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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아래, 너의 속삭임 - 최하은

이름 최하은 등록일 14.11.18 조회수 752

별 아래, 너의 속삭임

최 하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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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세기, 고도로 발달한 과학 기술과 문명은 이제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 감히 넘볼 수 없었던 절대적인 영역까지 도달……이런 한 편 ‘안드로이드’ 가 현대 사회 곳곳에 스며들면서 이 새로운 사회 구성원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대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습니다. 소유물로 취급하기엔 그들의 모습이 인간과 너무 흡사한 탓일까요? 겉보기에는 인간과 거의 차이가 없는 이들은…….



1

매서운 겨울 바람에 부딪힌 문은 오래 닫혀 있던 탓인지 기분 나쁜 쇳소리를 냈다. 여자는 억지로 비틀린 문을 열어젖히고 텅 빈 옥상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두텁게 쌓인 눈에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발 밑이 뽀득거렸다. 흐아, 춥다.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종종걸음을 내딛는 여자의 두 볼이 술기운에 발갰다. 남자는 여자가 열어 둔 채로 내버려둔 문을 조심스레 닫고 여자의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끼익, 하고 문이 닫혔다. 가리는 것 없이 훤하게 펼쳐진 하늘은 마치 눈이라도 올 것 마냥 뿌옇고 어두침침했다.

여기서는 아래가 다 보이네!

난간에 그렇게 기대면 위험해.

난간에 몸을 걸친 여자는 남자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허공 위로 몸을 더 쭉 내밀었다. 밤 늦은 시간임에도 거리는 여전히 밝았다. 낮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형형색색의 빛들이 땅의 별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너희들이 별빛을 뺏어갔구나! 너희들이 저 위에 별들을 다 집어삼켰어! 깔깔 웃으며 말하는 여자에게서 알싸한 알콜 냄새가 풍겼다. 남자는 그런 여자의 고집을 하루 이틀 겪어 본 것이 아니었는지 아무런 말 없이 여자의 허리를 붙잡아 난간에서 떼어놓았다.

그러다 떨어지면 누구 탓을 할 거야.

날 못 잡은 네 탓?

얼씨구.

순 제멋대로라니까. 남자는 비죽하니 웃으며 여자의 머리를 툭툭 두들겼다. 여자는 궁시렁대며 난간 아래쪽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손바닥이 묻힐 정도로 두꺼워진 눈바닥은 그만큼 차가웠지만 비교적 푹신했다. 남자 역시도 여자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눈이 찼으나 굳이 그것을 걷어내고 아래의 새까만 물을 마주할 생각은 없었음이다.

그리고 야경 보러 온 거 아니잖아.

오늘 유성우가 어쩌고 저쩌고, 안 그랬어? 남자가 가볍게 덧붙이곤 손에 들고 온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췄다. 몇 번 지직거리던 라디오가 이내 선명한 목소리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오늘 밤 서울을 비롯한 중위도 지방 부근에서 근 70년만의 유성우가 관측……. 여자가 잠시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리다가 배시시 웃었다. 별 떨어지는 거 보러 왔었지.

2

있잖아, 가끔 생각하는데. 별이 돼서 한 자리에 못박힌 채로 빙글빙글 돌며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지루할 걸.

왜, 괜찮을 것 같지 않아? 나중에 한 번 해보고 싶은데. 많이 외롭긴 하겠지만.

바보 같긴. 그게 네가 되고 싶다고 되는 거야?

그럼 뭘 해야 되는데?

음…… 죽은 사람이 별이 된다고들 하니까, 높은 데서 떨어져 보던가…… 아니. 진짜 하라는 건 아니고.

3



여자의 눈이 꾸벅꾸벅 감겼다 뜨이기를 반복했다. 졸리면 자도 되는데, 남자의 말에도 여자는 완강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난간 벽에 등을 기대고 모아 세운 무릎을 꼭 껴안았다. 유성우는 정각을 넘겨야 떨어진다고 했었나. 멍하니 생각하는 여자의 귓가로 라디오에서 흐르는 단조로운 어투의 말이 닿았다. ……소유물로 취급하기엔 그들의 모습이 인간과 너무 흡사한 탓일까요? 겉보기에는 인간과 거의 차이가 없는 이들은…….

