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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불씨가 된 권인숙의 '용감한 증언'

이름 박경아 등록일 16.06.07 조회수 802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되게 된 이 사람, 온 국민이 그 이름은 모르는 채 성만으로 알고 있는 이름 없는 유명 인사, 이 처녀는 누구인가?”

1986년 11월21일 인천지법 법정에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변호사 조영래(는 변론 요지를 낭독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로 현재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권인숙 교수(52)는 당시 피고인석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 그날 검찰은 권씨에게 징역 3년을 구형했다.


30년 전인 1986년 6월6일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대표적 인권탄압 사건으로 꼽히는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발생한 날이다. 사건 이틀 전 서울대 의류학과에 다니다 경기 부천시 의류공장에 위장취업했던 권씨(당시 22세)는 공문서위조 등 혐의로 부천경찰서에 연행됐다. 권씨는 위장취업한 사실을 모두 인정했지만, 형사 문귀동에게 변태적인 성고문까지 당했다.

이 사건을 그냥 덮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권씨는 공권력의 추악한 범죄를 폭로했다. 그날 이후 그는 이름 없이 ‘권양’으로만 불렸다.

당시 정부는 언론사에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부천사건’으로 쓰라는 보도지침까지 하달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이후 전두환 군사정권의 부도덕성을 밝혀 민주화운동을 촉발시켰다. 6월항쟁으로 민주화를 쟁취한 1988년 검찰이 불기소한 사건에 대한 재정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였고, 결국 문귀동은 유죄가 인정돼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수치를 무릅쓴 증언으로 역사를 움직였지만, 역사의 무게 또한 그의 삶을 바꿔놓았다. 1987년 가석방 후 1994년 뒤늦게 대학을 졸업한 그는 서른 살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2000년 클라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사우스플로리다 주립대에서 재직하다 귀국한 그는 여성학자로서 자신의 경험과 이론을 결합해 외부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14년 국내에서 유일하게 성폭력만을 전문으로 다루는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성폭력연구소 ‘울림’ 초대 소장을 맡아 1년간 활동하기도 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6일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여성의 용감한 증언으로 불거졌고, 시민·학생들과 전문가들이 연대하면서 분기점을 맞은 사건”이라고 말했다. 오 사무국장은 “30년 전 이 사건이 6월항쟁을 불러온 것처럼 ‘강남역 살인사건’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추모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한국 사회의 인권 향상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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