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untary Agency
Network of Korea
기전여고와
함께하는 반크
기사스크랩(기조연설문) |
|||||
---|---|---|---|---|---|
이름 | 이가연 | 등록일 | 18.06.10 | 조회수 | 206 |
르완다 대학살
콩고내전은, 종족 전쟁에 이은 자원 전쟁이기도 했다. 1994년 르완다 대학살에서 비롯된 인종간의 대학살은 19세기 말, 유럽의 식민지 정책이 후투족과 투치족을 구분하면서 시작됐다. 평화롭던 원시사회가 서로를 구별하기 시작한 배경에는 르완다와 브룬디를 식민통치 했던 벨기에가 있었다. 르완다와 콩고내전 2차에 걸쳐 일어난 아프리카 대전의 원흉은 벨기에였으나, 르완다 학살이 유엔 안보리 이사회에 상정되는 것을 막은 것은 아프리카를 실질적으로 식민통치하던 유럽과 미국이었다.
콩고를 비롯한 우간다, 탄자니아를 국경으로 둔 두 나라 대통령이 비행기 요격 사고로 동시에 사망하고 3개월간 100만명이 학살된, 홀로코스트에 버금가는 최악의 학살이었다. 두 종족간의 학살은 너, 나 할 것 없는 희생자를 만들었고 학살의 수준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선 것이어서 4.3 사건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벨기에가 만들어 놓은 이 인종 청소는 후투족에 의한 투치족 말살이었기 때문에 다른 민족에 대한 공격과 백인들, 다른 국가 사람들에 대한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복이나 국가와는 무관했던 후투족은 투치족이 전선을 형성하며 반격을 시작하자 민주콩고로 피난을 시작했다. 그 인원이 300만에 달했다. 이어서 르완다는, 자국민의 불행을 민주콩고의 불행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후투족 병력들이 피난민에 섞여 난민촌을 병영화 시키는데 무기와 물자를 지원했다. 그 지원을 받은 사람이 현 대통령 로랑카빌라(미국)였고 대통령이 되자 요구가 점점 많아지는 르완다와 우간다(미국)의 요구를 거절하고 협력관계를 철회하는데 이어, 병력 철수를 요구했다. 졸지에 자동 침공이 되어버렸다.
물론, 거기에는 자원 전쟁도 포함되어 있었고 배경은 프랑스와 미국이었다. 프랑스는 공식적인 프랑스 육군, 외인부대 외에도 자원을 관리하던 세르비아 용병을 운용했다. 미국이 그 자원을 뺏으려 했기 때문에 미국과 프랑스의 대리전쟁 양상도 띠고 있었다. 그래서 내전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은 카빌라의 쿠데타 성공은 프랑스에 상당한 타격이었다. 르완다를 미국에 잃은 것처럼, 콩고도 미국에 잃을 서막이 열린 것이다. 가봉, 세네갈 등 전통적인 프랑스 우방도 위험했다.
퓌가 대령의 전술 참모부는 브라자빌의 각 주요 루트와 거점들을 장악한 뒤, 두 개 중대로 하여금 킨샤사에서 브라자빌, 콩고 강 도강 훈련을 실시한 후, 새로운 야영지를 구축하는 훈련도 실시했다. 대피해야 할 인원은 많았고 총을 들지 않은 적들은 피아식별이 어려웠다. 프랑스 군 안전지대로 들어온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은 비행기를 통해 탈출했고 마지막까지 탈출을 위해 공항을 점유하는 일에 사단 병력 대부분이 투입되었다. 2외인공수연대의 2개 중대만이 시가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효도는 본능적으로 이번 전투는 반드시 적과의 교전이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효도는 한국 군대에 대한 악몽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한국에서의 군대 생활이 자신에게 군대에서 배워야 할 대부분의 기술만을 주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외인부대는 자신에게 단지 어울리는 옷과 복지 혜택뿐만 아니라 외인부대라는 거대한 가족을 안겨준다고 믿었다. 훈련도 한국에서 받은 것에 비하면 양호했고 내무반 생활은 한국과 비교할 바가 못되었다. 효도는 이미 한국에서 완성된 군인의 모습으로 외인부대의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 혜택과 자유, 프랑스 문화를 마음껏 즐겼다. 외인부대는 효도를 위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자유의 절정은 실전에 있다는 것을, 콩고에 파병된 이후에야 깨달았다.
시가전 훈련은 힘든 것이 없었다. 훈련이 거듭되면 될수록 살고 죽는다는 것이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매복과 매설된 지뢰, 수류탄, 저격수 등에 의해 처절하게 깨달았고 반복된 훈련만이 불상사를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효도는 한국에서 요인 납치, 사살, 극한에서 생존법, 고공낙하와 잠수에 이르는 대부분의 훈련을 받았지만 인간적인 훈련이란 존재하지 않아서 생각할수록 끔찍하고 몸서리 치는 증오가 피어 올랐다.
외인부대에서 배우는 전술은 그에 비하면 실전 위주였고 실용적이었다. 자잘한 군더더기 다 없애고 실전 위주의 실탄 사격에 정신을 괴롭히는 것은 오로지 피곤함뿐, 무엇보다 실전에 기초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훈련들이 하나 둘씩 습득될 때마다 너무도 다양한 기술들에 피곤함과 짜증이 묻어났다. 인내가 한계에 이르는 것이 육체적인 고통도 아니었고 괴로워 그대로 죽고 싶다는 느낌도 아니었다. 인간의 기술로, 전투에서 죽거나 다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놀라웠다. 그러면서도 평온하고 몽롱한 상태에서 잠들 듯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또한 아무리 뛰어난 시가전 전문가나 훌륭한 군인이라 해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포탄 한 발에 먼지가 되어 사라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은, 하늘로부터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느냐에 따라 운명의 시간을 더 늘릴 수 있다는 것도 뒤늦게야 깨달았다. 다행스럽게도 프랑스는 그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효도는 ‘펠리칸 작전’이 묘하게 긴장을 주긴 하지만 여유가 있었다. 실전은 언제 어디서 날아온 총알에 쓰러질지 모르는 데다 내 운명과는 전혀 상관없는 총알 한 발이 내가 쌓아 놓은 운명을 송두리째 갈아치울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도 익숙해졌다.
방탄 조끼를 입고 탄창 6개에 25발씩 실탄 장전을 하고 수류탄까지 지급 받고 전투 배낭까지 메면 무거웠다. 24시간 비상 근무에 쪽잠을 자면서도 혼란의 한 가운데로 장갑차를 앞세우고 초계를 나갔다. 안전한 지역이긴 했지만 명령이 떨어지면 곧장 전투지역으로 이동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동료들도 모두 교육대에서의 어리버리 신병의 모습을 벗고 점점 ‘랩맨’(외인공수부대원)이 되어가는 모습이었다. 효도는 지난 3년 간의 과정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
이전글 | 기사스크랩(한옥마을 캠페인2) |
---|---|
다음글 | 기사스크랩(한옥마을 캠페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