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다양성을 존중할 때 피로감이 사라집니다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기자말] |
[관련기사] 만년필 동아리가 있다고? 거짓말 같았던 고등학교 https://omn.kr/24icb
"오마이뉴스에 올라온 글 정말 잘 봤어요. 선생님들이 먼저 보셨더라고요. 학교 게시판에도 올려 학생들과 나눔 했답니다. 실제의 교육현장이란 것이 팍팍한 면도 많은데, 좋은 점만 봐주신 것 같아요. 두루 공감해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어제 글쓰기 동아리 친구들과 펜닥터님 글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아날로그적 글쓰기가 확대될 수 있는지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거든요. 말씀처럼 디지털 미디어가 아이들에게 익숙한 대세 문화로 자리매김한 건 맞지만, 대체 불가능한 아날로그만의 장점을 인정하고 그걸 키워나가는 것도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았어요."
"아… 정말요? 모두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었겠네요? 어쩐지 사제간의 거리를 좁히는데 제가 일조한 것만 같아 기뻐요. 좋은 계기니 학생들과 만년필에 관해 좀 더 깊은 이야기 나눠본 뒤, 제게 알려주시는 건 어떨까요? 필기구에 관심 있는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저도 힘을 보태고 싶어요. 무엇보다 만년필 동아리가 있는 고등학교는 만년필 수리공만큼이나 희소하니까요."
백날천날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옹알거리는 혼잣말이면 그저 그뿐입니다. 입밖에 내어야 상대방에게 가닿고, 그래야 되돌아올 최소한의 모양새가 만들어집니다. 내 의지가 온전히 전해져도 이런저런 이유로 답신 없는 편지가 되고 마는 일이 무수합니다.
그러니 아무리 작은 일이든 마음에 품었으면 뜻으로 세워야 하고, 일단 끄집어냈으면 흔들림 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는 물론 부모 자식 간에도, 상대의 마음을 속속들이 꿰뚫어 가렵기 전에 긁어주는 상황은 드라마 속에서도 픽션입니다.
며칠 뒤 연락이 왔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디지털 시대라는 큰 틀에서 바라본 아날로그 필기구의 매력에 대해 토론했어요. 예상대로 만년필은 까다롭고 불편한 도구라는 말이 제일 먼저 나왔어요. 그런데 그게 쓸모가 떨어지는 필기구란 말이 아니라, 다만 친해지는데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대상일 뿐이라고 해 놀랐어요. 적잖은 관리가 필요한 만큼 접근성은 떨어지지만, 초기 진입 장벽을 넘은 사람 입장에선 또 다른 국면이라는 거예요.
'까다롭고 불편한'이란 부정적 수식어가 되레 '나에게만 허락된', '내 취향에 맞춤으로 조율된'이라는 긍정적 이미지로 와닿는다고 해요. 스스로 성장할 의지가 있고 배움의 욕구가 있는 자신들과 만년필은, 자못 닮은 구석이 많다는 거지요. 저는 아이들이 조금만 불편해도 견디기 힘들어하는 줄만 알았는데, 은근 마음 근육이 단단하다는 걸 느꼈어요. 다루기 만만한 필기구였다면 오히려 관심이 덜 갔을 거라며 여유도 부리던 걸요."
"정말 놀라운데요? 불편함이 '편하지 않다'는 말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일련의 과정을 참아내면 보다 나은 내일을 여는 키워드라는 걸 안다는 말처럼 들려요. 지평선고등학교는 주중엔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는 기숙형 사립고잖아요. 어쩌면 친구들과 친해지기 전까지 꽤 시간이 걸리지만,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치고 나면 한결 편해진다는 걸 만년필에 비유한 것 같아요."
"또 이런 의견도 나왔어요. 수업 중 선생님 말씀을 정신없이 받아써야 할 때도 있지만, 일과를 마친 후 도서관이나 기숙사 자기 방에서 조용히 내 안의 소리를 받아 적고 싶을 때도 있다는 거예요. 전자의 경우라면 만년필을 추천하기 조심스럽지만, 후자일 땐 만년필보다 적격인 필기구가 없대요. 이 말을 들은 한 친구가, 자긴 만년필로는 심장 뛰는 소리까지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해 다들 웃었어요.
