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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굴욕'... 왜선은 침몰 못시켰다?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좌대에 중대 오류... 서울시 "우린 모르는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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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노희경 | 등록일 | 19.06.01 | 조회수 | 662 | ||||||||||||||||||||||||||||||||||||||||||||||||||||||||||||||||||||||||||||||||||||||||||||||||||||||||||||||||||||||||||||||||||||||||||||||||||||||||||||||||||||||||
서울 광화문 세종로 이순신 장군 동상은 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이었던 고 김세중 작가(1928.7.24∼1986.6.24)가 1968년 서울시 의뢰로 제작한 작품이다. 그는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수상하고 은관문화훈장을 추서 받은 한국의 유명 조각가이자, 모교인 서울대 미대에서 학장도 역임한 화려한 이력을 가진 예술가였다. 고 김세중 작가는 이력에 걸맞게 많은 작품을 제작하고 남겼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혜화동 성당 '최후의 심판도(1952)', 천주교 '순교기념탑(1965)', 장충동 공원 '유관순 열사 동상(1970)', 어린이 대공원 분수 '모자상(1972)', 국회의사당 '애국애족 군상(1977)' 등은 일반인도 한두 번은 보거나 들어본 적이 있는 것들이다. 세종로에 세워진 이순신 장군 동상 역시 고 김세중 작가의 걸출한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이순신 장군 동상에 대해서는 많은 찬사와 더불어 이에 못지않게 많은 논란 있었다. 그 논란은 다음과 같이 7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이순신 장군이 패장처럼 칼을 오른 손에 들고 있다 ② 항복하러 온 장군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다 ③ 중국풍의 갑옷을 입고 있다 ④ 칼이 일본도이다 ⑤ 독전고(전쟁에서 승리를 독려하는 북)가 누워 있다 ⑥ 이순신의 얼굴이 작가를 닮았다 ⑦ 좌대(받침대)가 일본의 해군 발상 기념비와 유사하다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의 7가지 문제점, 그리고 물론 이런 의문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우선, '김세중 기념사업회(회장 김남조, 서울 용산구 효창동 소재)'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①의 의문에 대해 설명했다. 이순신 장군의 모습은 목숨을 바쳐 조국에 충성한 수호자적 인물의 상징적 자세와 모습이라는 것이다. ②의 문제에 대해 김 작가의 부인 김남조 시인은, 이순신 장군이 국민들과 눈을 맞추려는 의도로 고개를 숙인 것이라고 설명한다. <조선일보> 2009.01.31 ③에 대해서는 김 작가가 이당 김은호 화백의 이순신 장군 영정과 복식 전문가 석주선씨의 고증에 의해 제작한 것이라고 '김세중 기념사업회' 인터넷 홈페이지와 김 작가의 유족이 밝히고 있다. <조선일보> 2009.01.31 ④의 문제는 김 작가 유족이 현충사의 칼이 일본도라고 주장하면서 김 작가가 현충사 칼을 모델로 하였다고 밝혔다.(<조선일보>, 2009.01.31). 즉, 세종로의 이순신 장군이 일본도를 쥐고 있는 게 맞다고 김 작가 유족이 확인한 셈이다. ⑤의 문제는 '김세중 기념사업회'나 김 작가 유족 쪽에서 해명한 게 없다. ⑥의 문제는 예술가는 얼굴을 그리거나 조각할 때 은연중에 자기 얼굴과 비슷하게 표현한다고 하지만, 이순신 장군과 김 작가가 닮았다는 말은 유족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을 아꼈다. <조선일보> 2009.01.31). ⑦의 문제에 있어서는 '김세중 기념사업회'나 김 작가 유족이 해명한 바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김세중 기념사업회'나 김 작가 유족의 적극적인 해명에도 불구하고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서울시 의회 문상모 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12월 21일에 '짝퉁 광화문 충무공 이순신 동상 복귀 보류 결의안'을 서울시의회에 제출했고, '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의 혜문 사무총장은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은 1979년 서울시가 철거를 결정한 동상이라면서 이의 기록을 보여줄 것을 요구하는 행정심판을 청구했다. 