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학년 1반

생각은 깊고

마음은 넓으며

행동이 바른 어린이로 자라겠습니다.

생각은 깊게, 마음은 넓게, 행동은 바르게
  • 선생님 : ^^*
  • 학생수 : 남 7명 / 여 3명

장영실을 소개하는글

이름 설재동 등록일 23.11.07 조회수 161

장영실은 조선에서 태여났고 자격루를 우리나라 최초로 만든 인물이다. 그리고 아빠는 중국인이였고 장영실의 아버지 장성휘는 원나라 유민으로 

 항주 출신이고, 어머니는 조선 동래현 기생이었다. 장영실은 기술력이 뛰어나 세종 임금이 필히 아끼었다고 한다.

생몰 연대는 아직 확실하지 않으나, 아산 장씨 종친회의 주장에 따르면 대략 1385년경에서 1390년(우왕 11년~공양왕 2년)경이다. 또한 장성휘는 시조 장서의 8세손으로 고려 말 전서였으며 어머니는 동래현 관기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혼란기에 어머니와 장영실은 조선 관노로 전락하였다고 주장한다. 또한 장영실의 영자는 종친회에서 주장하는 부친 장성휘의 성자 항렬의 다음 세대의 항렬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대로 단순히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의 자제라면 고대 중국식으로 외자로 이름을 짓고 자나 호를 짓거나, 아니면 평범한 이름으로 짓지, 당시의 아산 장씨 집안의 항렬에 맞게 짓고 족보에 올린다는 것은 유교적 정서에서 힘들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다고 하며 사촌여동생이 당대의 천문학자 김담에게 시집갔다고 한다. 장영실은 어머니의 신분이 천민(기생)이라서 그 신분을 이어 받아 천민이었다.장영실은 본래 동래현의 관노?이나 발명가로서의 훌륭한 재주를 태종이 인정하여 발탁하였다. 세종은 실용주의자로서 장영실의 적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부왕의 뒤를 이어 중용하였다. 세종은 장영실을 1421년(세종 4년) 윤사웅, 최천구 등과 함께 중국에 보내어 천문기기의 모양을 배워오도록 했다. 귀국 후 장영실 나이 약 34세 때인 1423년(세종 5년)에 천문기기를 제작한 공을 인정받아 면천되었고 다시 대신들의 의논을 거쳐 종5품 상의원 별좌에 임명되었다. 1424년(세종6) 5월, 임금은 그를 정5품 행사직으로 승진시켰고 갱점지기를 만들라고 명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첫 물시계였다.그 후, 세종의 명에 따라 1432년부터 1438년까지 이천의 책임하에 천문 기구 제작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 과정에 수력에 의해 자동으로 작동되는 물시계 자격루(일명 보루각루, 1434년)와 옥루(일명 흠경각루, 1438년)를 만들어 세종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이때 제작된 옥루는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어 시간, 계절을 알 수 있고 천체의 시간, 움직임도 관측할 수 있는 장치로 흠경각을 새로 지어 그 안에 설치했다. 이때 만들어진 천문 기구에는 천문 관측을 위한 기본 기기인 대간의, 소간의를 비롯하여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 천평일구, 방향을 가리키는 정남일구, 혜정교 종묘 앞에도 설치한 공중시계 앙부일구, 밤낮으로 시간을 알리는 일성정시의, 규표등이 있다.

이러한 공으로 1433년(세종 15년)에는 정4품 호군의 관직을 더하였다. 장영실은 대단한 업적들을 남겼다.1434년(세종 16년)에는 이천이 총책임자였던, 구리로 만든 금속활자인 갑인자의 주조에 참여하였다. 갑인자는 약 20여만 자에 달하며 하루에 40여 장을 찍어도 자본이 흐트러지지 않았고 판본이 깨끗하였다. (그 이전에는 2장만 찍어도 자본이 흐트러져서 자본을 교정한 후에 다시 찍을 수 있었다)천문기구 제작이 끝난 후에도 장영실은 금속제련 전문가로 관료생활을 지고 있던 중 세종대왕의 어가가 갑자기 부서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이를 장영실의 임금에 대한 불경죄로 간주하고 의금부에서 책임을 물어 곤장 80대와 삭탈관직을 구형했으나, 임금이 형벌을 2등을 감해 주었다고 한다. 장영실은 이후 역사에서 자취가 완전히 사라졌다. 후세에도 그의 공교한 솜씨가 간혹 회자되었다.

한편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에 아산 장씨 시조인 장서의 묘 바로 아래에 장영실의 가묘가 있다.장영실은 당시 세종대왕이 직접 재능이 뛰어나다고 극찬하였고, 수많은 기기를 제작하였다. 미천한 신분에서 승진을 거듭하여 정3품관 대호군에서 정3품관 상호군이라는 관직까지 이르렀다. 장영실은 이순지와 이천 등과 함께 조선 전기 당대의 훌륭한 최고의 과학자로 지금도 평가되고 있다.

 

 

 

 

 

 

 

 

 

출처:네이버,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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