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등중학교 로고이미지

경건의 시간

RSS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카카오톡 공유하기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네이버밴드 공유하기 프린트하기
7월 18일 경건의 시간(새하얀 거깃발, 착한 거짓말)
작성자 한승진 등록일 22.07.18 조회수 61
첨부파일

2022718일 경건의 시간

새하얀 거짓말, 착한 거짓말

마태복음 1617-1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유대인의 탈무드에서는 두 가지 경우에는 거짓말은 해도 좋다고 한다. 하나는 가까운 사람이 시장에서 물건을 산 후에 그 평을 요청했을 경우, 맘에 들지 않아도 아주 잘 샀다. 과연 안목이 높다.”는 거짓말을 해도 좋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친구의 결혼식에서 별로 예뻐 보이지 않는 신부일지라도 참 아름답습니다. 행복하게 사십시오.”라고 말해도 좋다는 것이다. 정직은 최상의 정책이라는 말이 있다. 정직을 좌우명으로 살았기에 성공한 위인들의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언제나 정직해야만하고 그 반대인 거짓말은 무조건 해서는 안 되는 건 아니다. 어떤 때는 정직보다 거짓말이 좋을 때도 있다. 도덕적으로 정직이 바른 덕목인 것은 사실이지만 도덕적으로 문제로 보일 수 있지만 거짓말이 유용할 수 있다. 우리는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사실을 왜곡할 때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규정하고 비난하고 경계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남에게 유익을 주거나 진실을 드러낼 때 이를 새하얀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착한 거짓말일 것이다. 우리가 만나는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잘 해야 한다. 아이들의 객관적인 현실과 과학적인 근거로는 부족하고 문제가 확실하다고 해도 그것만 볼 것이 아니라 사랑의 눈으로 우리와 관계 맺는 사랑의 틀로 보고 현실이 아닌 가능성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거짓말이니 잘못이라고 할 수 있으나 내가 거짓말쟁이가 되더라도 그것이 아이에게 유익이 도니다면 도덕적인 흠결이 있어도 감내할 수 있어야한다. 이런 새하얀 거짓말 혹은 착한 거짓말에도 그에 대한 윤리적인 성찰이 필요하고 지혜가 필요하다. 이를 되새겨본다

      

미국의 한 초등학교 교사가 색다른 실험을 했다. 어린이들을 임의로 두 무리로 나누어 한 무리의 아이들에게만 가슴에 빨간 리본을 달아 주면서 , 이제부터 리본을 단 사람은 좋은 사람이에요.”라고 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어린이들의 행동에 점차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아무런 지시가 없어도 아이들 사이에 저절로 서열이 정해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도 리본을 단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앞에 섰고, 반대로 리본이 없는 아이들은 아무 이유 없이 뒤에 서곤 했다. 1주일 후 이번에는 반대로 적용했다. 리본을 달지 못했던 아이들에게 리본을 달아주었다. 그러자 지난번에 리본을 달았던 어린이들이 친구들의 눈치를 보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불과 1주일 전만 해도 자신들이 앞에 있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은 것 같았다. 이 실험 결과는 어떤 암시를 받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행동 유형과 성장 속도가 크게 좌우된다는 이론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이를 심리학 용어로 피그말리온 신드롬이라고 한다. 예수님도 이 방법을 사용하셨다. 예수님은 매일 실수만 하는 베드로에게 반석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다. 전에는 그저 시몬이라는 이름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반석이라는 뜻을 가진 베드로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솔직히 베드로에게는 반석같이 믿음직한 구석은 없었다. 오히려 변덕이 죽 끓듯 했고 성격이 너무 급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베드로를 실수투성이, 변덕쟁이라 부르지 않고 언젠가는 반석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이름에 실어 주셨다. 그 결과 그는 정말 반석 같은 인생의 주인공이 되었다. 순교를 각오하고 복음을 전하였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을 만큼 놀라운 믿음을 보였다.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또 가족과 이웃에게는 어떤 암시를 주고 있나? 나의 말 한마디 말과 작은 행동이 나와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 로젠탈 효과(Rosenthal Effect)라는 말이 있다. 이는 칭찬의 긍정적 효과를 설명하는 용어이다. 이 말의 유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였던 로버트 로젠탈 교수가 발표한 이론으로, 1968년 로젠탈 교수는 샌프란시스코의 한 초등학교에서 20%의 학생들을 무작위로 뽑아 그 명단을 레오노레 야콥슨 교사에게 주면서 지능지수가 높은 학생들이니 관심을 가진다면 분명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8개월 후 명단에 오른 학생들이 다른 학생들보다 평균 점수가 높았는데, 그 이유는 교사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교사는 지능이 높다는 교수의 평가를 듣고는 다른 학생들보다 더 많은 신경을 쓰며, 힘들어할 때나 시험을 그리 칠 경우에도 늘 격려하며 힘을 주었다. 그 결과 일반 학생들보다 높은 평균 점수를 받을 수가 있었다

