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깊고
마음은 넓으며
행동이 바른 어린이로 자라겠습니다.
김유신 소개글(완) :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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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국건호 | 등록일 | 23.11.07 | 조회수 | 828 |
제가 소개할 인물은 김유신 입니다. 김유신의 출생년도는595년이고 사망일은673년(8월 18일)이고 김유신의 사망이유는 문무왕 13년(673년) 봄 정월에 황룡사와 재성 사이에 큰 별이 떨어지고 지진이 일어나 조정과 민간이 어수선해지자, 유신은 왕을 알현하여 이번의 재앙은 국가가 아닌 자신에게 일어날 일에 대한 흉조이니 신경쓸 것 없다며 위로했다. 이후 병들어 누운 자신을 문병하러 방문한 문무왕에게, "처음부터 못하는 이야 없진 않겠지만, 끝까지 잘 맺는 이는 거의 없다네(靡不有初 鮮克有終)"[3]라는 《시경》의 말을 인용하며 신하로서 왕에게 당부하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며칠 뒤 자택에서 숨을 거둔다. 기일은 7월 1일, 향년 79세였다. 그리고 김유신의 업적은 인평 11년(644년) 진골 귀족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인 소판(蘇判)으로 승진하였다. 가을 9월에는 상장군이 되어, 왕명으로 백제의 가혜성, 성열성, 동화성 등을 포함한 7성을 점령했다. 이듬해(645년) 정월에 서라벌로 돌아와 개선 보고도 하기 전에 다시 계백이 이끈 백제군이 매리포성에 쳐들어왔다는 급보가 날아들자 여왕은 유신을 상주장군으로 삼아 막게 했다. 유신은 집에 들르지도 않고 곧바로 달려나가 백제군 2천여 명의 목을 베는 승리를 거두었고, 음력 3월에 다시 백제의 침공을 격퇴했다. 그리고 김유신의 어린시절은 태어난 이래로 그가 15살이 되는 609년까지, 유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 김유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던 화랑이 된 것은 15살의 일이었다. 출처:위키백과: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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