군부대, 시민들의 도움으로 조금씩 숨통을 터가고 있습니다. 헬기에 올라탄 기자가 도시 곳곳을 비추었다. 무릎까지 오는 장화와 안전모를 착용한 사람들이 삽을 들고 부지런히 눈을 퍼내고 있었다. 화면 속의 그들은 레고 병정 같았다. 빌라의 공동현관문이 열려 있는 걸 보고 남자도 출근준비를 마쳤다. 현관 앞에는 어른 한 사람이 눈을 퍼내면서 걸어간 흔적이 있었다. 몇 호의 누가 어떤 방법으로 문을 열고 나갔는지 궁금했지만 알아낼 길은 없었다. 남자는 심호흡을 한 다음 그 길을 따라 걸어갔다. 길은 얼마 가지 않아 끊어졌다. 대로변으로 나가려면 왼쪽으로 꺾어야 하는데 눈이 파인 길은 오른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남자는 막힌 깊 앞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쌓인 눈 때문에 도로와 인도도 구분할 수 없었다. 경찰과 군부대는 어디에서 제설작업을 하고 있다는 건지 이곳은 여전히 눈이 점령하고 있었다. 방송에는 도로 곳곳에 삽과 안전모를 비치해두었다고 했지만 그마저도 찾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남자는 가죽장갑을 낀 손으로 눈을 퍼내며 조금씩 앞으로 나갔다.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도시가 멈춰버리고 남자와 거대한 눈더미만 남은 것 같았다. 사람들이 모두 사라져버린 건 아니겠지. 남자는 엊그제 새벽에 본 재난영화를 떠올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며칠 동안 스스로의 무게에 눌려있던 눈은 흙처럼 육중하고 단단했다. 가죽이 젖으서 장갑 안이 금세 축축해졌다. 눈 더미 속에서 제설함과 삽 한 자루가 나왔다. 근처를 다 팠는데도 안전모는 찾지 못했다. 시민들을 위해 준비한 거라고 하기에 삽은 너무 낡고 녹슬었다. 하지만 남자는 젖은 장갑대신 삽을 쥐었다. 벌겋게 언 손이 욱신거렸다. 새해 첫 출근을 위해 차려입은 양복과 넥타이 때문에 남자의 동작은 굼떴다. 일할 때 그는 언제나 양복차림이었다. 불편하다고 말하면서도 그는 양복을 즐겨 입었다. 어느새 양복은 가장 자주 입는 옷, 그에게 가장 잘 맞는 옷이 되었다. 재킷과 바지가 흉하게 구겨졌지만 남자는 양복바지를 양말 안에 쑤셔넣거나 재킷 소매를 마구 걷어붙이지는 않았다. 작업이 힘들지만 이 눈을 헤치고 회사에 출근하면 얘깃거리도 생기고 남자에 대한 상사들의 인식도 바뀔 거라고 생각하며 참았다. 한 삽을 퍼내면 한발짝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지루하지만 정직한 직업이기도 했다. 세상에 혼자 남아 전설이 된 영화 속 주인공을 떠올리면서 남자는 눈을 퍼냈다. 평소 걸음으로 십분이면 왔을 곳을 한 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익숙하지 않은 노동에 남자는 금세 지쳤다. 집에서 회사까지는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였다. 이런 속도로 언제쯤 회사에 도착할 수 있을지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몸을 움직이면서 흘린 땀 때문에 셔츠가, 허리까지 쌓인 눈 때문에 구두와 바지, 속옷이 다 젖었다. 남자의 삽은 점점 느려졌고 눈이 쌓인 길은 끝이 없어 보였다. 삽을 쥐었던 손바닥엔 어느새 물집이 잡혔다. 고개를 돌리자 그가 파고온 길이 삐뚤빼뚤 이어져 있었다. 앞이 아니라 지그재그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삽으로 퍼낸 눈뭉치들이 원래의 자리로 굴러떨어졌다. 아득히 먼 곳에서 포클레인 같은 기계음이 들려왔다. 남자는 삽질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귀를 기울이면 그 소리는 기계음이 아니라 먼 데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 같기도 했다. 그래도 남자는 그게 도로 위의 눈을 치우는 기계 소리라고 믿고 싶어졌다. 도시의 제설작업은 멈추지 않았고 이곳의 눈을 치우기 위해 돌진 중이다, 하루 이틀쯤 집에서 버티다보면 분명히 길이 뚫릴 것이다. 