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이란 적의 침입을 방어하고 영토를 보존하기 위해 산 위의 능선이나 골짜기를 따라 흙이나 돌을 쌓아 만든 방어 시설을 말한다. 무주 적상산성은 적상산의 분지 절벽을 이용하여 쌓은 대표적인 석성이다. 이 산성의 축성시기는 고려 말 최영(崔瑩)과 조선 초기 최윤덕(崔潤德)의 축성 건의 등을 통해 축성된 고려 후기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승람》, 《적성지》 등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성종 12년(993)과 현종 1년(1010), 현종 10년(1019) 등 거란의 침입 때마다 인근 여러 고을의 백성들이 이곳으로 난을 피했던 것으로 보아 고려 말 이전에 이미 산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주현적상산성조진성책》에 의하면 성 둘레는 5,525파(把) 30여리 이며, 4대문을 갖추고 있다. 4대문의 규모는 북문(무주문, 茂朱門)과 서문(용담문, 龍潭門)은 2층 3간이며, 남문(장수문, 長水門)은 1간, 동문은 2층 1간인데, 기울어 형태가 없다고 한다. 또한 사각(史閣)과 포쇄청, 보경사, 창고 등이 있었으며, 별장 1명, 참봉 2명, 승장 1명, 수복 12명, 군병 84명, 승병 28명을 두어 이곳을 지켰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적상산성의 수축(修築)이 논의 되었으며, 광해군 6년(1614) 사고를 창건하고, 광해군 10년(1618) 실록 중 일부를 봉안하였다. 이후 인조 18년(1640) 북문을 넓히고 영사를 확장하였으며, 이듬해 사각 옆으로 선원각을 건립하고 왕실 족보인 《선원록》을 봉안하였다. 또한 인조 23년(1645) 승병들의 숙소문제로 호국사(護國寺)를 창건하는 등 산성을 수축하고 운영했다. 그러나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사고가 폐지되면서 그 기능을 잃었다. 현재 성벽은 무너져 원래의 모습은 볼 수 없으나 약 3,000m의 성벽과 북문지, 서문지, 사고지 등이 남아 있어 당시 상황을 추측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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