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학년 2반

남을 배려하며 더불어 함께할 줄 아는 어린이

자신을 사랑하며 존중하는 어린이

스스로 계획하고 실천할 수 있는 어린이

  • 선생님 : 최진혁
  • 학생수 : 남 15명 / 여 14명

2모둠 (3)

이름 김건희 등록일 19.05.23 조회수 19
중공군은 그 후에 4차, 5차 공세를 무리하게 강행하였다. 중공군은 유엔군의 반격 직후 4차 공세(1951.1.27-4.21)를 단행하여 지평리, 원주 일대에서 많은 손실을 입으면서 격렬한 전투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유엔군이 작전의 주도권을 회복하여 3월 15일 서울을 탈환하고 여세를 몰아 3월말에 38선을 회복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3단계 (국가기록원 - 6.25 전쟁, 국가기록원)

한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과 불의의 조우로 인하여 후방이 차단된 상황에서 위기를 맞았으나, 이때 갑자기 중공군이 공격을 멈추고 청천강 북쪽 적유령산맥으로 이동하여 자취를 감춤으로써 일시적으로 정적이 감돌았다. 중공군이 기만전술과 유인전술을 운용한 것이었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전황을 오판하여 중공군의 참전목적과 작전기도를 정확히 간파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제8군의 재공격 준비가 완료되자 '11.24 최종공세'(일명 크리스마스공세)를 명령하였다. 이때 전선의 상황은 12개국의 유엔군이 참전 중이었고 정주-영원-장진호-혜산진-합수-청진선을 점령하여 한 · 만 국경선을 지척에 놓고 있었다. 하지만 유엔군은 이번에도 중공군의 2차 공세(1950.11.25-12.24)에 맞부딪쳐 큰 손실을 입었으며 11월 30일을 기하여 모든 부대가 무질서하게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유엔군은 비로소 중공군이 대대적으로 개입한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으며, 반격을 개시한 지 71일 만에 철수작전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철수에 철수를 거듭하였다.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은 12월 4일 평양에서 철수하여 12월 말 38선 부근으로까지 철수하였다.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과 한국군 제1군단은 중공군에게 퇴로가 차단되어 부득이 흥남부두에서 부산으로 해상 철수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3단계 (국가기록원 - 6.25 전쟁,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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