언제 눈이 내린 적이 있었냐는 듯 도로 위로 차들이 달리고 교통체증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믿는 편이 이 눈을 헤치면서 출근하는 것보다 쉬울 것 같았다. 어차피 지금은 공장이나 거래처도 다 쉬고 있어서 출근해봐야 할 일도 없을 텐데, 이렇게까지 하면서 갈 필요가 있을까. 남자는 슬그머니 삽을 내려놓았다. 출근하고야 말겠다던 야심찬 계획은 어느새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말았다. 전화벨은 기막힌 타이밍에 울렸다. 발신번호를 확인한 남자가 인상을 확 구겼다. “네, 부장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제가 먼저 안부전화 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김대리, 내가 지금 그런 인사 받자고 전화했는지 알아? 너 지금 어디야? 우리 사업부에서 너만 출근 안했어.” “네? ......아, 지금 가는 중입니다. 눈 때문에 현관문이 안 열려서.....,” “야, 너 사는 데만 눈 왔냐? 지금 세상천지가 눈이야. 이 새끼가 빠져가지고. 며칠 시간을 줬으면 미리미리 눈도 치워놓고 출근 준비를 해야될 거 아니야. 넌 그러니까 안되는 거야. 새끼가 눈치도 없지, 근성도 없지, 네 나이에 대리달고 있는 거 쪽팔리지도 않냐? 새해부터는 잘해보겠다며. 이 새끼는 맨날 술 마실 때만 열심히 한다 그러지. 회사가 우습냐? 먹고 사는 게 우스워?” 부장은 속사포처럼 퍼부어댔다. 아닙니다, 무섭습니다.......라는 말 대신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거의 다 왔으며 무조건 빨리 가겠다는 거짓말이었다. 삽으로 눈이 아니라 머릿속을 퍼낸 것처럼 정신이 없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남자는 시간을 확인했다. 부장이 제시한 데드라인까지는 두 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허리까지 쌓인 눈을 마주했을 때보다 더 막막해졌다. 남자는 양복바지를 양말 안에 쑤셔 넣고 재킷의 소매를 아무렇게나 걷어붙였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은 건 그들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지난 밤에 출근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빌라의 현관문이 열려 있었던 것도 밤새 누군가가 근성을 갖고 밀어붙인 결과였다. 남자는 자신의 안일함과 무능력함을 자책하며 삽을 들었다. 눈을 부드러운 솜사탕이나 포근한 솜이불에 비유하는 건 눈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언 눈 속에서 삽질을 몇 번만 해보면 그동안 눈의 낭만적인 표면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얼어붙은 눈은 유리조각처럼 날카롭고 위험하다. 부딪히거나 긁히기만 해도 바로 피가 맺힌다. 손등에 난 피를 혀로 핥고 나서 남자는 발로 삽을 꾹 눌렀다. 군 복무 시절 무릎까지 쌓인 눈을 치울 때도 지금보다는 수월했다. 그 눈은 물에 젖은 모래처럼 무겁긴 했어도 남자의 앞길을 막거나 목을 조르지는 않았다. 폭설이 이 도시가 아니라 남자의 인생에 쏟아져내린 것 같았다. 팔다리에 힘이 빠질수록 남자는 한 마리의 두더지가 되고 싶었다. “김대리, 지금 어디야?....... 아직 거기밖에 못 왔어? 나도 혹시나 해서 와봤더니 상황이 이렇더라고. 안 왔으면 좆될 뻔했지. 지금 누구랑 오고 있어?” 혼자라고 하자 과장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런 비상사태에 혼자서 움직이면 어떡해. 비상연락망은 폼으로 줬는지 알아? 이럴 때 쓰라고 준 거 아냐. 왜 그렇게 융통성이 없어. 사람들이 어떻게 제시간에 출근했을까 생각을 좀 해봐. 이틀 동안 개인적으로 판 다음에 가까이 사는 동료들끼리 만나서 같이 뚫고 온 거 아냐. 그게 사회 생활이고 회사생활이잖아. 혼자 할 일이 있고 협력해서 해야할 일이 있고, 그 정도는 말 안해도 알아서 해야지. .......암튼 서둘러 오라고.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까.” 