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한복판에서 행인에게 전단지를 나눠주자 역사 직원들이 다가와 할아버지를 막아세웠다. 일본에서도 겪지 못한 일이었다.
홍보 활동을 이어가려 대구에 도착한 할아버지에게 한 지인은 부채를 선물했다. 독도가 그려진 부채였다.
◇ "일본에 독도 광고판 세우자" 간절한 호소에도 모금액은 '0원'
"독도 역사 문제를 바로 잡는 일에 이런 기념품이 다 무슨 소용있나"하며 그는 씁쓸해했다.
거액의 후원금이 모이리라는 기대는 꿈에도 품지 않았다. 일본 사회에 요청한 도움의 손길을 수십 번 거절당한 할아버지였다. 한 핏줄 국민만큼은 자신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3개월이 지난 지금 할아버지의 계좌에 모금된 돈은 0원.
그의 낙담이 염려돼 전화를 걸자 할아버지는 해외 송금 계좌에 문제가 있었고 이번엔 제대로 준비해보겠다고 말했다. 담담한 목소리에 오히려 위안을 받은 기자는 그가 살고 있는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 최초 '죽도의 날' 규탄 모임 만들고 독도 역사 알려
지난 9월 20일 오밀조밀한 주택이 밀집한 일본 오사카 시 니시나리 구의 한적한 골목길. 비슷한 건물 사이로 할아버지의 집이 확연히 구별됐다. 일본어로 적힌 독도 역사 연표가 집 바깥 창문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니라고 확인한 도쿠가와 막부의 명령에서부터 1900년 고종황제의 칙령 반포,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독도 편입에 이르기까지 독도를 둘러싼 한일 양국의 역사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윤 할아버지가 일본 오사카 자택 창문에 붙인 독도 역사 연표.
그와 꼭 닮은 그의 집은 지나는 사람을 붙들고 독도의 진실을 외치고 있었다. "창문에 붙인 연표를 보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고 제가 말을 걸기도 했습니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집 안으로 데려와 제가 가진 자료를 보여주며 설명했어요. 끝내 그들도 이런 시각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왜곡된 역사관이 심어진 일본인들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일깨웠다.
독도 역사에 관한 책과 문서, 자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는 열 평 남짓한 그의 집은 흡사 독도자료관을 방불케 했다. 자나 깨나 독도 생각에 파묻혀 사는 일상이다.
이렇게 할아버지가 여생을 걸고 독도 홍보 운동에 뛰어든 건 일본 시마네 현이 죽도(다케시마)의 날을 정한 2005년 2월부터다. 나름대로 항의 기고문을 써 신문사에 투고했고 여러 시민단체의 문을 두드렸다.
일본의 천황 탄신일을 반대하는 단체나 난징대학살을 추모하는 모임에 참석해 그가 직접 만든 독도 역사 전단지를 돌렸다. 그 모임에서 독도 역사를 연구하는 일본인 학자와도 처음 인연을 맺었다.
"잘 알고 지내던 한국계 신문사 지국장이 사람들을 모아올테니 저더러 기고문에 쓴 내용을 직접 강연해보라고 하더군요. 그들이 죽도의 날을 달리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도록 말입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제가 만든 '죽도의 날을 다시 생각하는 모임'입니다."
그는 일본 역사학자와 재일교포 단체와 의기투합해 2013년 2월 이 모임을 출범시켰다. 역사와 논리에 근거한 독도 지식을 함께 익히고 대중 강연회도 열었다.
1년을 겨우 넘겼을 때 초대 회장이었던 할아버지는 이 모임과 끝내 갈라서고 말았다. 궁극적인 뜻은 같았지만 추구하는 노선이 달랐다. 시마네 현 도지사를 찾아가 항의하거나 거리로 나가 독도 선전을 하는 할아버지의 '과격한' 방식을 모임은 포용하지 못했다.
그 뒤 할아버지는 혈혈단신 자신의 길을 개척해갔다. '독도=죽도 역사 홍보사'라는 이름으로 트럭에 독도 현수막을 내걸고 오사카 시내를 돌았고 때로 시마네 현에서 독도 역사를 외쳤다.
매달 22일 오사카 덴노지 공원에서 독도 역사를 알리는 재일교포 윤영하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자신이 세상을 뜨면 지금까지의 활동이 무위에 그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숱한 고민 끝에 그가 고안한 것이 독도 옥외간판 설립이다.
◇사시사철 보이는 독도 역사 간판 설립 "마지막 사명"
그러나 일본 땅에 독도 역사를 알리는 옥외간판을 세우는 작업은 간단치 않다. 광고판을 세울 땅을 사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선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간다.
할아버지의 뜻을 존중하는 소수의 일본인과 학자, 재일교포들도 선뜻 후원에 나서지 못했다. 일본에서 모금 활동이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린 할아버지는 결국 지난 6월 한국을 찾았다.
그는 지난 6월 한국을 찾아 모금 활동을 펼쳤다.
독도 문제에 열띤 관심을 보이는 국민들에게 자신의 뜻을 알리고 도움을 받고 싶었다. "어른부터 아이까지 '독도는 우리땅'이라 외치는 모국에선 어느 정도 모금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한국 사람이 무력으로 일본 영토를 약탈한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일본인에게 알려야 합니다."
그러나 힘겹게 한국에서 펼친 할아버지의 모금 활동은 빈손으로 끝났다. 그가 애써 만든 전단지에 적힌 일본 우체국 계좌로는 한국에서 돈을 보낼 수 없었다.
일말의 기대가 허탈감으로 바뀔 법도 했지만 할아버지는 포기를 몰랐다. 송금이 가능한 계좌 개설은 물론 지속 가능성을 위해 옥외간판 설립 법인화를 계획 중이다.
이를 위해 윤 할아버지는 지난 12일 다시 한국을 방문해 이름 석 자가 찍힌 통장을 개설했다.
독도의 날인 25일 그는 이 통장 계좌가 적힌 전단지를 나눠주며 서울역에서 두 번째 모금 활동을 펼칠 예정이다.
"소중한 후원금을 받을 수 있도록 국내 계좌를 준비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단 몇 푼이라도 후원해준다면 몇 년이 걸리더라도 땅을 사 일본에 옥외간판을 세울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윤 할아버지는 독도의 날 한국에서 펼칠 모금 활동을 기약하며 이달의 독도 홍보전을 위해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이틀 전 22일 덴노지 공원에서 어김없이 울려퍼진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늘 그랬듯 굳세고 당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