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3일 경건의 시간(부모의 마음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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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한승진 | 등록일 | 22.06.13 | 조회수 | 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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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마음으로
나는 지금의 학교에서 21년째 중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이십년이 넘었으니 강산이 두 번은 변한 세월이다. 그동안 많은 학생들과 학부모들을 만났다. 이 중에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도 있고 공부는 좀 아쉬운 아이들도 있었다, 다재다능한 아이들도 있었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아이들도 있었다. 나는 학교목사이고 상담담당교사이다 보니 아무래도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보단 그렇지 않은 아이들을 만나고 그 아이들의 부모를 만나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들과 부모들은 낮은 성적을 보고 낙담하고 의기소침했다. 나는 진심으로 위로의 말을 건네고 힘이 되어 주는 이야기를 했다. 대개 내가 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아직 포기하긴 이르다. 앞으로 잘 할 수 있다.” “공부가 다는 아니니 공부 이외에 다른 재능으로 빛을 볼 것이다.” 나는 사실 그렇게 생각해서 말한 것도 있으나 아닌 것 같은데도 선의의 거짓말을 하듯 한 경우도 있다. 또한 목사요 선생의 입장에서 습관적으로 한 경우도 있다. 이런 내 말에 “고맙다”고는 하는데 표정을 보면 그다지 마음에 힘을 얻은 것 같지 않은 것 같았다.
소중한 아들이 내가 재직하는 중학교에 입학해서 시험을 치렀다. 아들이 시험을 치를 때 나도 시험 보듯 떨리기도 했고, 결과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아들에게나 동료교사들에게는 내식하지 않았다. 애써 아들의 성적엔 태연한 척했다. 시험보고 난 후 아들은 살갑게 아비에게 자신의 점수를 알려주면 좋으련만 알려주지 않았다. 궁금한데 도리가 없었다. 우연히 두 선생님으로부터 점수를 들었다. 그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생각보다 너무도 점수가 낮았다. 점수를 알려주신 두 선생님은 내게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다. 그런데 이 말씀은 내가 하던 말과 같았다. ‘어쩌면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랬다. 선생님들의 말씀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고맙습니다. 앞으로는 잘 하겠지요.”하고 대답했다. 그러고 나니 순간 ‘아차’ 싶었다. 내가 위로와 격려랍시고 했던 말들에 아이들과 학부모들은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까 싶었다. 나처럼 가슴에 깊게 와 닿지 않았을 것만 같았다. 사실 두 선생님의 말씀엔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다. 그러나 아들의 낮은 성적을 현실로 받아들여야하는 나로서는 마음이 허전하고 착잡해서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순간 이게 선생과 부모의 차이이구나 싶었다. 내가 선생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한 것과 내 아들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 다르다.
나는 정말이지 몇 날 며칠을 아들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아들과 깊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아들은 자신도 공부를 잘 해보려고 하는데 머리가 나쁜 것 같아 잘 안 된다고 울먹였다. 그 순간 가슴이 미였다. 내가 아들을 너무도 모르고 있었구나 싶었다. 많이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아들에 대한 공부욕심은 내려놓고 아들에게 맞는 진로를 찾아보려고 여기저기 알아봤다. 가슴이 먹먹해서 기도가 절로 나왔다. 아들에게 “아빠는 공부 잘해서 대학가고 그런 거 바라지 않는다. 네가 원하는 고등학교를 가면 된다.”고 말했다. 나는 여러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이고 싶은 것 이전에 내 아들에게 좋은 아버지이고 싶다. 학교 일을 줄이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사랑하는 선생의 일을 줄이고 내 아들에게 더욱 시간을 내고 사랑으로 함께해줘야 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이게 솔직한 심정이다. 아들을 위해 노심초사하고 아들을 위해 시간을 내고 아들을 위해 가슴아파하고 기도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선생의 자세를 부모의 마음으로 하면 어떨까 싶었다.
나는 이번에 아들을 통해 깊이 깨달을 것이 있다. 내가 아이들과 부모들을 대할 때 좀 더 깊이 마음으로 다가가지 못했구나 하는 마음이었다. 아이들을 대할 때 수많은 학생 중의 하나가 아니라 부모에겐 소중한 자식임을 생각해보면 느낌이 다를 것 같다. 우리 학교 특수학급 학부모들은 자식을 위해 헌신한다. 부족하고 연약한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도 한다. 자식을 위해 이사도 마다않고 자식의 필요를 위해 모든 것을 내 놓는다. 이들 자식은 공부를 잘하거나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하거나 장래가 촉망되는 경우가 아니다. 살면서 늘 부담이고 버거움인 자식을 위해 그토록 사랑을 베풀 수 있을까 싶다. 나는 자식을 키워보니 조금은 부모의 마음을 알 것 같다. 또한 내 자식 중 한 명이 장애가 있으니 특수학급 부모와 같은 처지로 공감하는 바가 크다. 그러니 내 자식으로 인해 조금은 더 특수학급 아이들을 대함과 부모를 대함이 나은 것 같다. 내 이야기에 특수학급 아이들과 부모들이 공감하곤 한다. 이는 내가 그저 그런 선생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도 같은 처지의 자식을 키우는 부모로서 같은 처지로서 공감하면서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소중하다. 여럿 중의 하나, 대체가능한 존재가 아니다. 부모에게 아이는 공부를 잘하든 그렇지 않든 건강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다. 부모는 아이들을 성적으로, 외모로, 이용가치로, 대체가능한 존재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저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본다.
선생으로서 이런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면 어떨까? 그 입장에서 바라보면 아이들에게 조금 더 따뜻하게 다가갈 수 있다. 사랑에는 자격이나 조건이 없다. 사랑하는 이에게는 모든 게 사랑스럽게 보인다. 그 무엇보다 소중한 생명으로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4장 15절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사도 바울은 스승과 아버지를 대비시켰다. 스승은 많되 아비는 적다. 그렇다. 이는 스승의 자세와 마음은 많아도 그만큼 아비의 마음은 작다는 말이다. 그렇다. 스승은 쉬워도 아비는 어렵다. 어렵다고 포기할 게 아니라 진정한 사랑실천으로 아비의 마음을 가져보면 어떨까? 스승이 아무리 노력해도 부모 같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런 심정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함께한다면 아이들을 부모의 마음으로 그 입장에서 바라보면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용서하고, 더 많이 기회를 주고, 더 많이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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