만년필은 금속으로 된 딱딱한 펜촉을 부드러운 종이에 대고 긁어가며 쓰잖아요. 그때 펜촉을 타고 손끝을 거쳐 특유의 마찰음과 촉감, 진동 같은 것들이 전달되는데, 나와 잘 맞는 펜으로 쓰면 어떤 희열이 느껴진다는 거지요. 만년필과 나와의 주파수가 잘 맞으면 내 속의 생각들이 나도 모르게 손을 타고 흘러나오는데, 그게 마치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길어 오르는 것만 같다니, 우리 아이들 표현력이 기가 막히지 않나요?"
"들을수록 놀라워요. 어떻게 만년필을 마음의 두레박에 비유할 생각을 했을까요? 그렇다면 선생님은 제자들 마음속 우물 안에 마중물을 넣은 셈이네요? 선생님 덕분에 길어 올릴 수 있었을 테니까요. 만년필을 내 안의 나를 찾는데 효과적인 매개체로 생각하다니… 참신하고도 재치 있어요."
최초의 필기도구는 기원전 동굴벽화에 쓰인 뾰족하게 잘린 돌 정도로 추정합니다. 기원전 4000년경 이집트에서 잉크를 채워 쓴 갈대가 최초의 펜으로 알려져 있는데, 펜의 어원은 라틴어로 '깃털'을 의미하는 'penna'에서 왔습니다.
'퀼펜(Quill Pen)'은 기원전 6세기부터 쓰였으며, 주로 거위나 백조 같은 큰 조류의 날개 깃털을 사용했습니다.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물,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소설에 단골 아이템으로 등장하지요. 이 사진은 주석으로 만든 펜대 끝에 깃털 장식이 있지만, 금속 펜촉을 꽂아 쓰는 현대적인 딥펜에 속합니다.
▲ 몸통은 주석으로 만들고 꼬리는 깃털로 장식한 금속 딥펜 ⓒ 김덕래 1750년경 금속 펜촉이 등장하며 자연스럽게 퀼펜을 대체합니다. 이런 여러 종류의 금속 펜촉을 펜대에 꽂은 다음, 잉크를 찍어 사용하는 거지요. 펜촉 상판에 장미 모양이 그려진 펜촉은 이름대로 로즈촉이라 부릅니다. 손가락 모양의 핑거촉도 있고, 끝이 동그란 오너먼트촉은 장식용 글씨에 적합합니다.
캘리그래피 촉은 가로폭 두께가 다양한데, 어떤 펜촉을 꽂아 쓰느냐에 따라 긋는 선의 굵기가 달라집니다. 로즈촉이 만년필의 금촉처럼 탄력감이 풍부하다면, 단단한 핑거촉은 스텐촉처럼 버텨주는 힘이 좋아 다루기 수월합니다.
어느 쪽이 더 뛰어나다기보단, 서로 다른 것뿐입니다. 이 다름을 인정해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겉보기엔 엇비슷한데 왜 이리도 다른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릴 때 피로감이 생깁니다.
요즘은 보통 나무로 된 펜대에 금속 펜촉을 꽂아 사용합니다만, 예전엔 책상 위 펜꽂이에 적어도 한 자루쯤 있기 마련이던, 몸통이 하얀 모나미 153 볼펜의 노크 부분에 꽂아 쓰기도 했습니다. ▲ 다양한 스틸 펜촉과, 캘리그래피용 2mm 촉을 후면부에 꽂은 모나미 153 볼펜(가운데) ⓒ 김덕래 처마 끝에 다는 작은 종을 풍경(서양의 윈드차임; Wind chime), 혹은 풍령이라고 하지요. 글라스펜은 1902년 일본에서 풍경(후링; Hurring) 장인 '사사키 사다지로'에 의해 개발된 필기구입니다. 청동 등의 금속이나 철제, 도자기제도 사용하지만, 시원한 이미지에 가격도 저렴한 유리 풍경이 대중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나라는 풍경을 절이나 가게 문에 다는 경우가 많지만, 일본은 가정집에서도 많이 사용합니다.
