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조선, 민중은 힘들다
지시에 따르지 않는 못자리는 짓밟혀 부서지고, 규칙적으로 심지 않은 어린 벼는 뽑고 다시 심게 하였다. …… 농민의 의욕과 무관하게 정해진 품종만 재배하게 하였다. 수확기에 이르러서는, …… 벼를 탈곡 조제할 때 멍석을 깔지 않으면 벌금을 내게 한다는 명령이 강제로 집행되었다.
- 《조선 농정의 과제》, 《한국 근현대 탐사》에서 재인용
농업을 발전시킨다며 재배를 강요한 '신품종' 벼는 일본인의 입맛에 맞는 벼였다. 생산량을 늘릴 수 있다며 재배를 강요한 '신품종' 면화는 일본 공장에서 쓰이는 미국 품종 면화였다. 신품종 벼와 면화를 재배하라는 헌병 경찰이나 면사무소 직원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농민은 처벌받았다.
일제는 '사유지임을 입증하지 못하면 국유지로 삼는다.'는 원칙 아래 황실과 관청 소유의 토지를 조사하였으며, 병합 이후에는 전국의 모든 토지를 대상으로 토지 조사 사업을 벌였다.
서대문 형무소일제는 수탈을 강화하기 위해 일제에 맞선 모든 투쟁을 강경하게 탄압하였다. 사진은 항일 운동에 나선 이들을 체포하여 고문하고 감금하던 서대문 형무소이다.
일제는 농민들의 땅을 빼앗아 막대한 국유지를 만들어 낸 뒤, 일본인들에게 헐값에 팔았다. 지주의 소유권은 크게 강화하면서도 오랫동안 농민이 누려 온 경작권이나 영구 소작권은 인정하지 않았다.
일제는 조선 사람의 기업 설립도 제한하였다. 조선에 회사를 세우려 할 때에는 누구나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총독의 명령에 따라 회사를 해산시킬 수도 있다는 내용의 회사령(1910)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조선을 발전시킨다는 일제의 주장은 거짓이었다. 조선인은 일본에 원료나 식량을 공급하고, 일본이 만든 공산품을 사 쓰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일부가 되어 버린, 일본인을 위해 일방적으로 희생되어야 했던 조선, 그 참혹한 정황을 신채호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어지간한 상업가들은 일본의 제조품을 조선인에게 매개하는 중간인이 되어 차차 자본 집중의 원칙에서 멸망할 뿐이요, 대다수 인민, 곧 일반 농민들은 피땀을 흘려 토지를 갈아 그 일 년 내내 소득으로 제 한 몸과 처자의 호구거리도 남기지 못하고 우리를 잡아먹으려는 일본 강도에게 갖다 바쳐 그 살을 찌워 주는 영원한 소나 말 같은 노예가 될 뿐이요, 끝내는 그 소나 말 같은 노예 생활도 못 하게 되어 일본 이민이 해마다 빠른 비율로 증가하여 딸깍발이 등쌀에 우리 민족은 발 디딜 땅이 없어 산으로 물로, 서간도로 북간도로 시베리아의 황야로 몰리어 가 아귀(餓鬼, 굶주린 귀신)부터 유귀(游鬼,떠돌이 귀신)가 될 뿐이며…….
- 신채호, 〈조선 혁명 선언〉
토지 조사 사업 때 사용된 토지 측량 기구
토지 조사 사업전국 모든 토지의 소유권, 가격, 생김새를 조사하고, 새로운 토지 문서를 배부하는 사업이었다. 일제는 자신이 주인임을 입증하지 못한 토지,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이용하거나 소유한 토지 가운데 상당 부분을 국가 소유로 바꾸었다. 소유권은 없지만 대를 이어 경작권을 유지해 온 농민들은 지주와 계약을 통해서만 토지 경작권을 얻을 수 있는 새 제도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었다.
광복 공원경상 북도 풍기에 있는 대한 광복회 기념 공원이다. 의병 출신 인사와 계몽 운동 관련자들이 함께 조직한 대한 광복회는 국권을 회복하여 공화정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민족 대표 독립 선언(기록화)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를 자임하고 나선 33인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 선언식을 거행하는 모습이다. 실제 참가자는 29명이었다.
대투쟁을 준비하다
침묵의 질서가 강요되던 1910년대에도 항일 투쟁은 계속되었다. 농민들은 토지를 빼앗으려는 일제에 맞섰다. 농민과 소상인 들은 시장세와 연초세(담뱃세) 등 늘어나는 세금에 저항하였으며, 청년이나 지식인 들은 사립 학교와 서당, 야학에서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교육 활동을 벌였다. 교사와 학생이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항일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의병 운동이나 계몽 운동에 참가하였던 사람들 가운데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투쟁을 이어 간 이도 많았다. 임병찬 등은 비밀리에 대한 독립 의군부를 조직하여 의병을 재조직하려 애썼고, 대한 광복회는 군자금을 모아 해외에 무관 학교 설립을 추진하는 한편, 친일파 처단 활동을 전개하였다.
