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산 사람들의 간절함으로 시작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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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을 전후하여 일본의 가혹한 무단 통치로 우리나라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시기였다. 러일 전쟁의 발발과 함께 1904년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1) 체결,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이토 사살, 1910년 경술국치(한일합방 8월 29일)가 있었다.
또한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여의치 않아 중국의 북간도, 남만주, 연해주 등에서 민족교육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북간도의 용정촌, 명동촌 등 한인촌이 만들어졌고 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 명동학교가 설립되었다. 남만주에서는 이회영, 김동녕 등이 신흥무관학교를 만들어 민족교육과 함께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졌다.
이러한 역사의 시간 속에 우리 고장에서도 교육에 대한 남다른 간절함이 모아졌다. 1910년 ‘화산의숙’이 바로 그것이다. 화산의숙의 설립은 보통학교가 군단위에 한 개 정도로 대부분 서당에서 공부하던 때였고, 일제가 식민통치를 위해 제1차 조선교육령(1911년)을 발표하기 전이라 시기적으로 매우 의미를 갖는다.
화산의숙(華山義塾)2)은 당시 우리 고장에 살았던 한 분이 본인 소유의 큰 기와집을 기부함으로서 생겨나게 되었으며, 이 기와집은 교실 열 칸과 사무실 두 칸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그 규모가 컸다. 이 의숙에서는 초등교육(당시 학제는 4년제)이 이루어졌다. 이 의숙을 세우기 위하여 기와집을 기부한 분은 윤우병(尹佑炳)님이며, 민영조(閔泳祚), 오병덕(吳秉德), 유중극(柳重極) 서상훈(徐相勳) 송재봉(宋在鳳) 등의 분들도 의숙을 세우는데 힘을 모았다.
이 분들은 숙장(塾長, 지금의 교장), 학감(學監, 지금의 교감), 교사(敎師) 등을 나누어 맡았고, 또 일부는 의숙을 유지 운영하는데 필요한 기부금을 모으는 일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4년간의 초기 의숙이 운영되었다. 그 이후 화산을 둘러싼 지역에서 거두는 세금 3)으로 의숙을 운영하는 경비가 충당되었으며, 역시 부족한 돈은 윤우병님이 부담하여 8년간 운영되었다.
100여년이 지난 옛날의 일이기에 지금으로서는 화산의숙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 위치를 탐문해 본 바로는 현재의 화산초 후문 부근에 텅 비어있는 공터가 있는데 그 일원(대략 500평 내외)이 화산의숙의 자리였단다. 지금은 대부분 민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일부가 화산초등학교 소유 4)로 남아있는 까닭도 아마도 화산의숙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이 밖에도 일반 학교들과 달리 화산초등학교 소유의 토지가 산재해 있다. 왕수봉의 중간 산자락에 산림 5) 50,579㎡(약15,300여평)가 있고, 왕수봉 아래로 밭> 6) 1,940㎡(약580여평)가 화산초 소유의 토지이다. 예전의 임야대장7)을 확인해 본 결과 그 소유자가 송재봉(宋在鳳, 화산의숙을 함께 세운 분)으로 되어 있는 점을 볼 때, 이 역시 화산의숙 시기에 학교에 기부된 토지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왕수봉 아래의 밭도 소유권 이전의 시기 등으로 볼 때, 고장의 어른이 학교에 기부한 땅으로 여겨진다.
화산의 고장과 화산초 교육을 염려하고 사랑했던 옛 조상들의 숭고한 마음의 자취가 아닐 수 없다. 옛 어른들의 교육을 향한 깊은 뜻과 고매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1) 일본이 한국 황실의 안전과 한국 영토의 안전을 보장하는 대신 한국이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거나 내란 등으로 위험한 상태에 빠졌을 때 일본 정부는 한국 내의 필요한 지점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2) 근대시대 공익을 위하여 기부한 돈을 모아 세운 교육기관, 지금의 학교와 같은 건물을 갖추지 못하였고, 대부분 한옥 기와집의 방을 교실삼아 공부하던 곳이다.
3) 원고산군 일원의 매 호당 40전씩 춘추(春秋) 양기( 期) 호세(戶稅)에 의하여 군당국에서 수합하여 주었다(화산초등학교 연혁지 발췌).
4) 토지대장과 등기부, 화산면 화평리 537-3, 전(학교용지) 350㎡
5) 등기부, 화산면 화평리 산43, 임야 50,579㎡
6) 토지대장과 등기부, 화산면 화평리 605, 전1,940㎡ 1929(소화4) 학교 소유
7) 구 임야대장, 화산면 화평리 산43, 임야 5정1단보, 1928년(소화3) 소유자 송재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