여자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남자가 건네주는 보온병 뚜껑을 받았다. 뚜껑 안에 담긴 커피에서 모락모락 김이 났다. 술 마시고 커피 마셔도 되는 건가, 여자는 멍하니 생각했다. 술을 많이 마신 건 아니었다마는. ……한편 개중에는 인간을 닮은 안드로이드에게 사랑에 빠져……. 저건 언제까지 떠들 생각인 거야? 여자가 막 그런 생각을 한 때 꾹 닫혀 있던 남자의 입술 새에서 실없는 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그래?

우습잖아.

남자는 키득키득 새는 웃음을 수습하곤 덧붙였다. 기계를 사랑하게 된다니, 얼마나 웃겨. 바보도 아니고. 남자의 말을 듣는 여자의 표정이 묘해졌다. 입 안을 넘어 지나가는 커피가 그새 미지근해져 있었다. 여자는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없이 남자가 건네준 커피를 홀짝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다 남은 커피를 단숨에 목구멍 너머로 털어넣었다. 식은 커피가 유달리도 씁쓸했다.

왜 그래?

조금 전 여자가 남자를 향해 던졌던 질문을 그대로 던지는 남자는 제 연인의 기분 변화에 민감했다. 남자는 여자의 손에서 능숙하게 보온병 뚜껑을 빼내어 가져갔다. 커피 더 마실 생각은 없는데, 여자는 혹시 그가 한 번 더 뚜껑을 채워 내밀까 걱정했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온병 위로 뚜껑을 덮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여자가 허, 하고 웃었다. 하긴, 그럴 리가 없지. 여자는 스스로 멍청한 생각을 했다며 웃었다. 같이 있는 시간이 늘다 보니 돌아 버리기라도 했나. 애초에 그는…….

어디 아파?

아니.

그럼 왜 그래, 아까부터. 혹시 아까 내가 한 말 때문에 기분 나빴어?

무슨 말, 여자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가 이내 알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것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인 건지, 남자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입술을 뗐다. 열린 입술 새에서는 예상했던 대로 다급한 변명이 쏟아져 나왔다. 그, 내가 그런 뜻이 아니라──. 여자는 그 말들을 한 귀로 무심히 흘려보내며 멋대로 입을 열었다.

그 안드로이드를 사랑한 사람 말야.

어? 어.

그만큼 외로웠던 거 아니었을까? 기계란 걸 알고서도 마음에 담을 만큼.

솔직히, 네 기분을 상하게 할 생각은 없지만……. 이해 안 가.

왜?

외로운 게 싫었다면 다른 선택지도 있을 거 아냐.

예를 들면?

인간관계를 넓힌다던가. 여러 사람들을 만나 봐야지.

그래? 여자는 시린 손 끝을 입가에 대고 숨을 내쉬었다. 후, 하고 내뱉은 숨이 손가락 새로 빠져나와 뿌연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여자의 기다란 머리카락이 도시의 환한 밤을 등지고 맥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거렸다. 코 끝을 벌겋게 물들이는 바람은 시렸고 매서웠으며 도시 구석구석에서 몰고 온 듯한 케케묵은 냄새가 났다.

하지만 그렇게 사람을 새로 사귀어 본들, 언젠가는 멀어질 사람들인걸.

멀어질 걸 전제하고 사람을 만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해.

기계를 사랑하는 건 근본적인 해결책이고?

최소한 그들은 변하진 않잖아. 우리가 말을 바꾸지 않는 한 말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변하지 않는 건 있어.

예를 들면?

나 같은.

……뭐야. 너도 결국 나랑 똑같은 말을 하고 있으면서.



어? 남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는 말없이 제 숨에 덥혀진 손 끝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 네가 변하지 않는 건 당연해. 왜냐하면 네가…….

……네가, 여자가 잠시 말을 쉬었다. ……너는, 사람이 아니라. 기계니까.

4

있잖아, 멍청아. 나는 너무 지쳤어. 왜 지쳤는지 알아? 외로웠거든. 아무도 나를 똑바로 보는 사람이 없었거든. 배를 붙인 사람도 많았고 눈을 마주한 사람도 많았지만 나를, 나 자신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럼 날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소리가 되는 거잖아. 그렇다면 난 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하는 사람이야? 숨만 쉬는 고깃덩어리와 다를 바가 없지. 안 그래?

