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6반

서로 사랑하고 예의바른 어린이^0^

4학년 6반
  • 선생님 : 장수경
  • 학생수 : 남 11명 / 여 12명

남색모둠자료

이름 남색모둠10 등록일 19.05.22 조회수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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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원 광한루는 조선시대 황희(黃喜)정승의 선조인 황감평(黃鑑平)이 고려 때 무신정변(武臣政變)을 피해 남원에 낙향하여 ‘일재(逸齋)’라는 조그마한 서실(書室)을 지은 데서 비롯했다. 이 건물은 황희정승이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으로 처음엔 광통루(廣通樓)라 불렀다고 한다. 광한루라는 이름이 붙여진 시기는 1444년(세종26) 이후이다. 하동부원군 정인지는 누각에 올라 “호남의 승경이로다. 달나라에 있는 궁전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가 바로 이곳이 아닌가?”라고 감탄하였고, 이때부터 이름을 광한루로 바꿔 불렀다.
그러나 광한루는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구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 1626년(인조4) 남원부사 신감(申鑑)이 원래의 크기로 복원하였다. 1855년(철종6)에는 남원 부사 이상억(李象億)이 누각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호남제일루(湖南第一樓)’라는 현판을 크게 써서 걸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일제의 문화 말살 정책에 따라 누각 마루 위가 뜯겨 재판소와 감옥을 만드는 데에 쓰였다. 재판소와 감옥을 만들기 위해 징발된 돌기둥과 나무 기둥은 문고리를 설치한 흔적으로 군데군데 패인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광복 이후 재판소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고 지역 유지들이 다시 징발된 재료들을 가져다가 수차례 크고 작은 보수를 하면서 누각을 관리하였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누마루 주변에는 난간을 둘렀고 기둥 사이에는 4면 모두 문을 달아 놓았는데, 여름에는 사방이 트이게끔 안쪽으로 걸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또한 누의 동쪽에 있는 앞면 2칸·옆면 1칸의 부속건물은 주위로 툇마루와 난간을 둘렀고 안쪽은 온돌방으로 만들어 놓았다. 뒷면 가운데 칸에 있는 계단은 조선 후기에 만든 것이다. 남원 광한루는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81호로 지정되었다. 2000년 문화재청에서 남원 광한루 실측 조사를 실시하였고, 그 결과 광한루 보수의 필요성이 인정되어 2001년부터 전면적인 해체 작업에 들어가 2003년에 보수를 완료하였다. 남원 광한루는 호남의 제일가는 누정답게 조선 전통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고 있다. 대부분의 누각이 천혜의 경승지에 위치해 있는 것에 반해 남원 광한루는 인공적인 특성이 두드러진다.
조선시대 애정 소설의 백미인 「춘향전」의 무대가 남원 광한루인 것을 보아도 그 빼어난 승경을 짐작할 수 있다.
  • 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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