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샘(문예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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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ast Illusion - 최하은

이름 최하은 등록일 14.11.18 조회수 753

The Last Illusion

최 하 은

전조

 까만 잉크 글씨가 눈 앞에서 갓 태어난 아기새마냥 파닥이기 시작했다. 

 

 멀거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잉크 글씨는 2차원의 알을 깨고 나와 서로 몸을 얽고 입체적인 형태를 갖추더니 이윽고 그 손톱만한 부리를 벌리고 짹짹 울어대기 시작했다. 현실감이라곤 개미 눈곱만큼도 없는 상황 속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초연했고 까만 잉크 새는 짹짹짹 째액 짹 울고 자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이내 부산스런 움직임으로 종이 위를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더니, 신경질적으로 제 몸을 이루고 있는 글씨들이 방금 전까지 가지런히 자리해 있었던 곳을 쪼아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딱딱거리는 소리가 문득 귀에 거슬리고 짜증이 나서, 나는 이제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까지 하는 새 모양의 잉크 덩어리를 펜 끝으로 툭 밀어버렸다. 그리자 아기새는 빼─액 하는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낱낱이 흩어지더니 꾸물꾸물 기어 원래 있던 자리로 스며들었다.

 

 

 날 먹을 건가?

 

 아기새에 이어 이번엔 점심으로 나온 닭다리였다.

 

 나는 막 입가로 가져가려던 숟가락을 멈추고 식판 한 구석을 보았다. 노릇노릇 그릴 자국이 선명히 남은 닭다리 위로 우스꽝스럽게 돋은 도톰한 입술이 과장된 몸짓으로 달싹이고 있었다. 자네, 날, 먹을, 건가? 그럼, 당연히 먹어야지. 닭다리 너야 잘 모르겠지만 늘상 풀떼기밖에 나오지 않는 식단에서 근 한 달 만에 찾아볼 수 있었던 육류가 바로 너란 말이야. 널 먹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분식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식당으로 돌렸는지 알기나 하니? 게다가 넌 노릇노릇 구워진 훈제 닭다리인걸.

 

 내가 그 일련의 생각을 마치자마자 닭다리는 내 속을 그대로 읽기라도 한 듯 숨가쁘게 그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 제발. 나는 아직 그릴에서 나온지 두 시간도 되지 않은 몸이란 말일세. 그릴에서 나올 때 헤어진 그녀와도 다시 만나야 하고……. 이제 달싹거린다는 표현보다 팔락거린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게 된 입술의 움직임을 보며 나는 문득 잉크 덩어리 아기새의 날개짓을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말로 생각을 마쳤다. 알 게 뭐람.

 

 나는 닭다리를 집어들었다. 입술은 정지 버튼을 누르기라도 한 듯 딱 굳어버리더니 처음부터 없었던 양 감쪽같이 사라졌다.

 

 

 허나 결국 나는 닭다리를 먹지 않고 식판에 내려놓았다. 입술이 돋았던 닭다리라니 찝찝해, 하는 생각에서였다. 이제 잘 됐네요, 닭다리 씨. 어서 그녀를 만나러 가요. 닭다리에게서는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이 친구가 물었다. 야, 너 그거 안 먹어?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쾌재를 부르며 닭다리를 집어가더니 이내 한 입 크게 베어문다. 어디선가 닭다리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향해 속으로 읊조렸다. 저런, 하지만 그녀도 분명히 먹혔을 거에요. 아니면 곧 먹히게 되던가. 천국에서라도 만나실 수 있기를.

자각

그쯤 되자 슬슬 뭔가 이상하지 않나, 생각했다. 실크 모자를 쓴 여우 한 마리가 나비넥타이를 매고 연미복을 걸치고 흡사 마술사 같은 꼴로 서서 길쭉한 지팡이로 칠판을 경쾌하게 두드려대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칠판 위의 분필 글씨들은 토끼가 되어 깡총깡총 뛰어가거나 폭죽처럼 터져 나오거나 수많은 비둘기 떼로 푸드덕거렸다. 나는 분필 비둘기가 머리 위에 똥처럼 뿌리고 간 분필가루를 툭툭 털어냈다.

뭐 이상한 거 없어?

뭐가?

아니야.

나는 입을 다물고 다시 칠판을 보았다. 다행히도 이번엔 꽤 정상적인 필기가 자리잡고 있었다. 정신없이 그것을 옮겨적는데 내가 볼펜으로 적은 글씨들이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탁, 하고 내려치자 이내 잠잠해졌다.

참, 오늘 몇십년만의 유성우가 있다고 했었는데.