나라 밖에서 민족 운동을 벌인 이들도 많았다. 조선인이 많이 살던 간도와 연해주는 해외 독립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간도의 용정촌과 명동촌, 연해주의 신한촌, 상하이의 외국인 거주 구역 등이 대표적인 곳이었다.
3·1 운동,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
나라 안팎에서 이어진 항일 운동은 1919년 3·1 운동으로 폭발하였다. 1917년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러시아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이 민족 자결의 원칙을 선언한 것이 계기였다.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신한 청년당은 독립 청원서를 작성하여, 파리에서 열리고 있던 강화 회의에 제출하였다. 미국에서는 대한인 국민회가 미국 정부를 대상으로 외교 활동을 벌였고, 일본에서는 조선인 유학생들이 일본과 국제 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할 것을 결의하고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였다.(2·8 독립 선언)
나라 밖의 이 같은 움직임은 국내에도 알려졌다. 민족 대표를 자처하고 나선 손병희와 이승훈 등 종교계 인사 33인은 독립 선언식을 치르고, 일본에 조선 독립을 청원하기로 하였다. 청년 학생들은 일본에 청원하기보다 대규모 집회나 시위를 통해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분명히 보여 주려고 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과 평양을 비롯한 전국 10여 개 도시에서 독립 선언식이 열렸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써 세계 만방에 고하야 인류 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차로써 자손 만대에 고하야 민족 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노라.
- 기미 독립 선언서
'대한 독립 만세!'의 함성이 천지를 진동시켰고, 태극기의 물결이 바다를 이루었다.
3·1운동 구속자의 직업별 분포박은식의 《한국 독립 운동 지혈사》에 따르면, 두 달 동안 7,509명이 학살되고 1만 5,849명이 부상당했으며, 4만 6,306명이 감옥에 갇혔다. (출처 : 성대경, 〈일제하 식민지 시대의 민족 운동〉)
3·1 운동의 시기별 시위 분포3·1 운동은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되어 두 달여 동안 전국적으로 전개된 운동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태극기 목각판3·1 운동 당시 만세 시위에 사용할 태극기를 대량으로 찍어 내기 위해 만든 목각판이다.
전국적·거족적 독립 운동으로 이어지다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대규모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두려움에 빠졌다. 일제는 경찰과 군인을 동원하여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였다.
그러나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는 갈수록 커져,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3월 10일경에는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시위가 잇달았으며, 뒤이어 소규모 도시와 농촌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만세 운동은 나라 밖에서도 이루어졌다. 서간도의 삼원보와 북간도의 용정이 앞서고,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이 그 뒤를 이었다. 이곳 한인들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집회와 시위를 벌였으며, 신한촌의 한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여러 나라 영사관에 조선 독립의 뜻을 전하였다. 미국 내 대한인 국민회 역시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세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된 것은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가 뜨거웠고, 유관순 같은 청년 학생이나 지방의 지식층이 민의 독립 의지를 잘 묶어 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청년 학생과 종교인이 주로 시위에 참가하였으나, 3월 말 이후에는 농민과 노동자들이 시위의 중심을 이루었다.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시위를 조직하고 지도하는 만세꾼도 생겨났다. 운동은 만세를 부르거나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하는 등 대부분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은 갈수록 잔혹해져,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하였으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총검을 휘둘렀다. 다음은 수많은 탄압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1919. 4. 16.) 그들(선교사들과 외교관)은 이야기로 듣던 것보다 훨씬 더 참혹한 장면을 목격하였다. (제암리) 교회 터에는 재와 숯처럼 까맣게 타 버린 시체뿐이었고, 타 들어간 시체 냄새로 속이 메슥거릴 정도였다.
(1919. 4. 19.) 그들이 방문한 다섯 마을의 상황은 시체가 (땅에) 묻혀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제암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지역에서만 16개 마을이 전멸되다시피 하였다.
- 노블(M. W. Noble)이 쓴 일기, 〈3·1 운동, 그날의 기록〉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이 계속되자, 시위대 가운데 일부는 군인과 경찰을 공격하고, 체포된 동지를 구하기 위해 경찰서나 헌병 사무실을 습격하였다. 아예 처음부터 일제의 통치 기관을 공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국경 부근에서는 만세 시위가 무장 독립군의 활동으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3·1 운동 시기 시위가 일어난 지역4월 말까지 1,500여 회의 시위가 전국 229개 부·군(전체 부, 군의 수는 232개)에서 일어났다.
