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토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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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사회

이름 박별 등록일 14.11.07 조회수 8389
“남자친구가 조용히, 무릎 꿇고 추천한 그곳, ××× 성형외과”
 얼마 전 지하철에서 본 광고 문구다. 주먹을 움켜쥔 채 무릎 꿇고 앉아 있는 한 남성의 하반신 사진이 광고판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잠시 눈을 의심했다. 이렇게까지 막갈 수도 있구나. 성형외과 앞에서 간청하는 남자와 그 옆에서 고민하는 여자라니.
 하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국가 폭력을 주제로 한 영화 <변호인>을 보러 갔다가, 영화가 상영되기도 전에 가공할 ‘턱뼈녀’를 동원한 성형광고에 의해 무자비한 언어 폭력과 감성 폭력을 당한 적도 있다. 그뿐인가. 강남의 한 성형외과에서는 직접 깍은 턱뼈들로 ‘턱뼈탑’을 만들어 병원 로비에 전시했다는 엽기적인 얘기까지 들린다.
 이런 일들은 단순히 도를 넘어선 외모지상주의나 성형광풍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내밀한 본성을 들춰준다. 우리 사회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마저 상실한 ‘무례사회’로 변해버렸음을 폭로한다.
 무례사회는 돈만 벌 수 있다면 인격모독쯤은 아무렇지도 않은 사회, 인간을 경시하는 사회다. 성형 광고의 주체인 ‘의사 선생님들’의 경우에서 보듯, 이 사회를 지배하는 기득권 집단의 인식은 지극히 천박하다. 이들은 대개 이 사회의 교육과정을 가장 성공적으로 이수한 ‘우등생들’인 까닭에, 이들의 천민성은 그대로 사회의 성격을 대유한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자를 ‘모범생’으로 길러내는 무례사회에 미래는 없다.
 대중들 또한 무례에 둔감한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수많은 대중이 이용하는 지하철에 저런 파렴치한 광고가 버젓이 걸릴 수 있겠는가. 어린 시절부터 촘촘한 경쟁의 그물로 조직된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너무도 많은 모멸과 무례를 겪어온지라 대중에게 남아 있는 자존감의 영토는 그리 넓지 않은 것 같다. 때로 대중은 경멸과 조롱에 모멸감을 느끼거나 저항하기보다는, 이를 자조적으로 즐기는 집단적 마조히즘 상태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티브이 개그 프로그램을 보라. 소재의 절반 이상이 외모에 대한 조롱이다. 개그의 본령인 정치풍자는 찾아볼 수 없고, 그 자리를 신체적 약자에 대한 허접한 조롱으로 메우는 방송의 행태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야비하고 품격 없는 공동체로 전락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우리 사회가 가장 결여하고 있는 품성인 것 같다. 인간을 존중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태도가 너무도 모자란다. 특히 사회적 약자는 온전한 인격체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 ‘감정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비인간적, 비인격적 대우는 상상을 초월한다. 난생처음 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에게 “고객님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하도록 강요하는 사회는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는 사회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언어의 의미를 왜곡한다는 점에서 언어에 대한 예의도 없는 사회다.)
 자신에 대해 둔감한 감수성을 지닌 자가 타인에 대해 섬세한 감수성을 지닐 수는 없다.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타자에 대한 무례가 팽배한 이유다. 또한 타인에 대한 예의가 결여된 사회에서 타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세월호가 주는 가장 가슴 아픈 교훈은 우리가 타인의 생명과 고통에 대해 얼마나 무감하고 무심한 ‘괴물들’로 변해버렸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인간존엄은 불가침하다.” 독일 헌법 제1조이다. 유럽연합도 이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유럽연합헌장’ 1조로 삼았다. 우리에겐 언제쯤 인간 존엄성의 수호를 국가의 존재 이유로 삼고, 사회의 구성원들이 서로를 존엄한 인간으로 존중하는 날이 올지, 아득하다.
김누리 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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