닭다리를 먹었던 아이─T가 말했다. 그러는 사이 책 위에서 다시 한 번 잉크 새가 꾸물거리며 기어나왔다. 요전보다 더 커진 것 같기도 했다. 유성우? 하고 되묻자 같이 갈래? 하고 다시 물음이 돌아왔다. 고개를 끄덕였다. 잉크덩어리 새가 꺽꺽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나는 책상 위에 조금 남아 있던 분필가루를 모아 새의 부리 안으로 털어넣었다.

Defying Gravity

T와 만난 시각은 해가 진 후, 만난 곳은 산 속 공원 어느 호숫가였다. 호수 속에서 밤하늘이 반짝거렸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일렁이고 있는 별들이 찬 물 속에서 서서히 스러져가는 중이었다. 곧 시작이다, 하며 T는 내게 소방관이나 입을 법한 두꺼운 방화복을 건넸다.

이거 뭐?

입으라고.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렇게 입으면 돼. 팔과 다리를 끼워 넣고 T의 도움을 받아 온 몸을 단단히 싸매고 나니 그건 흡사 우주복 같아 보이기도 했다.

시작한다! 얼른 이쪽으로 와!

T는 나를 끌고 호숫가 근처로 바짝 붙었다. 고요했던 호수는 어느새 부글부글 끓는 중이었다. 그 진동에 땅이 지진이라도 난 것 마냥 흔들렸다. 굉음이 울리고 호수가 더욱 환하게 빛나기 시작할 때, T는 나를 끌고 호수에 뛰어들었고 나는 방화복 주머니에서 삐죽 고개를 내민 잉크덩어리를 봄과 동시에 그것을 주머니 속으로 내리눌렀다. 그리고 별이, 내가, 수많은 물방울들 아래서부터,

솟구쳐 올랐다.

나는 그제서야 방화복을 입은 이유를 깨달았다. 별은 불타는 천체였고 맨몸으로 탔다가는 별의 열기와 공기의 마찰열에 타죽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들보다 중력을 거스르고 솟구쳐 오르는 이 거대한 돌덩이를 납득할 수가 없었다.

세찬 바람이 나부꼈지만 모자와 고글 덕에 주위를 둘러보기엔 무리가 없었다. 도시가 한 눈에 내려다 보였고 군데군데서 별들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것들은 처음엔 잘 보이지 않다가 도시의 불빛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점점 더 밝아졌다. T는 놀이기구라도 타는 것 마냥 두 팔을 번쩍 들고 비명을 지르는 중이었다.

이제 곧 대기권을 벗어날 거야!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

T는 대답하지 않았고 주머니에서 잉크덩어리가 기어나왔다. 꽤 크게 자란 새의 모습이었다. 빼애애애애 찢어지는 울음소리가 남과 동시에 별의 속도가 이전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빨라졌다. 잘못했다간 날아가버릴 것 같아서 허리를 숙이고 별에 찰싹 달라붙었다. 빼액 빽 빼애애 새는 끊임없이 울었다.

적막

주위는 고요했다.

나는 별에서 떨어져 나와 무중력을 유영하고 있었다. 천천히 회전하는 세상 속에서 저 멀리 내가 타고 온 별과 T가 보였다. 별에 우뚝 선 T가 인사하길래 손을 마주 흔들어 주다가 배 근처에서 흔들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줄이었고 배꼽에 연결되어 있었으며 저 별들 사이 보이지 않는 어디론가로 이어졌다. 나는 그제서야 T의 인사가 작별을 뜻하고 있음을 알았다.

빼애액 빼애 빽

잉크덩어리는 어느새 흰 빛을 띄고 있었다. 그것은 쉴 새 없이 빽빽거리며 내 주위를 맴돌았다 빽빽 빽 삑 삑 삐이 삑 울음소리가 변하고 있었다 생명의 박동 같은 소리였다…… 나는 새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미친 듯이 울리던 소리가 그제서야 잦아들었고 새로운, 그전까지 새 울음소리에 가려 듣지 못했던

삑 삑 삑 삑

…은 잘 끝날 거란다 걱정하지 말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챙강 유리가 부딪히고 쨍그랑 깨지고 하하 웃음소리와 너는 왜 그렇게 하는 원망과 흐느낌과…, 다시 한 번 누군가의 심박, 잦아드는 숨소리 삑 삑 삐이… 하는 소리들이 찾아들었다.

아아, 긴 꿈을 꾸고 있었구나

무시무시한 힘에 의해 줄이 잡아당겨졌다. 나는 속절없이 끌려가며 차갑게 식은 별들에 부딪히고 튕겨지고 부러지고 쓸려 긁히고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손에 쥔 새는 놓지 않았다. 그리고 줄이 완전히 줄어들어 없어졌을 때 입을 벌려 새를 삼켰다. 미친 듯이 푸닥거리는 날개와 뾰족한 부리와 바둥거리는 발톱에 목과 턱과 입 안이 쓰라렸다. 그럼에도 억지로 물어 꼴딱 집어삼켰다, 그리고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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