 

로젠탈의 또 다른 실험이 있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선생님이 어떤 학생에 대해 평가하는 화면을 녹화한 비디오를 학생들에게 보여줬는데, 소리를 죽여 실제 말소리는 듣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불과 10초도 지나지 않아 학생들은 선생님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지 부정적으로 평가하는지를 거의 정확히 맞힐 수 있었다. 두 실험을 종합하면 이렇다. 학생에 대해 긍정적 편견을 갖게 된 선생님은 좀 더 열성적으로 가르칠 뿐 아니라 말 한마디 얼굴 표정 하나만으로도 아이에게 긍정적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본능적으로 선생님이 자신을 좋게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학생은 역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노력의 결과로 학생의 성적이 선생님의 기대처럼 향상되면 선생님은 자신의 혜안을 확신하게 되며 더더욱 학생에게 친절히 다가간다. 이렇듯 선생님의 기대 심리와 학생의 부응 심리는 서로 맞물리면서 상승효과를 나타낸다. 선생님이 대놓고 칭찬하지 않더라도 비언어적 의사소통에 민감한 아이들은 선생님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확히 찍어낸다.

 

로젠탈 효과는 피그말리온 효과와 일맥상통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피그말리온 효과는 교육심리학에서 심리적인 행동의 하나로써 교사의 기대에 따라 학습자의 성적이 향상된 것을 뜻한다. , 믿음에서부터 오는 기대, 그리고 예측이 실제적인 결과로 일어나는 경우를 말한다. 유래를 살펴보면 그리스 신화에서 키프로스에 사는 피그말리온이라는 젊은 조각가 이야기에서 탄생되었는데, 피그말리온은 못생긴 자신의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어 자신 속에 스스로 갇혀 살기를 좋아했었는데, 늘 자신만을 사랑해주는 아름다운 여인을 조각하여 그 조각상과 항상 대화하며 사랑을 하게 된다. 어느 날 아프로디테 여신이 축제일에 간절한 기도를 울리면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는 조각상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데, 이로 인해 그의 조각상은 사람으로 변화된다. 그리고 피그말리온은 조각상의 여인과 결혼하여 딸 파포스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우리가 사랑의 눈으로 진실한 자세로 사람을 바라보고 대할 때 얼마나 큰 가치로 인식되는 지를 일깨워준다.

 

이는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기도 하는데, 교육자가 아이에 대해 나쁜 인상을 갖게 된다면, 교육자인 선생은 알게 모르게 아이에게 부정적인 메시지를 보내게 되고, 아이는 또 이를 날카롭게 읽어낸다. 그러면서 그 아이도 선생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제대로 된 교육이 진행이 되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번에는 반대로 악순환으로 이어지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김춘수의 이라는 시가 있다. 이 시는 이름을 불러 주는 것에 대한 의미를 깊게 드러낸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주의 깊게 관심을 갖고 바라본 것이다. 관심(觀心)이라는 말은 한자에 담긴 의미대로 마음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저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기에 깊게 보고 사랑을 담아 낼 수 있다. 이름을 불러 줌은 관계맺음이다. 이름은 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서 어울림의 관계를 위해서 있는 것이다. 서로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주고 함께함으로 나를 넘어 우리가 된다.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관계맺음 속에서 우리는 새하얀 거짓말, 착한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이는 내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래서 우리를 위해서이다.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 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전글 8월 22일 경건의 시간-보이스 피싱 누구나 당할 수 있다
다음글 7월 5일 경건의 시간(춘풍추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