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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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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온 편지72(20240625)
작성자 송창우 등록일 24.06.24 조회수 13
첨부파일

제나온 일흔두 번째 편지, 2024625, 화요일에

 

사춘기라는 고양이 / 정유경

 

 

햇빛 잘 드는 창가에서

털을 핥고 있는

한 마리 평화로운 고양이처럼

책상 위로 고개를 잔뜩 숙이고서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고르고 있죠.

 

가까이 오지 말아요.

잔소리도 말아요.

 

발톱을 세우며

얼굴을 찡그리고

온힘으로 하악거리는 고양이처럼

나도 험한 표정, 험한 말 몇 가지가 그만

나와 버릴 지도 몰라요.

 

 

▷ 하느님이 천사들과 함께 연극 연습을 하고 있었어요. 토끼와 자라가 나오는 수궁가를 재미있게 각색을 해서 모둠별로 한 장면씩 무대 위에 올리는 과제를 받았거든요. 각자 배역을 맡아서 시청각실 무대에서 발표하기로 한 날이 가까워지는데도, 무대를 가리는 커튼을 밀어젖히고 말아가며, 숨바꼭질을 하고 장난을 치느라 연습은 뒷전인 난장판 수업시간이라니요! 그래도 하느님은 인내심을 발휘하고 천사들을 쫓아다니며, 배역을 자신감 있게 표현하라는 으름장을 놓아가며, 천사들을 독려하느라 부산이 났죠. “천사님들, 인생은 연극이에요. 잠깐 세상에서 자기 역할을 하고 가는. 그러니 내 역할을 충실히 하며 다른 사람을 흉내 내지 않고,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게 중요하지요. 근데, 우리 천사님들은 어떤 역할 맡기를 고대하나요?” 세실리아 천사가 말했어요.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우아하고 잘 난 캐릭터가 최고지 않겠어요? 거들먹거리며 큰소리 빵빵치는, 있어 보이는 역할을 해야 제대로 산 것처럼 후회가 없지 않겠어요?” 마르첼리나 천사가 말했어요. “캐릭터라는 말은 개성이란 말이잖아요? 어떤 역할을 맡든 다른 사람에 비해서 톡톡 튀는 역할을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맘껏 발산해야 한다는 거죠. 밋밋한 캐릭터가 모이면 누가누구인지 구분이 가지 않고, 그런 캐릭터들이 모아지면 서로 부딪히는 갈등이 생기지 않아, 클라이맥스라는 짜릿한 순간도 경험하기 어렵지 않을까요?” 마리아 룻 천사가 말했어요. “연극에서 최고로 힘이 센 사람은 캐릭터를 마음대로 움직이는 연출자 아닌가요? 그리고 연출자가 좋아하는 캐릭터는 뿌리 없는 영혼들이고요. 배우의 삶이 어떻든 간에 무대 위에서는 자기 역할에 맞는 연기를 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잊어야 멋진 연기를 할 수 있는 거죠. 그들은 오직 관객을 위해서 연기를 한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되지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사춘기 병을 앓는 천사라 하더라도, 연출자 지시에 따라 실감나는 역할을 할 때 객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나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지요. 지금도 이렇게 말 안 듣고 연극을 망치는 천사님들 연기도 모두 다 하느님 뜻대로 살기 위한, 뿌리 없는 영혼들의 실감나는 연기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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