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차의 나라’로 이름난 스리랑카. 적도와 북회귀선 사이에 위치한 스리랑카는 위도상으로 열대지방에 속하지만 해발 1000m가 넘는 산이 많아 차 재배에 적합한 쾌적한 기후를 자랑하는 곳이다. 스리랑카는 영국 BBC방송이 ‘죽기 전에 가봐야 할 50곳’ 가운데 하나로 꼽을 만큼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갖고 있어 ‘인도양의 진주’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스리랑카의 또다른 이름은 ‘인도양의 눈물’이다. 세계지도를 펼쳐 놓고 보면 인도 대륙이 마치 남쪽 바다에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려 놓은 듯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정작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은 인도가 아니라 30년 가까이 내전을 치르고 있는 스리랑카 사람들이다.
새해가 시작된 바로 다음날인 지난달 2일 오후. 스리랑카의 마힌다 라자파크세 대통령은 “타밀반군의 수도 킬리노치치를 장악했다. 이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값진 승리”라고 발표했다. 이로써 “26년간 이어져 온 스리랑카 내전이 종식될 것인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는 해외 언론들의 기사도 쏟아져 나왔다. 또 지난 5일에는 스리랑카 정부군이 “타밀반군의 마지막 북동부 거점인 찰라이 해군기지를 점령했다”고 발표했다. 라자파크세 대통령은 이번에도 “타밀반군은 며칠 내에 소탕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하지만 스리랑카 정부군의 ‘소탕 대상’인 반군은 그냥 주저앉지 않았다. 지난 20일 타밀반군은 공군기로 사용하는 경비행기 2대를 동원해 수도 콜롬보의 국세청 건물에 폭탄을 떨어뜨려 건물을 전소시켰다. 내전의 끝은 보일 듯 보이지 않고 있다.
다음날인 21일 스위스 베른에서는 1만명가량의 유럽 거주 타밀인들이 즉각적인 종전을 요구하면서 항의시위를 벌였다. 스위스를 비롯한 유럽 거주 타밀인들은 이날 베른의 스위스 연방청사 앞에 모여 스위스 정부가 스리랑카 정부군과 타밀반군 간의 전투를 즉각 중단시키는 데 더 많은 역할을 해줄 것을 촉구했다. 이들의 종전 요구는 지긋지긋한 내전을 끝내달라고 호소하는 ‘눈물’이었다.
스리랑카 내전은 거칠게 보면 다수민족인 싱할리족(74%)과 소수민족인 타밀족(18%)이 벌이고 있는 전쟁이다. 싱할리족의 대다수가 불교도이고 타밀족은 힌두교 신자가 많아 내전은 종교전쟁의 성격도 띠고 있다. ‘사자와 호랑이의 사투’로 불리기도 한다. 스리랑카 국기에 그려진 칼을 든 ‘사자’는 싱할리 왕조의 창시자인 비자야의 할아버지가 사자였다는 건국신화에서 유래했다. 타밀반군의 정식 명칭은 ‘타밀엘람 해방호랑이(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LTTE)’다. 여기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11세기 스리랑카 북부 일대를 점령했던 남인도의 촐라 왕조의 문장에 사용된 것이며, LTTE가 싱할리족의 상징인 사자에 대항하는 의미에서 타밀족의 전통 호랑이를 쓴 것이다. 엘람은 타밀어로 스리랑카 땅을 말한다.
26년째 벌어지고 있는 ‘사자와 호랑이의 사투’는 그동안 6만5000~7만명의 희생자를 낳았으며 지금도 진행 중이다. 스리랑카 내전의 소름끼치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소년병’이다. 로이터통신은 지난 17일 유엔 스리랑카 조정관 인 나일 부네의 말을 인용, “LTTE가 14살 정도 소년까지 병사로 끌고 가고 있으며 숫자는 더욱 늘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LTTE에서만 소년병을 징집한 것은 아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정부군과 LTTE 모두 병력 증원을 위해 앰네스티와 유엔의 계속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17세 이하의 소년병들을 전투에 동원했다. 1990년대 후반에는 LTTE 소년병 출신으로 스리랑카 정부군에 의해 재활교육 중이던 25명의 소년들이 수용소 관리인 2명을 인질로 잡고 난동을 부리다 3000여명에 달하는 주민들에 처참하게 살해당한 일도 있었다.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도 모르는 아이들의 주검은 내전이 길어지며 쌓여만 갔다. 라트나시리 위케레마나야케 전 스리랑카 총리는 “군인 수가 부족해 반군을 물리치지 못하고 있다. 아이를 많이 낳아 군대에 보내라”고 외쳤을 정도이다.
양심수를 비롯한 많은 타밀족 정치범들은 재판 없이 비상계엄령과 테러행위방지법에 의해서 구속됐다. 스리랑카에서 계엄령은 일상이 됐기 때문이다. 붙잡힌 정치범들은 고문이나 강간을 당했고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시신이 계속 발굴되고 있다.
그러면 이 끔찍한 내전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됐을까.
