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년 2반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 1:5) 


짧으면 삼 초, 길어봐야 삼 년.

하지만 절대 가볍지 않은 그 시간을

훌륭히 마무리 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곳은,

그 든든한 뒷받침이 되어줄 3학년 2반 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기적을 이루는 교실
  • 선생님 : 박경열/오병준
  • 학생수 : 남 10명 / 여 10명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까지

이름 최주영 등록일 21.03.24 조회수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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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날개를 펼치며 날아가는 나비 한 마리. 그 날개가 화려히 춤을 추기까지, 얼마나 추하고 고된 시간이 흘렀을까. 갈라진 알의 틈새. 그 틈새로 열심히 꿈틀거린다. 세상의 빛을 맞이하기 위해서. 결코 고상하지 못하지만 최선을 다해 꿈틀댄다. 그리곤 깨어나와 그 알을 갉아먹는다. 자신의 생명을 보호해주던, 자신의 생명이 시작되었던 그 조그마한 물체를 갉아먹는다. 그저 살기 위해서. 죽지 않기 위해서. 그 후엔 또다시 먹는다. 자신이 딛고 있는 나뭇잎을 먹는다. 할 줄 아는 것이 그것밖에 없다. 먹는 것 외에는 삶을 위해 할 줄 아는 것이 없다. 그마저도 저항 없는 식물의 잎이다. 메뚜기 같은 튼실한 다리도 없다. 사마귀 같은 날카로운 낫도 없다. 풍뎅이 같은 단단한 갑주도 없다. 그저 먹는다. 먹고, 먹고, 먹는다. 그러다가 번데기가 된다. 몸을 자신의 실로 감싸고는 형태를 잡아나간다. 그리고 기다린다. 저 하늘을 날 수 있는 자격을 얻기 위하여. 번데기 속에서 작지만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 번데기 밖으로 나가는 일만 남았다. 헌데 나가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마치 애벌레 때 알을 깨고 세상 빛을 보았던 것처럼, 나비가 된 애벌레는 다시금 그때의 꿈틀거림을 재현한다. 고상하지 못하지만 살기 위해 꿈틀댔던 그때처럼, 새 삶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 퍼덕인다. 가까스로 번데기를 뚫고 나온 나비는 이제 높은 곳으로 올라가 날개를 펼친다. 펼치는 것도 순식간에 펴지는 것이 아니다. 갓 피어난 등의 날개를 밝은 햇볕에 말린다. 천천히, 서서히 날개를 말린다. 날개가 다 마르면 그제서야 나비는 날개를 활짝 펼치고 늘 올려다만 보던 하늘을 향해 비상한다. 누구도 가르쳐 준 적 없고, 한 번도 날아본 적이 없지만, 어째선가 날 수 있었다. 그 날갯짓은 아름답다. 우아하게 꽃으로 날아들어 꽃의 꿀을 조용히 빨아먹는다. 꿀을 받아먹은 보답으로 꽃의 수분을 도와주는 여유로움까지 돋보인다. 그 모습에 시끄러움이란 찾을 수 없다. 추악함이란 찾아볼 수 없다. 우아하게 날아들어서는 무언가를 먹었다는 티도 나지 않게 조용히 식사를 끝낸 뒤에 또다시 아름답게 날아간다. 사람들은 그러한 모습을 보고 나비를 예쁘다며 좋아한다. 바퀴를, 벌을, 거미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쉬이 찾아볼 수 있지만 나비는 싫어하는 사람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배로 많다. 하지만 그렇게 나비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대부분은 그들의 어린 시절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삶을 시작하기 위한 그들의 꿈틀거림도, 살아가기 위한 그들의 식탐도, 그들의 살아가는 그 모습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징그럽다며, 추하고 이상하다며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을 '애벌레'라고 따로 부르고 있기는 하나 그들도 역시 '나비'이다. 우리가 '병아리'라고 부르는 동물도 사실상 '닭'의 어린 시절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아름다움을 얻기까지의 추한 모습을,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어째서일까. 나비의 추악한 어린 모습에 환멸한 것일까. 확실히 그들은 고상하지 못하다, 우아하지 못하고, 조용하지 못하며, 고결하지도, 고매하지도 못하다. 하지만 정녕 추하기만 한 것일까. 나는 모든 이가 바라보기를 원한다. 그들이 삶을 붙잡기 위해 처절하게 매달리는 모습 속에 숨겨진 열정이란 이름의 아름다움을. 추하지만 아름답다. 시끄럽지만 고귀하다. 아아, 어찌하여 알지 못하는가. 생명의 요동침에 아름답지 못한 행위란 없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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