사업부 전체에서 출근하지 않은 사람은 남자와 제2사업부의 유대리 두 사람뿐이라고 햇다. “유대리야 평소에 점수 따놓은 것도 있고 그쪽 부장이 무르니까 내일까지는 괜찮을 거 같은데, 알잖아, 이쪽은 지랄같은 거. 거기다 넌 찍힌 몸 아니냐. 오기만 하면 갈아마실 거라고 벼르고 있어. 부장 그 새끼 지기 싫어하는 거 모르냐? 아직도 그런 게 파악이 안돼?” 출근은 했지만 할 일이 없는 과장은 잔소리를 길게 늘어놓았다. “내가 누누이 말하잖아, 사회생활의 99퍼센트가 인간관계라고. 눈치도 좀 보고 고개도 좀 숙이고 비위도 맞춰가면서, 응? 더럽고 치사해도 말이야. 솔직히 우리가 회사생활 아름다워서 하는 건 아니잖냐.” 땀이 마르면서 남자의 몸은 차갑게 식어갔다. 어쩔 수 없이 남자는 한 손으로는 휴대폰을 쥐고 한 손으로 어설프게 삽질을 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유대리의 집이 남자의 집과 회사의 중간쯤에 있다는 점뿐이었다. 유대리가 출근하지 않은 건 좀 의외였다. 그는 제2사업부의 유력한 과장 후보였다. 초고속이라고 할 순 없지만 만년대리, 만년 과장이 많은 회사의 분위기를 볼 때 확실히 빠른 승진이었다. 일밖에 모르는 타입이라 인간관계가 좋은 건 아니지만 평판이 나쁜 편도 아니었다. 남자는 유대리가 사무실에 남아 야근하는 걸 여러 번 보았다. 컴퓨터 앞에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유대리의 옆모습은 움직임이 없어서 컴퓨터 책상과 한 세트 같았다. 저녁 먹고 대충 시간 때우다가 퇴근하는 인간들하고는 질적으로 달랐다. 점심시간이 지나서 남자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회사 건물이 아니라 눈을 열심히 파내고 있는 다른 삽이었다. 그건 남자의 삽보다 크고 견고해 보였다. 초록색 삽은 쉬지 않고 눈을 퍼냈다. 남자가 파놓은 길에 다다라서야 상대는 고개를 들고 숨을 몰아쉬었다. 이십대 후반이나 삼십대 초반으로 보인느 젊은 남자였다. 아웃도어 브랜드의 이름과 로고가 새겨진 기능성 재킷으로 무장하고 있어서 에베레스트 산에 던져놓아도 끄떡없을 것 같았다. 그가 쓴 고글 위로 햇빛이 반짝거렸다. 남자는 젖었다가 마르기를 반복한 주름진 양복이 부끄러웠지만, 눈으로 뒤덮인 허허벌판에서 누군가를 만났다는 사실이 반가워서 어색하게 눈인사를 건넸다. “출근하는 길이신가봐요.” 젊은 남자가 땀을 닦으면서 먼저 입을 열었다. “네, 회사에서는 빨리 안 온다고 난리가 났는데 몸이 안 따라주네요.” “저랑 비슷하시네요. 천재지변인데 출근해야 되냐고 물었다가 팀장한테 엄청 깨졌거든요. 삽자루 들고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젊은 남자는 생수를 한모금 마시고 남자는 담배를 한 대 피워물었다. 두 사람은 상대적인 빈곤감을 느끼게 했던 황금연휴와 기상청도 감지하지 못한 폭설에 대해 몇 마디 나눴다. 세상이 점점 더 팍팍해지고 사는 게 녹록지 않다는 이야기도 했다. “월급은 그대론데 물가는 자꾸 오르지, 일할 수 있는 건 몇 년 안되는데 평균수명은 길어지지, 병원비는 계속 오르지, 범죄는 늘어나지, 툭하면 이상 기후에......” 랩처럼 이어지는 상대의 불평을 들으며 남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르는 사람과 사심없이 대화를 나누는 게 얼마만인가 생각했고 뜻밖에도 말이 잘 통한다는 것에 위안을 받았다. 이야기는 단박에 열기를 띠었다. “맞아요. 사는 게 전쟁입니다. 위에서 누르지 밑에서 치고 올라오지 옆에서 밀지, 버티고 서 있는 것도 힘들어죽겠는데 폭설까지 내려서 출근이 이렇게 힘들어질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래가지고 오늘 안에 출근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제가요, 이런 개고생 안 하려고 학교 다닐 때 기를 쓰고 공부하고 발버둥쳐서 대기업에 들어온 거거든요. 근데 달라진 게 별로 없는 것 같아요. 한마디로 인생에 여유라는 게 없습니다........그때 A그룹으로 갈 걸 그랬어요. 그쪽은 오늘 출근 안 하거든요. 그런 게 진짜 대기업이죠,.” 대기업이라는 말에 따뜻하게 배어 있던 땀이 급격하게 식어갔다. 남자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ㅌ은 녹슨 삽이나 구겨진 양복 따위가 아니었다. “이것도 인연인데, 근처 오면 전화 주세요. 