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영국으로부터 각각 독립한 데 이어 이듬해 2월 스리랑카도 영연방의 자치국으로 독립한다. 당시 이름은 ‘실론(Ceylon)’이었다. 이후 스리랑카에서는 중·상류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통일국민당(UNP)과 스리랑카자유당(SLFP)이 번갈아가며 집권한다. UNP는 친영·친서방 색채가 강한 반면, SLFP는 민족주의 성격이 강하고 외교적으로 비동맹주의를 채택했다. SLFP는 독립 이후 8년간 집권한 UNP를 누르고 56년 집권에 성공한다. SLFP를 창당한 솔로몬 반다라나이케를 총리로 한 이 정권은 급진 불교세력을 등에 업고 다른 좌파 정당과 연합해 스리랑카의 강력한 싱할리화 정책을 추진했다. 국민들에게 싱할리어만 사용하도록 했고, 군대·경찰 등 행정조직의 요직은 모두 싱할리족이 차지했다.
이에 독립 당시부터 자치권을 요구했던 타밀족은 크게 반발, 58년 처음으로 폭동을 일으킨다. 국내 정치의 안정을 위해 타밀족과의 협상 필요성을 느낀 반다라나이케 총리는 협상에 들어갔지만, 이를 정치적 배신으로 여긴 급진 불교도에 의해 59년 암살당한다. 이어 그의 부인인 스리마오 반다라나이케가 총리직을 이어받아 싱할리화 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65년 재집권한 UNP도 전 정권의 싱할리족 우대주의 노선을 더욱 확대했다. 급기야 72년 신헌법에서는 불교의 보호·육성을 국가의 의무로 규정, 타밀족에 대한 차별을 공식화했다. 타밀족의 본거지 중 하나였던 동부에 싱할리족을 이주시켰고 대학 입학에도 인구비례를 적용하는 등 철저히 타밀족을 소외시켰다. 70년대 신헌법과 차별에 저항하며 타밀족의 분리·독립 요구는 거세게 일어나 76년 LTTE 결성에까지 이른다.
타밀족은 물론 싱할리족까지 이에 맞서면서 시작된 폭동은 77년과 81년을 거쳐 83년 7월 최고조에 달했다. 대규모 폭동의 계기는 타밀족이 주로 거주하는 북부 자프나에서 정부군이 습격당해 싱할리족 병사 13명이 살해된 것이었다. 이튿날 수도 콜롬보에서는 무차별 보복이 자행돼 타밀인 정치범 52명이 옥중에서 학살당했다. 타밀 사람이 운영하는 상점이나 주택은 싱할리 폭도들의 습격과 방화의 대상이 됐다. 이 때를 내전의 시작으로 본다. 이후 지금까지 장비와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LTTE는 격렬하게 저항했다. 포로가 될 위기에 처하면 주저없이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하는 이 타밀 호랑이 반군에 세계는 깜짝 놀랐다. 정부 요인 암살과 공공시설에 대한 폭탄 테러를 벌여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혔다.
스리랑카에서 압도적 다수를 점하고 있지만 싱할리족에게는 자신들이 소수민족이라는 인식이 뿌리박혀 있다. 바다 건너 인접한 인도 남부 타밀나두주의 타밀족이 수천만명에 이르기 때문이며 타밀 분리·독립 움직임이 인도의 세력과 연계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해왔다. 타밀족이 잇달아 피신해 오면서 80년대 후반 인도가 내전에 개입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이후 인도·스리랑카 평화협정에 의해 7만 병력의 인도평화유지군(IPKF)이 LTTE 등 강경파 타밀 게릴라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스리랑카에 파병됐다. 하지만 인도군도 LTTE와의 전쟁에서 피해를 입고 91년 라지브 간디 인도 총리마저 LTTE의 자살폭탄테러로 암살되면서 인도는 공식적인 개입을 멈춘다.
스리랑카 내전은 이처럼 종족간 갈등으로 인식되지만 그 이면에는 제국주의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1796년부터 약 150년간 이 지역을 점령했던 영국은 그 이전의 종주국인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와 달리 지나칠 만큼 불교와 승단을 탑압했다. 이는 오히려 싱할리족 사회에 민족적 자각과 이를 뒷받침하는 불교에 대한 맹신의 싹을 틔웠다. 이 자각은 싱할리만의 불교 민족주의라는 독특한 민족주의를 낳아 분리·독립을 이루는 힘이 됐지만, 나중에는 타밀족에 대한 또다른 형태의 압제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 근원적인 민족적·종교적 이질감에도 불구하고 50년대 스리랑카는 지금과 같은 갈등이 두드러지지 않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당시 스리랑카에서는 민족보다는 계층·계급에 의한 갈등이 두드러졌었다. 농경 카스트와 어업 카스트 간의 대립이 더 컸던 것이다. 타밀족 내부에서조차 원주민인 ‘스리랑카 타밀’과 차 재배를 위해 영국이 강제로 이주시킨 ‘인도 타밀’ 간의 계급적 갈등이 존재했다.
하지만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독립 이후 정치에서 배제되고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농촌지역과 청년층의 불만을 타밀족으로 돌리기 위해 정권 차원에서 ‘싱할리족 및 불교 우대주의’를 활용한 것이다. 앞으로 펼쳐질 긴 내전으로 입게 될 큰 상처를 보지 못했던 정치인들의 근시안 때문에 싱할리와 타밀인들은 지금도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