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권이 한국 민주주의를 수십년 전으로 퇴행시키려 하고 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방침을 공론화하고, 사이버 공간에서 시민의 자유를 옥죄려 한다. 매카시즘을 신봉하는 극우 인사에게 공영방송 감독기구 이사장을 맡겨 논란을 자초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기어코 역사의 시계를 되돌릴 참인가.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이사장의 망언 릴레이가 가관이다. 고 이사장은 그제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의 방송통신위에 대한 종합감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가리켜 “변형된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했다. 지난 2일 국정감사에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공산주의자” “사법부가 좌경화” “국사학자 90%가 좌편향” 등의 발언을 쏟아낸 데 이은 것이다. 누가 그에게 개인이나 집단의 이념성향을 재단하는 ‘칼’을 쥐여주기라도 했나. 아무런 논리도 근거도 없는 막무가내식 매카시즘에 충격과 개탄을 금할 수 없다.
고 이사장은 이번 사태 이전에도 ‘문제적 인물’이었다. 박근혜 정권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공안검사 출신인 그를 끊임없이 ‘활용’해왔다. 고 이사장은 ‘통진당 해산 국민운동본부’ 상임위원장을 맡아 통합진보당 해산 청원서 작성·제출을 주도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는 특별조사위원회 비상임위원(새누리당 추천)으로 활동하며 세월호 유가족을 ‘떼쓰는 사람’에 비유했다. 정권의 신임을 얻은 그는 마침내 공영방송 MBC를 장악하라는 사명까지 부여받기에 이르렀다. 집권세력은 지금 고영주라는 한 시대부적응자를 통해 ‘청부 공안통치’를 시현하고 있다.
‘고영주 사태’는 그러나 정권의 취약성 또한 드러낸다. 모름지기 품격 있는 보수정권이라면 최소한의 상식과 지성을 갖춘 ‘정상적’ 보수 인사를 기용해서 국가를 운영해야 옳다. 고 이사장은 새누리당 의원들조차 날선 비판을 할 만큼 시민적 상식에 위배되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 인사다. 박 대통령이 고 이사장을 이대로 방치한다면, 자신이 ‘비정상적’ 극우 인사에게 통치를 의존해야 하는 궁박한 처지임을 고백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주권자의 48%가 지지한 야당 대선후보를 근거 없이 공산주의자로 매도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고 이사장은 당장 물러나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의 사퇴나 해임은 최소한의 조치에 불과하다고 본다. 고 이사장의 배후에서 그를 조종하고 정치적 이익을 노리는 세력을 가려내 함께 심판해야 한다.
고 이사장의 잇단 망언은 문 대표나 노 전 대통령이라는 특정인,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특정 정당에 대한 모독을 넘어서는 차원의 문제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빨갱이’라고 낙인찍는 행태야말로 보수세력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다. 그것은 또한 이념 갈등 조장, 사회 분열, 시민 감시로 열린 사회를 무너뜨리려는 적대 행위이기도 하다. 시민과 야당은 작금의 사태를 직시하고 비상한 결의로 민주주의 후퇴를 막아야 한다. 다시금 이런 언명을 해야 하는 시대가 부끄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