그리고 김용철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원은 이순신 동상 조형물 전체 형태가 일본의 미야자키현에 있는 일본 해군 발상지 기념비와 흡사하다며 이순신 동상 자체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이순신 장군 동상에 대한 문제 제기와 논란은 오래 전에도 있었다. 1977년 5월, 문화재 전문가들이 이순신 장군 동상 고증이 잘못되었다고 누차 지적하자, 서울시가 '문화공보부 영정 심의위원회'에 정확성 여부를 심의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1979년 5월에는 서울시가 문공부에 충무공 동상을 재조성할 것을 요청하여 허가를 받은 적도 있다. 또 1980년 1월에는 표준 영정에 의해 새로운 동상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예산 2억3000만 원을 책정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 동상은 교체되지 않았고 많은 논란을 안은 채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 동상의 문제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나는 지금까지 논란이 된 적이 없는 새로운 문제점을 발견했다. 내가 보기엔, 이순신 장군 동상을 받치고 있는 좌대 전체를 바꿔야 하는 심각한 문제다. 광화문 세종로의 이순신 장군 동상 좌대에는 거북선의 출정 장면(좌측)과 거북선의 해전 장면(우측)이 각각 양측에 부조로 새겨져 있다. 좌대 우측 부조에서 거북선은 맹활약을 펼치며 적함을 침몰시키고 있다. 우측 좌대에서 볼 수 있는 침몰 중인 전함은 총 8척이다. 이들 전함은 저마다 자욱한 연기를 내뿜으며 침몰하고 있다. 그러나 거북선의 공격에 의해 침몰되는 적함은 기가 막히지만 모두 왜선이 아니다. 침몰되고 있는 함선들은 전부 명나라 전함인 호선(唬船) 또는 사선(沙船)이다. 부조의 내용만 보면 그렇다. 임진왜란 당시의 왜선은 '아타케부네(安宅船)', '세키부네(関船)', '고바야(小早)' 등이었다.
이순신 장군 동상 좌대, 침몰하는 배는 일본배가 아니다 이들 전함 중에서 소형 거룻배의 일종인 '고바야'를 제외한 '아타케부네'와 '세키부네'는 2층 이상의 구조로 된 갑판을 갖고 있다. 때문에 일본 전함 '아타케부네'와 중형 전함 '세키부네'에는 '고바야'에 없는 '패판'이 있다. '패판'은 층과 층 사이의 외벽으로서 직사각형의 나무널판이다. 즉, '패판'의 세로 높이가 곧 1개 층의 높이가 된다. '패판'은 층간의 외벽인 동시에 적함의 포탄, 화살 등과 같은 공격을 막는 방패의 역할을 한다. 따라서 '고바야'는 갑판이 단층이어서 복층 구조인 '아타케부네'나 '세키부네'와는 달리 층간 외벽인 '패판'이 없다.
그러나 비록 '아타케부네'와 '세키부네'가 조선의 함선과 마찬가지로 갑판 위에 패판을 두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패판이 함수 끝부분까지 둘러쳐져 1층의 갑판이 밖으로 일체 노출되지 않은 조선의 함선과는 달리 이들 왜선은 함수 부분에 패판이 없어서 1층의 함수 갑판이 외부로 그대로 노출돼 있다. 조선의 함선과 뚜렷이 구별되는 점이다.
또한 조선의 함선에는 다음 사진에서 보듯이 함미부 외판의 꼬리가 하늘로 치솟아 있는데 반해 왜선에는 이러한 꼬리가 일체 없다.
그리고 왜선은 함수 끝부분 또는 함미 끝부분에 돛대를 세운다는 특징을 가진다. 따라서 함선의 중앙에는 돛대를 설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반면 조선의 함선은 돛대를 중앙 부분에 필히 세운다. 때문에 어느 배든 일단 중앙에는 돛대가 서 있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 동상 우측 좌대에서 거북선에 의해 침몰하는 함선은 왜선이므로 당연히 외선의 특징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측 좌대 부조에서 침몰하고 있는 배 중에는 놀랍게도 이러한 왜선의 특징을 가진 함선은 단 한 척도 없다.
