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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위령비에 위안부 피해자 이름 새기고 싶어요

이름 최시온 등록일 17.08.15 조회수 451
지난 9일 오후 서울 중학동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1295회 수요집회 참가자 속엔 일본인 남성이 있었다. 그는 집회가 진행되는 동안 학생과 시민들을 향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할머니 사랑해요”라고 외치는 소녀들을 보면서 미소를 짓기도 했다. 행사가 끝난 뒤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91)·이용수(90)·길원옥(90) 할머니를 만나 짧은 인사를 나눴다.
그의 이름은 가와미쓰 아키히로(川満昭広·60·사진). “수요집회에 대한 감상을 적어달라”며 기자가 건넨 공책에 그는 일본어로 글을 써 내려 갔다. ‘오키나와(沖繩)에서 왔습니다. 수요집회 참석은 처음입니다. 소녀상도 처음 봤습니다. 고교생들의 훌륭한 메시지를 듣고 감동했습니다.’
 
가와미쓰는 오키나와에 사는 출판인이라고 밝혔다. 그는 ‘오키나와 평화 네트워크’라는 단체의 대표도 맡고 있다. 이 단체는 현재 일본인 250여 명이 자발적으로 모여 오키나와 내에서 반전 운동, 오키나와 전쟁 유적 보존 활동 등을 하는 곳이다. 오키나와에선 2차대전 중 미군과 일본군간에 치열한 교전이 펼쳐져 20만 명이 숨졌다.
 
“저는 오키나와에서 조금 떨어진 미야코(宮古)섬에서 태어났어요. 고교를 졸업하고 나서야 전쟁 중에 일본군에 의한 주민 학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본격적으로 관련 운동에 관여한 건 1985년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걷고, 보고, 생각하는 오키나와』라는 책 출간에 편집자로 참여했을 때부터입니다.”
 
이후 오키나와 평화 네트워크를 조직해 오키나와 전쟁 문제를 연구한 가와미쓰는 1989년에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인 배봉기(1914~1991) 할머니의 존재를 알게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배 할머니는 자신이 1945년 이전에 위안부로 오키나와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고 1975년에 일본 언론에 증언했다.
 
“재일조선인인 박수남 감독이 1989년에 ‘오키나와로부터의 편지-아리랑의 노래’라는 영화를 제작하면서 배 할머니를 인터뷰했어요. 저는 영화를 만들기 위한 위원회에 참여했는데, 위안부 피해자와 인연을 맺은 건 그때가 처음입니다. 그 인연으로 1991년에 배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유골함을 직접 운구하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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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미쓰는 윤정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초대 대표와 재일 오키나와 연구자인 홍윤신씨 등이 2008년에 만든 미야코 섬의 아리랑 비(碑)를 보고 위안부 피해자를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했다. 가와미쓰에 따르면 오키나와에는 약 140개의 일본군 위안소가 있었다.
 
“그동안 위안부 피해자들을 영상으로만 접했어요. 수요집회에 꼭 참석하고 싶었는데 그 희망을 이뤘죠 .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세 분을 만났는데, 처음 부터 여러 이야기를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 인사만 짧게 나눴습니다. 올해 몇 번 더 한국을 방문하 고 싶어요.” 그는 한국과 오키나와는 비극적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고 했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거쳐 전쟁의 참화를 겪었고, 수많은 사람이 희생됐다.
 
“오키나와 평화 기념공원에는 ‘평화의 초석’이 있어요. 오키나와 전쟁 때 희생당한 이들의 이름을 새겨 넣은 위령비에요. 여기에는 북한을 포함한 조선인들의 이름이 있지만, 모두 남성입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이름은 없어요. 평화의 초석에 그분들의 이름을 새기고, 소녀상과 관련한 작품을 만들어 세우고 싶습니다.”
 
하준호 기자 ha.junho1@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오키나와 위령비에 위안부 피해자 이름 새기고 싶어요

[출처: 중앙일보] 오키나와 위령비에 위안부 피해자 이름 새기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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