펜대에서 펜촉까지 모두 유리로 만든 일체형 글라스펜은 1989년 생산되었는데, 이전까지는 펜촉만 유리, 몸통은 대나무를 썼습니다. 잉크를 찍어 쓰는 도구라 딥펜에 속하며 '유리 공예품'이기도 합니다. 끝이 깨졌을 경우 사포로 살짝 갈아 재사용도 가능하고, 90도에 가깝게 세워서 쓰면 보다 굵게, 45도가량 기울여 쓰면 상대적으로 가늘게 쓸 수 있지요.
재질 특성상 충격에 약하긴 하지만 어디 단점만 있으려고요. 먼저 세척이 쉽고, 부식의 우려가 없습니다. 또 촉 끝을 잉크에 살짝 담그는 순간, 모세관 현상에 의해 잉크가 나사산을 타고 올라오는데, 이때 머금어지는 잉크의 양이 제법입니다. 금속 딥펜촉에 비해 여러 줄 쓸 수 있다는 건 분명 장점입니다. ▲ 글라스펜은 펜촉을 잉크병에 담그는 순간, 잉크가 나사산을 타고 올라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 김덕래 "아… 펜닥터님. 이런 얘기하는 친구도 있었어요. 아날로그 필기구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특별함이 있지만, 어떤 잉크를 찍어 어떤 종이에 쓰느냐에 따라 확 달라지는 게 재밌답니다. 색색의 잉크는 당연히 컬러톤부터 차이가 나지만, 흐름이나 색이 분리되는 정도, 테가 뜨는 경향, 필기 후 변색되어가는 과정 등이 다 다른데, 이런 잉크를 어떤 종이와 조합해 쓰느냐로 넘어가면 그야말로 변화무쌍해진다는 거예요.
쓸 때는 분명 푸른빛이었는데 쓰고 난 후엔 보랏빛이 도는 잉크도 있고, 펄감이 있는 잉크를 펜촉에 찍어 표면이 매끄러운 종이에 대고 쓰면, 선의 복판과 가장자리가 극명하게 대비되어 시각적 만족감이 크답니다. 한낱 잉크도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변하는데, 내 기분이 때때로 바뀌는 건 그리 잘못된 게 아니다 싶어 차분해진다는 거지요."
"무슨 의미인지 알듯해요. 펜과 잉크에 내 정서가 이입되면, 단순한 필기구와 염료 이상의 의미로 여겨진다는 뜻이지요? 살아있는 생명체는 아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레고, 서로 길들이는 과정에서 위로도 받게 된다는 말로 들려요. 공감이 가요. 나이를 적잖이 먹어도 감정조절을 힘들어하는 성인이 많은데, 학생들은 오죽하겠어요. 그런데 참 다행스럽게도 스스로 컬러테라피를 하고 있었네요?"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한 인간으로서의 덕목은, 마땅히 빠름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태도라 생각할 줄만 알았습니다. 어제도 또 오늘도, 일등이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하는 세상이니까요.
하지만 그건 마치, 대한민국에서 서울이 아닌 다른 도시는 다 시골과 다름없다는 말처럼 편향된 사고입니다. 정작 아이들은 대전은 대전대로, 또 대구는 대구대로인 것처럼, 김제 역시 나름의 색이 있는 도시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아날로그 필기구를 손에 쥐고, 지혜롭게 디지털 시대를 관통하고 있었습니다. ▲ 만년필을 통해 서로 다름을 배우는 지평선고등학교 만년필 동아리 학생들 ⓒ 김덕래 덧붙이는 글 학생, 학부모, 교사 모두 교육 대전환기를 맞고 있습니다. 학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에 대해선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학생이 없는 학교 역시 상상하기 힘듭니다. 오늘은 두 번째 이야기로, 아날로그 필기구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학생의 입장을 듣는 시간입니다. 다음번엔 학부모의 목소리를 실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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