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오늘(9일)은 자랑스러운 ‘한글날’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해 반포하기 전 우리 민족에게는 말은 있었으나 그것을 적을 글자는 없었다. ‘한글날’이 제정된 일제강점기, 한글은 민족의 말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 민족의 혼을 지키는 역할을 했다.
한글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인지 매년 한글날이면 ‘언어 파괴’에 대한 갈등이 유독 심하게 인다. 주된 비난의 대상은 신조어다. '롬곡’(눈물) ‘댕댕이’(멍멍이) ‘복세편살’(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 등 따로 공부해야만 알 수 있는 언어들. 이를 두고 누군가는 한글을 파괴한다며 불편해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새로운 언어가 생성되는 현상은 역사적으로 늘 존재했다. 또한 신조어는 다른 언어와 마찬가지로 민족의 말과 생각, 사회문화 현상을 반영해왔다. 무작정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신조어는 소위 ‘요즘 애들’만이 만들어내는 이상한 언어가 아니다. 가까운 과거를 살펴보자. 1980대 이후에는 ‘헐’ ‘대박’ ‘캡’ ‘즐’ ‘OTL’ ‘짱’ ‘우왕 굳’ ‘국회스럽다’ 등의 신조어가 쏟아져 나왔다. 1960·70년대에도 당시 일부 세대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신조어들이 만들어졌다. 지금의 ‘뇌섹남’을 그때는 ‘미스터 마가린’이라고 불렀다. ‘KBS’를 ‘갈비씨’라고 칭하기도 했다. 몇 십 년 전의 과거만이 아니다. 대한민국 군대가 창설된 이후에는 군인들만이 사용하는 언어가 만들어졌다. 조선시대 백정들에게도, 시전 상인들에게도 그들만의 언어가 있었다. 매년 ‘신조어 사전’이라는 것이 등장하고 책으로 발간되기까지 하는 것을 보면, 신조어는 어느 시대에만 특별히 존재하는 별난 현상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언어 생성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요즘 애들은 이상한 말을 쓴다”는 비난은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하는 것’이다. 오히려 이런 비난은 기원전 1700년경 수메르 시대에 쓰인 점토판에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버릇이 없다’고 적힌 것이나 그리스의 고전 『일리아드』에 ‘요즘 젊은이들은 나약하다’고 한 것 등 과거부터 존재해 온 세대 갈등과 맥을 같이 한다.
길은배 한국체육대학교 교수는 그의 논문 「청소년의 비속어, 은어 사용에 관한 연구」에서 “언어 일탈현상은 한 세대가 다른 세대로 성장하면서 사회문화적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가치관과 언어문화를 갖는 것”이라며 “이러한 특성으로 한 세대가 갖는 언어문화는 다른 세대로의 성장을 통해 변동의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즉, 신조어는 한 세대가 처하는 사회문화적 환경이 다른 세대와 다르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터넷이 막 보급되기 시작한 1990년대는 특히 줄임말이 신조어로서 많이 등장했는데, 이는 처음에는 통신요금을 아끼려는 조치였다. 국회의원들의 싸움이 도가 지나쳐 비난받을 때는 ‘국회스럽다’는 표현이 생겼다. 조선시대 소를 잡는 백정들은 소가 사람의 말을 이해한다고 생각해 소가 못 듣도록 자신들만의 언어를 썼다.
이처럼 신조어가 해당 세대가 처한 사회문화적 환경을 반영한다면, 이상한 신조어가 우리말을 파괴한다며 무작정 비난하기보다는 해당 세대가 처한 현실을 이해해보는 것은 어떨까.
‘롬곡옾눞’(폭풍눈물) ‘괄도네넴띤’(팔도비빔면) ‘띵작’(명작) ‘댕댕이’(멍멍이) ‘커여워’(귀여워) 등등. 훈민정음의 모양을 이용한 ‘야민정음’(디시인사이드 ‘국내야구갤러리’에서 만들어진 단어. 주로 글자 모양이 비슷한 것을 사용한다. ‘ㄹ’이 ‘근’과 가깝다고 ‘박ㄹ혜’로 쓰거나, ‘귀엽다’ 대신에 ‘커엽다’처럼 쓴다)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메신저’를 이용한 대화의 증가다. 해가 갈수록 대면 대화보다는 메신저를 이용한 대화가 늘고 있다. 딱딱한 문자 대화가 주(主)인 시대에서 ‘야민정음’은 문자로 개성을 표현하고 재미를 더할 수 있는 좋은 도구다.
직접 만나서 교류하며 놀기보다는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화면 속에서 놀이를 하니 ‘대유잼’(한자 큰 대와 있을 유, 재미의 합성어로 아주 재미있다는 뜻) ‘꿀노잼’(재미없지만 벗어날 수 없는 상황) ‘엄근진’(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하다), TMI(‘Too Much Information’의 약자로 불필요한 정보가 너무 많다는 뜻) ‘갑분싸’(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지다) 같은 재미와 관련된 신조어들이 늘어난다.
‘부장인턴’(취업을 못 하고 계속 인턴만 하는 취업준비생) ‘호모인턴스’(정직원이 되지 못 하고 인턴만 하는 사람) ‘인구론’(인문계 90%는 논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등은 금융위기 이후 최저치를 기록한 취업자 수 증가 폭, 높은 실업률 등과 맥을 같이하며 ‘퇴준생’(퇴사를 준비하는 사람) ‘반퇴세대’(조기퇴직을 한 후 일자리를 찾는 이들이 많은 세대) ‘쉼포족’(쉼을 포기한 사람) ‘알부자’(아르바이트를 두 개 이상 하는 사람) 등은 대졸 신입사원 27.7%가 입사 1년 안에 퇴사할 정도로 일자리의 질이 나쁘며, 경기가 어려워 세대를 가리지 않고 실업자가 증가하는 현실을 반영한다.
‘혼코노’(혼자 코인노래방에 간다) ‘얼로너’(모든 것을 혼자 하는 사람) ‘혼바비언’(혼자 밥을 먹는 사람) 등은 외롭게 혼자 지내는 사람들이 늘고 있음을 의미하며, ‘일코노미’(1인가구를 위한 경제)와 ‘횰로족’(나 홀로와 욜로의 합성어로 자기 자신만을 위해 돈을 아낌없이 쓰며 즐기는 부류)은 이들을 위한 시장이 커짐을 뜻한다.
답답한 세상을 향한 분노로 ‘법블레스유’(법이 아니었으면 상대를 가만히 두지 않았을 것) ‘복세편살’(복잡한 세상 조금이나마 걱정 없이 편하게 살아보자) 같은 신조어가 탄생했다. 기대되지 않는 암울한 미래에 ‘얼리힐링족’(눈앞에 있는 자신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며 즐겁게 살아가려는 30대)이라는 단어가 등장했으며, 젊은이들은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도 추구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 없듯, 신조어의 생성에도 이유가 있다. 최근에 생겨난 신조어들 대다수는 암울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한글날에는 ‘요즘 애들은 한글 파괴의 주범이야’라는 영양가 없는 비난을 하기 보다는, ‘요즘 애들은 왜 그런 말을 쓸까’라고 질문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