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 철수 카드가 미국 정가에서 또다시 공공연히 거론되고 있다. 스티브 배넌 백악관 선임고문 겸 수석전략가가 북핵 동결의 대가로 주한미군 철수를 협상 카드로 검토하고 있다고 16일(현지시간) 공개하면서 공론화에 불을 지폈다.
미 외교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지난달에 북한 정권 붕괴 이후 주한미군 철수를 중국에 약속할 것을 제안한 적은 있지만, 트럼프 행정부 고위 관계자가 주한미군 문제를 공개적으로 언급한 건 처음이다.
배넌의 발언은 중국이 미국의 요구대로 북한을 압박해 핵 동결을 관철시킬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에 주한미군 철수가 협상 테이블에 올라갈 가능성이 없다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는 그렇기 때문에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을 더 몰아붙이기 위해 중국과의 경제 전쟁에 올인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북·미 대화가 성사되면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문제와 주한미군 철수가 함께 논의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트럼프 행정부가 주한미군 철수를 북핵 문제 해법의 하나로 검토했다는 게 이미 드러났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주한미군 철수 카드가 처음 거론된 건 지난 2월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가 국무부, 국방부, 국토안보부, 중앙정보국(CIA) 등 외교안보 부처 관계자들을 소집해 북한 문제의 근원적 해법을 강구하라고 지시하면서였다. 군사행동부터 경제제재까지 거론된 모든 옵션 중에 주한미군 철수 협상 카드도 포함됐다.
이후 4월 들어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드(THAAD)가 전격 배치되면서 한국에서 배치 반대 여론이 일자 주한미군 철수 문제가 워싱턴에서 또다시 불거졌다. 사드 반발이 커지면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군 철수를 검토할지 모른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이때는 한국의 차기 정부를 압박하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다가 문재인정부가 출범하고 한·미 정상회담을 거치면서 사드로 인한 한·미 갈등은 봉합됐다. 동맹의 중요성을 서로 확인하면서 주한미군 문제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주한미군 철수를 죽은 카드로 보기는 어렵다. 배넌의 인터뷰가 공개된 날 공교롭게도 워싱턴포스트(WP)에도 북·미 갈등 해법의 하나로 주한미군 철수 논의를 예상하는 글이 실렸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이그나티어스는 북한 김정은과 트럼프 대통령의 담판이 성사된다면 북·미 간 평화협정과 주한미군 문제가 논의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다만 워싱턴의 한 외교소식통은 “현재 대북 정책의 주도권은 배넌이 아닌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이 쥐고 있다”며 “배넌의 주한미군 철수 협상안은 정책 실무라인에서 심도 있게 검토된 적이 없고 한·미 정부 간에도 논의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다른 외교소식통은 “배넌은 더 이상 백악관 NSC 상임위원도 아니어서 외교안보 정책결정 과정에서 배제돼 있다”며 “그의 주장이 정책으로 채택될 가능성은 낮다”고 전했다.
워싱턴=전석운 특파원 swch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