유관순(1902~1920)3·1 운동 당시 이화 학당 학생이었으며, 3·1 운동으로 휴교되자 고향에 내려와 아우내 장터의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 중 부모가 일본 헌병에 의해 학살되었으며, 자신은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감옥살이를 하던 중 숨졌다.
제암리 사건(1919. 4. 15.)일본 군인과 경찰이 수원 제암리 주민을 교회에 모아 놓고 총을 쏘고 건물에 불을 질러 28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수원 주민의 만세 운동 참가를 보복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만행으로, 인근 민가에 대한 방화로 이어져 건물 31호가 불에 탔다. 수원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선교사들이 불에 탄 제암리 교회와 희생자 가족의 모습 등 당일의 일을 사진과 기록으로 정리하여 미국 언론에 폭로하였다.
3·1 운동에서 임시 정부로
독립을 요구한 시위는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두 달 만에 수그러들었다. 수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쟁취하지 못하였으나, 3·1 운동은 결코 실패로 기억될 투쟁이 아니었다. 3·1 운동은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고,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분명히 보여 주었다. 또한 독립을 쟁취하려는 의지가 높아지면서 무장 독립군 활동이 활기를 띠고, 각계 각층에서 항일 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3·1 운동은 한국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일제의 무단 통치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강경하고 폭력적인 통치 방식을 바꾸도록 하였다. 이제 한국인들은 이전보다 많은 권리를 누리게 될 터였다. 3·1 운동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이 함께 싸워야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자각과, 대중을 조직하여 계획적으로 투쟁을 이끌 지도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생겨났다.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모아 조직적으로 독립 운동을 벌일 새로운 지도부, 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조직된 것은 3·1 운동이 남긴 커다란 성과였다.
1919년 당시 임시 정부 조직각 지역 대표로 구성되는 임시 의정원은 일종의 국회라고 할 수 있다. 사법부는 실제 내용을 담기 어려워 한때 없어지기도 하였으나, 권력 분립의 정신을 꾸준히 유지하였다.
대한 민국 임시 정부, 민주 공화국을 선언하다
1919년 2월, 연해주의 한인들은 대한 국민 의회를 조직하였다. 4월에는 국내와 중국 상하이에서도 임시 정부가 구성되었다. 서울에서는 종교계 대표가 중심이 되어 임시 정부(한성 정부)를 구성하였다.
상하이에 모인 독립 투사들은 출신 지역별로 대표자를 뽑은 다음 임시 헌장(헌법)을 제정하고, 13도 대표자 회의를 열어 임시 의정원(국회)과 임시 정부를 구성하였다.
세 곳의 임시 정부는 같은 해 9월 상하이에 본부를 둔 대한 민국 임시 정부로 통합되었다. 임시 정부에는 해외의 독립 운동가 대부분이 참가하여 단결된 모습으로 독립 투쟁을 벌이자고 다짐하였다.
제1조 대한 민국은 민주 공화제로 한다.
제2조 대한 민국은 임시 정부가 임시 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한다.
제3조 대한 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
- <대한 민국 임시 헌장>, 1919. 4.
어느 임시 정부도 대한 제국 황실을 중심으로 구성된 망명 정부가 아니었다. 3·1 운동이 지역과 계층을 뛰어넘어 진행되었듯, 임시 정부는 모든 인민이 평등하고, 주권이 인민에게 있음을 분명히 한 민주 공화정을 지향하였다. 수천년을 이어 온 군주제가 끝나고 민이 주인이 되는 새 시대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인가?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수립
연해주 정부와 상하이 정부 사이에 단일 정부 구성을 위한 협의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한성 정부가 선임한 각료를 중심으로 정부를 새로 조직하고, 두 곳의 정부를 모두 해산하기로 합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부를 임시 정부 무장 독립 투쟁을 지도하는 데 유리한 연해주에 두어야한다는 주장과, 보다 안전하고 외교활동에 유리한 상하이에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 진통을 겪기도 하였다. 1919년 9월,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으로하고 이동휘를 국무 총리로 하는 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상하이에서 출범하였다.
이승만(1875~1965)
청년 시절 독립 협회 활동을 하다가 투옥된 적이 있는데, 1904년 미국 유학을 떠난 뒤 주로 미국과 국제 연맹을 대상으로 외교 활동을 하였다. 1919년에 한성, 상하이 임시 정부에서 정부 대표로 추대하였는데, 1921년 국제 연맹에 위임 통치를 요청한 사실이 드러나 대통령 직에서 물러났다. 1945년에 귀국한 뒤 대한 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