술 한 잔 하죠. 말도 잘 통하고 처지도 비슷한 거 같은데.” 남자는 상대가 건네는 명함을 받아들었다. 익숙한 대기업의 로고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남자는 명함이 다 떨어졌다고 얼버무린 다음 서둘러 삽을 잡았다. 말은 잘 통하는지 모르겠지만 처지가 비슷하지 않아서 마음이 냉랭해졌다. 고글을 쓴 젊은 남자는 왼편으로 멀어져갔다. 뒷모습이 스키장에서 보드를 타는 사람 같았다. 그새 눈이 두 배쯤 단단하고 무거워진 기분이었다. 옆으로 누운 음식물쓰레기 수거함과 주차금지 입간판 같은 것들이 눈 속에서 나왔다. 삽 끝에 뭔가 걸릴 때마다 남자의 입에서는 욕이 튀어나왔다. 출근길의 방해물은 눈 더미만으로도 충분했다. 몇 번 더 통화를 시도했지만 유대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신호음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여름에도 폭우 때문에 도시 전체가 마비될 정도로 큰 물난리가 났었다. 도로가 물에 잠기고 지하철 일부 노선의 운행이 중단돼서 출근길이 몹시 혼잡했다. 한 시간 늦은 사람부터 점심 때 출근한 사람까지, 제시간에 출근카드를 찍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속옷까지 다 젖을 정도로 뛰었는데도 남자는 열한 시에 도착했다. 회사 전체에서 출근 시간을 정확하게 지킨 사람은 유대리뿐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시간 맞춰 온 게 아니라 전날 밤 회사에서 잤대. 비 오는 거 보니까 출근 못할 것 같아서 아예 퇴근을 안했다는 거야.” 박대리가 담배를 꺼내물었다. “역시 유대리네.” 구대리는 말 끝에 감탄인지 야유인지 애매한 추임새를 넣었다. “근데 말이다, 제 시간에 출근하는 게 그렇게 중요한 거냐?” 남자가 투덜거리자 박대리가 손에 든 종이컵을 우악스럽게 구겨버렸다. “그래서 너보고 김새는 김대리라고 하는 거야. 저쪽은 유능한 유대리고.” 그 말에 구대리가 한숨을 내뱉듯 웃었다. 박 터지는 박대리와 구박받는 구대리라는 말이라 남자도 그냥 웃어넘겼다. 그렇게 열성적이던 유대리가, 출근에 목숨거는 사람이 아직 출근을 하지 않았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속사정이야 어떻든 남자의 입장에서는 같이 출근할 동료가 남아 있다는 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유대리를 만나야 출근이 수월해질 텐데. 전화를 계속 안 받는 걸 보면 유대리도 출근하기 위해서 눈을 펴내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유대리가 먼저 회사에 도착할까봐 남자는 마음이 급해졌다. 시내쪽으로 나오자 눈을 퍼내면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하나둘 눈에 띄었다. 유대리가 사는 오피스텔은 남자가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지난봄에 대리들 몇이 거기 몰려가서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지은 지 얼마 안된 오피스텔은 깨끗하고 인테리어가 고급스러웠다. 이런 건 얼마냐? 실평수는 어떻게 돼? 집을 둘러보며 다들 질문을 던졌다. 이런 데서 혼자 살았으면 좋겠다. 남자는 술에 취해서 중얼거렸다. 그때도 유대리는 빈 명이 늘어날 때마다 출근 걱정을 해서 사람들의 빈축을 샀다. 중심가라 그런지 주상복합 오피스텔의 입구는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남자는 출입문 앞에서 호수를 누르고 유대리가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뚜우, 뚜우, 신호만 갈 뿐 응답이 없었다. 집에 있을 리가 없지. 남자는 유대리가 멀리 가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랐다. 담배도 한 대 피울 겸 통화 버튼을 여러번 눌렀지만 유대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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