이순신 장군 동상의 우측 좌대 부조에서 침몰하는 배를 보면, 일단 모든 배의 갑판이 단층으로 되어 있다. 즉, 침몰 중인 함선은 패판을 두른 복층 갑판 구조의 '아타케부네'와 '세키부네'는 아니다. 그렇다면 단층 갑판 구조인 '고바야'일까? 하지만 이는 돛대 하나 설치하기도 버거운 조그마한 거룻배이다. 그런데 좌대의 부조에서 침몰하고 있는 배는 거북선과 필적할 만큼의 대형 함선이자 돛단배이다. 다시 말해 절대로 '고바야'는 아닌 것이다. 그리고 '고바야'는 자그마한 거룻배이므로 갑판 위에는 선실이 없다. 하지만 좌대의 부조에서 침몰하고 있는 배에는 사진에서 보듯이 갑판 위에 선실이 있다. 따라서 침몰하고 있는 배는 '고바야'가 될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왜선은 일반적으로 돛대를 함수 또는 함미에 설치하는데 동상의 좌대 부조에서 침몰 중인 배들은 한결같이 돛대가 배의 중앙에 설치되어 있다. 결국 좌대 부조에서 거북선에 의해 침몰하고 있는 전함은 왜선이 아닌 것을 말한다. 그런데 좌대의 부조 중에는 마치 일장기 마냥 동그라미가 돛에 그려져 있는 배가 침몰해 들어가고 있는 장면도 있다. 그나마도 이 장면이 유일하다.
그러나 이 배 역시 갑판이 단층이며 돛을 배의 중앙에 설치했다. 혹, 이 배를 '고바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 배는 쌍돛을 단 대형 함선이다. 돛 하나도 버거운 조그마한 거룻배인 '고바야'가 쌍돛을 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이 배에는 군령의 깃발이 페넌트 형식(좁고 기다란 삼각형)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왜군은 이러한 페넌트 형식의 깃발은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반면 우리 수군과 중국 수군은 페넌트 형식의 깃발을 일반적으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동그라미가 그려진 배는 '고바야'는 물론 '아타케부네'나 '세키부네'도 아닌 배가 된다. 단지 돛에다 동그라미만 그려 넣은 배일 뿐이다. 즉, 왜선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상 좌대의 부조에서 침몰하는 배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배는 명나라의 군함 호선(唬船) 또는 사선(沙船)으로 보인다. 명나라 군함은 모두 갑판 위에 패판을 설치하지 않아 갑판은 단층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돛을 중앙에 설치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며 하나 이상의 돛을 설치하였다. 갑판 위에는 일반적으로 선실을 두었으며 페넌트형 깃발을 사용하였다. 함수 및 함미의 정면은 조선의 판옥선처럼 '凵'자형으로 생겼으나 함미는 조선의 군함과는 달리 하늘로 치솟는 꼬리 형태의 외판이 없다. 그리고 함수의 옆모습은 조선의 판옥선이 'ㄴ'형으로 생긴 것과는 달리 명나라의 호선과 사선은 오늘날 선박 옆모습처럼 생겼다.
이러한 명나라 함선 특징들을 종합해 보면, 믿기 어렵지만 이순신 장군 동상 좌대의 부조에서 막 침몰하는 배의 모습과 비슷하다. 이해 하기 어려운 일은 동상 좌대 좌측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좌대 좌측면에는 거북선 출정 장면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이끌고 출정하는 것이므로 부조에 나오는 배들은 모두 조선 수군의 전함이어야 한다. 그러나 부조를 보면 거북선은 조선 전함과 더불어 출정하지 않고 명나라 수군의 것으로 보이는 전함들과 출정하고 있다.
좌측 좌대 부조에서 거북선과 함께 출정중인 배를 살펴보면 이들 배는 모두 조선의 판옥선 모습을 하고 있지 않고 명나라 전함인 사선(沙船) 모습을 하고 있다. 이의 부조에서 거북선이 아닌 배를 보면, 우선 갑판이 판옥선과는 달리 단층이며, 함미에는 하늘로 치솟는 꼬리 형태의 외판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비록 함수의 정면이 조선의 판옥선처럼 '凵'자형으로 생겼지만 이는 조선 수군의 판옥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이 배는 명나라의 군함으로 보인다. 판옥선과 거북선 간에는 크게 보아 거북 등껍질 모양의 갑판 덮개와 용두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만을 가질 뿐이다. 이는 거북선의 바탕이 판옥선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판옥선과 거북선은 서로 완전히 다른 형태의 전함이 아니다.
김세중 작가가 거북선 부조에서 복수층 구조의 갑판과 하늘로 치솟는 꼬리 형태의 함미 외판을 분명하게 나타낸 이상 판옥선에 대해 이러한 특징을 인식하지 못하여 이를 나타내지 못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김세중 작가가 부조로 나타낸 조선의 판옥선은 모두 한결같이 다음의 그림에서 보듯이 17세기 중국의 사선(沙船)과 매우 흡사하다.