근데 그거 알아? 그런 날 사랑한다고 끊임없이 되뇌야 하는 너는 나보다 불쌍해. 불쌍하고 안타까워. 닳고 닳아 망가진 것을 품다니, 품고서 놓을 줄도 모르다니. 너같이 미련한 놈이 세상에 또 있을까. 하지만 네 잘못은 없어. 왜냐하면 네게 놓는 법을 가르치지 않은 건 나거든. 널 처음 만났을 때 내가 그랬어. 내가 너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만들었어. 진짜 연인처럼, 진짜 사람처럼. 네가 기계라는 것도 잊고 말야.

하지만 난 널 사랑하지 않을 거야. 네 말마따나 난 바보가 아니거든. 네 말은 안 믿어. 너와 나의 관계는 그런 일방통행이야. 그 정도에서 끝나는 거지. 하지만 그래, 응…… 그래도 날 제대로 봐 준건, 정말 너 하나뿐인 것 같아……. 그래서 내가 널 놓을 수 없는 거고.



5



넌 말하겠지. 난 기계가 아니야, 난 정말로 널 사랑해. 정말 그런지 볼까? 있잖아, 내가 별이 되는 게 어떤 기분일지 물었던 일 기억해? 어떻게 별이 되냐고 물었던 일은? 그리고 그 때 네가 뭐라고 답했더라? ……그래. 그렇게 답했어. 그럼 내가 지금 여기서 그 방법을 시도해 본다고 하면? 잡는다고? 아니, 넌 못 잡아. 만약 내가 잡지 말라고 하면? 당연히……? 하. 아니, 당연한 거 아냐. 말했잖아. 넌 기계라니까. 내가 하지 말라고 하면 넌 못 해. 그렇게 만들어져 있거든. 반대로 내가 하라고 하면 넌 뭐든지 해. 넌 그런 존재잖아. 말도 안 돼? 그래? 그럼 실험해 보자. 만약 정말 네가 사람이라면 날 잡을 수 있을 거 아냐. 그럼 난 네가 기계라는 가정 하에 이렇게 명령할게. ……날 잡지 마.





5.5

여자는 가늘게 웃으며 남자에게서 떨어졌다. 까만 두 눈은 남자에게 못박힌 채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자의 시선과 마찬가지로 남자 역시 그 자리에 못박힌 것 마냥 굳은 채로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그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붉은 녹이 묻은 난간 위를 향해 반쯤 몸을 눕혔다. 머리 아래의 불빛과 머리 위의 별빛이 서로 밝았다. 뚝, 낡은 난간이 부러지고 여자는 뒤로 곤두박질쳤다. 별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래로부터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여자의 머리카락이 나부끼며 정신없이 흐트러졌다. 그제서야 난간 너머로 고개를 내미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남자는, 울고 있었다.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지며 반짝반짝 빛났다. 여자가 웃었다. 등신.

6





농담이야, 쫄기는.



내가 그렇게 대책 없는 사람으로 보여? 여자는 힘없이 웃으며 난간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몸을 떼었다. 남자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가 뭔가에 막혀 있기라도 했던 것 마냥 숨을 턱 내쉬었다. 여자는 말 없이 웃으며 남자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짧은 순간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던 여자 본인의 죽음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여자는 뭔가를 털어내듯이 고개를 두어 번 젓고는 입을 뗐다. 머리 위에서 빛을 잃은 별들이 뿌연 구름 너머로 반짝거렸다.



하지만 이제 알겠지. 너는 기계야. 그리고 기계는 기계 이상이 될 수 없어.

…….

그러니까,



여자는 남자와 눈을 맞추며 무릎을 땅에 대고 앉았다. 여자의 서늘한 숨이 남자의 뺨 위로 닿았다. 마른 입술 위로 맞닿은 부드러운 살결 위로, 사람의 것이 아닌, 만들어진 온기가 흘렀다. 굴러 떨어지는 눈물마저도 찰칵찰칵 돌아가는 톱니바퀴들에 의한 것이라. 그러나 메말라 쩍쩍 갈라진 여자를 감싸고 어르기에는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여자는 남자의 입술 위로 제 것을 댄 채 가늘게 웃으며 들릴 듯 말 듯하게 속삭였다.



사랑해 줘.



한심하고, 정말로 한심하지만. 너만이라도, 계속해서. 여자가 느린 숨을 뱉으며 남자의 어깨 위로 머리를 떨궜다. 솜털 같은 별들이 눈이라도 된 것 마냥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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