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G

  블랙미러 시즌1 3화에서는 ‘그레인’이라는 장치가 등장한다. 사람들은 이 장치를 몸에 삽입하여 벌어지는 모든 장면들을 기억한다. 극 중에서 주인공 '리암'은 ‘그레인’을 이용하여 계속 기억을 돌려보고, 확대 해석하고, 하나하나의 사소한 기억에 의미부여를 한다. 그 예로, 리암은 자신이 치룬 면접의 기억을 몇 번이고 돌려보고, 면접관들의 사소한 비언어적 표현이나 반언어적 표현까지 분석하며 자신의 합격 여부를 추론한다.

   원래 인간은 뇌에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기억하지 못한다. 자신이 몰입하고 있는 어떤 한 가지에 의해, 주변의 기억들은 편집되어 인식되지 못하기도 하고, 단순히 시간이 지나 망각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레인이 있으면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시간이 지난 후라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기억을 분석하다보면 상대방의 표정, 말, 행동과 같은 세세한 것들 하나하나까지 알게 됨으로써 인간관계의 유지를 어렵게 만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에 집착하는 세계에서는 사람들과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만약 친구 관계에서 다툼이 일어났다고 가정해보자. 일반적으로 우리는 다툼을 하고 화해를 함으로써 더욱 친해지기도 한다. 화해 이후에는 과거에 어떤 일로 싸웠는지까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레인이 있는 세계에서는 다툼이 일어났으면 그 원인이 뭐였는지, 얼마나 다퉜는지, 또 상대방의 사소한 잘못까지 다 세세하게 짚고 넘어갈 수 있다. 결과적으로 상대방이 나에게 했던 말들, 나를 화나게 했던 무언가를 평생 잊어버리지 않음으로써 관계가 지속될 수 없도록 문제를 유발할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본다면 인간은 ‘망각’을 통해 행복한 삶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인간에게 완벽한 기억만 있었다면, 과거에 집착하느라 현재의 행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구체적인 기억을 잃었지만 행복했던 감정, 기뻤던 일과 같은 단편적인 기억들을 머릿속에서 재구성하여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이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기억에 집착함으로써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과연 과학기술이 목표한 바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것으로 알 수 있듯이, 기술의 발달은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에 따른 부정적 영향은 예측불가하다. 이 드라마에서 ‘기억’이라는 주제로 단편적으로 제시했듯이, 인간은 과학 기술의 발달이 그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하여 깊이 있게 생각해보고 그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