결국 광화문 세종로에 있는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과 더불어 조선 수군의 판옥선을 이끌고 출정하지 않고 명나라 수군 사선(沙船)과 더불어 출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순신 장군은 자국의 수군으로만 이루어진 자주적인 출정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참으로 굴욕적인 상황 설정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앞서 말했듯 김세중 작가는 이순신 장군에서 오른 손의 칼, 이순신의 고개, 갑옷, 일본도, 독전고, 이순신의 얼굴, 좌대의 형태 등에서 문제를 보였다. 한결같이 일본에 비굴한 패배를 보이며 자주적인 기상을 느낄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좌대의 부조에서 조차 김세중 작가는 이순신 장군이 자주적인 출정을 하지 않은 것으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전함을 단 한 척도 침몰시키지 않은 것으로 만들고 있다. 더구나 거북선으로 말이다. 대신 조선의 우군인 명나라 전함을 거북선이 신나게 깨뜨리고 있다. 서울시 "좌대 문제점 우린 몰라... 작품으로 봐달라" 도대체 이 어이없고 기가 막힌 부조의 조각은 어찌된 일일까? 자연물과 작품의 차이는 자연물일 경우 우연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작품에서는 결코 우연이 없다. 자연에서는 독전고가 우연히 넘어져 누울 수도 있지만 작품에서는 독전고가 눕는 것조차도 작가가 깊이 생각한 후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만큼 작품은 선 하나를 긋는데도 많은 고심과 고증이 들어간다. 김세중 작가가 이순신 장군의 해전을 구상하면서 오직 거북선만 고증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왜선과 명나라의 함선도 면밀하게 고증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좌대의 부조에서 보이는 이런 상황은 절대로 작가의 무지에 의해 발생했다고 보기 어렵다. 이순신 장군 동상을 만들 때 김세중 작가는 철저히 고증을 하였다고 '김세중 기념사업회'는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왜 김세중 작가는 이렇게 작품을 만들었을까? 김세중 작가가 작고한 지금 정확한 이유를 알기는 어렵다. 이순신 장군 동상 좌대 문제점에 대해 지난 1월 5일, 나는 이 동상을 관리하고 있는 서울특별시 김준기 도시계획국 균형발전추진단 단장, 균형발전 1팀의 이아무개 팀장과 인터뷰를 했다. 하지만 김 단장과 이 팀장은 "40여 년 전에 세워진 동상의 일이라서 생각지도 못했으며 알 수도 없었다"고 밝혔다. 이어 이들은 "이미 작고한 김세중 작가에게 문의해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니므로 서울시에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딱히 답변을 할 처지가 아니다"고 말했다. 또 김준기 단장과 이 팀장은 "이순신 장군 동상 설령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작품 그 자체로서만 평가를 할 일이지 동상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비판을 하고 논란을 벌일 일은 아니"라는 의견을 보였다. 고 김세중 작가 유족도 서울시와 비슷한 반응을 나타냈다. 이순신 장군 동상 좌대 문제와 관련 고 김 작가의 부인 김남조씨는 7일 기자와의 전화인터뷰에서 "(동상이 만들어 진 지) 40여 년이 지나 전혀 알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할 말도 없다"고 짧게 답했다. 서울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은 여러 의미를 갖고 있다. 거리의 상징이자, 많은 한국인에게 자부심과 용기를 주는 증표이기도 하다. 후대 사람들이 이순신 이름 앞에 '성웅(聖雄)'을 괜히 붙인 게 아니다. 그런데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은 한 나라의 성웅에 걸맞게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만들어진 것일까? 위에서 다소 장황하게 이야기했듯이 나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40여년 전에 만들어졌으니 그냥 넘어가자"고 하기엔 성웅의 존재감이 우리에겐 너무 크다. 이순신 장군은 "내 죽음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순신 장군 동상에 문제가 있어도 비판을 하거나 논란을 벌일 일이 아니"라는 서울시 당국자의 해명이 꼭 "동상의 문제점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는 변명처럼 들리는 건 나 혼자만의 환청일까? 덧붙이는 글 | 기고자 박철주(문학박사)는 해군 장교 대위 출신으로서 참수리급 고속정 및 천안함급 초계함에서 해상 장교로 근무하였으며 목포 해양대 학군단에서 교무부장으로 재직하면서 해군의 군사에 대해 강의를 하였던 해군 전함 전문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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