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 허리케인이 들이닥쳐 큰 피해가 있었다. 필자도 이 지역에 살다보니 관련 뉴스와 기사를 자주 찾아보았다. 여러 소식 중 홍수 위험이 큰 지역에서는 긴급 대피 명령이 떨어졌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떠나길 거부하고 있어서 우려된다는 기사가 있었다. 나중에 위험한 상황이 되어 도움을 청하면 이미 늦을 수도 있고, 또 구조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생명 또한 함께 위험해지기 때문에 이기적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미항공우주국(NASA)가 12일(현지시간)공개한 허리케인 플로렌스의 모습. 국제우주정거장(ISS)에 체류하고 있는 우주비행사 알렉산더 게르스트가 찍은 사진 - NASA 이들은 왜 위험이 다가온다는 점을 알고서도 대피 명령을 따르지 않았을까? 안전불감증이라서 그럴까. 아니면 그냥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고집불통이라서 그럴까.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자 니콜 스티븐스 교수와 동료 연구자들은 지금부터 약 10년 전 역대급 피해를 입힌 허리케인 카트리나에서 생존한 사람들 중 대피한 사람들과 그러지 않고 끝까지 남아있었던 사람들의 차이를 조사했다. 그 결과 대피한 사람들은 대부분 중산층 백인이었고 대피하지 않은 사람들은 대부분 비교적 소득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라는 점이 밝혀졌다.
이들은 재력과 교육 수준뿐 아니라 태풍 소식에 대한 접근성, 장거리 이동 수단, 대피할 장소 등 ‘대피에 필요한 자원’에서 큰 차이가 발견됐다. 떠나고 싶어도 얼마나 될 지 모르는 시간동안 호텔 등에서 머무를 재력이 없고 태풍의 심각성에 대한 소식을 잘 전해 듣지 못했으며, 가족 중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있거나 장거리 이동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보다 남는 것을 선택한 경우가 많은 것이다.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거나 멍청해서 떠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 떠난 것에 가깝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랬는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연구자들은 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경험에 대해 설명해보도록 했다. 그 결과 떠난 사람들은 대피 명령을 접하고서 바로 가족이나 친구의 도움을 요청하거나 호텔을 알아 보는 등 유·무형의 자원을 잘 활용해서 태풍을 대비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남은 사람들은 여기 말고 딱히 갈 곳이 없고 이동에 필요한 자원 또한 없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또 다른 친구나 친척들이 남아있는데 혼자 떠날 수는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른 피해자들에 대한 걱정도 많이 보였다. 어려울 때일수록 가족과 이웃이 똘똘 뭉쳐야 하며 함께 이겨냄으로써 더 강인해질 수 있다고 하는 등 독립성보다 공동체의 가치를 더 우선시 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그냥 생각이 없어서, 고집이 세서, 또는 수동적이어서 남았다기보다 이들 역시 주어진 환경 안에서 자신에게 있어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열심히 판단했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행했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겐 전혀 이해되지 않고 바보같기만 해 보이는 결정이 누군가에겐 ‘최선’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의 인식을 조사했을 때 많은 이들이 떠난 사람들은 독립적이고 책임감이 강하며 성실, 적극적이고 행동력이 강한 사람들인 반면, 남기로 한 사람들은 이와 달리 의존적이고 책임감 없고 무심하며, 게으르고 수동적, 나약하며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인 것 같다고 응답하는 경향을 보였다. 현장에서 구조활동을 한 구조대원, 경찰, 의료진들도 그 정도가 비교적 약하긴 하나 비슷한 편견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허리케인 같은 자연 재해의 생존자에게뿐만 아니라 성폭력을 비롯한 많은 사건 사고의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왜 피하지 않았어?”류의 비난이 흔하다. 하지만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처한 상황과 맥락, 주어진 ‘옵션’에 의해 정해지곤 한다. 맛있는 마쉬멜로우를 바로 먹지 않고 30분 정도 기다렸다 먹으면 보상을 하나 더 주겠다고 하는 상황에서도 ‘기다리는 것’이 정답인 것 같지만, 자원이 부족한 가난한 환경에 처한 아이들의 경우 똑똑할수록 기다리지 않고 눈 앞의 보상을 바로 취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연구도 한 예다(Sturge-Apple et al., 2016). 맥락에 따라 ‘똑똑한 생존 방식’이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특정 사람들이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맥락을 충분히 살펴보지 않은 채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뭘 모르고 하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사람들에게는 ‘빵이 없으면 케잌을 먹으면 되지’ 수준의 무책임한 말로 들릴 것이다.
사람들은 다 제각각 다른 맥락에서 서로 다른 선택지를 접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사실을 무시하고 나만의 방식이 옳다 여기고 여기서 벗어난 방식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쉽게 판단하는 것은 오만한 사고방식일 것이다. 나 역시 한참 동안 남은 사람들은 비난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금 맥락의 힘을 과소평가 하지 말자고, 쉽게 비난하기 전에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을 길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참고: Stephens, N. M., Hamedani, M. G., Markus, H. R., Bergsieker, H. B., & Eloul, L. (2009). Why did they “choose” to stay? Perspectives of Hurricane Katrina observers and survivors. Psychological Science, 20, 878-886. Sturge-Apple, M. L., Suor, J. H., Davies, P. T., Cicchetti, D., Skibo, M. A., & Rogosch, F. A. (2016). Vagal tone and children’s delay of gratification: Differential sensitivity in resource-poor and resource-rich environments. Psychological Science, 0956797616640269. ※ 필자소개 지뇽뇽. 《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 등, 삶에 도움이 되는 심리학 연구를 알기 쉽고 공감 가게 풀어낸 책을 통해 독자들과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 현재는 노스캐롤라이나대에서 자기 자신에게 친절해지는 법과 겸손, 마음 챙김 등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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