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학년도 신입생 국어 과제 참고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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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홍진희 | 등록일 | 20.03.05 | 조회수 | 34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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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엄마의 말뚝2 전문입니다. 타인의 저작물이므로 부득이 복제하지 못하도록 올립니다. 독서에 어려움이 있어라도 양해 부탁합니다. 엄마의 말뚝․2 박완서
여지껏 우리집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불상사는 하나같이 내가 집을 비운 사이에 일어났다고 나는 믿고 있다. 내 경험에 의하면 집을 비우되 몸과 마음이 함께 떠났을 때, 그러니까 집 걱정은 조금도 안하고 바깥 재미에 흠뻑 빠졌다가 돌아왔을 때 영락없이 집에선 어떤 사고가 기다리고 있었다. 첫애 젖을 떼고 났을 무렵이었다. 애 기르는 일의 가장 어렵고 손 많이 가는 고비에서 놓여났다는 해방감에서였는지 동창계 모임에서 느긋하게 화투판에 끼어 들게 되었다. 층층시하 핑계, 젖먹이 핑계로 어깨 너머로 잠깐잠깐씩 구경이나 하다가 남 먼저 자리를 뜨던 화투판에 처음으로 끼어 들고 보니, 선무당이 사람잡는다고 재미도 재미려니와 손속까지 나는 바람에 그만 날 저무는 것도 몰랐다. “재 좀 봐. 시어머니 모시고 사는 애가 이렇게 늦게 들어가도 무사하려나 몰라” 누군가의 귀띔으로 나는 퍼뜩 정신이 났다. 그때도 나는 어쩌다 하루쯤 밖에서 친구들하고 어울리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해서 그걸로 시어머니한테 주눅이 들 만큼 순진하진 않았다. 그것보다는 온종일 한번도 집 걱정을 안했었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서 매우 기묘한 느낌을 맛보았다. 첫애라 더했겠지만 자나깨나 한시반시 마음을 놓지 못하고 골몰했던 엄마 노릇에서 그렇게 완벽하게 놓여나게 한 게 다름아닌 화투놀이의 매혹이었다는 게 문득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뒤미처 매우 기분 나쁘게 섬뜩한 느낌으로 내가 경험한 매혹 속에 악의(惡意)에 찬 속임수가 숨겨져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음의 트릭 따위가 아닌 운명의 마수같은. 나는 곧 그런 생각의 터무니없음을 스스로 알아차렸지만 섬뜩한 느낌만은 구체적인 물건의 촉감처럼 생생했다. 나는 그 기분 나쁜 것을 떨어버리기 위해 애써 그날의 수입을 계산하려 들었다. 반찬값은 번 것 같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즐거웠는데다가 덤으로 수입까지 잡았으니 어디냐 싶은 치사한 계산으로 기분을 돌이키려 들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 섬뜩한 건 예감이었다. 내가 집을 비운 동안에 아장아장 걸음마를 하던 첫애가 끓는 물주전자를 들어엎어 다리에 심한 화상을 입고 병원에서 응급조치를 받고 있었다. 차마 못 들어 줄 소리로 신음하고 있는 그애 옆에서 같이 울고 있던 시어머님은 나를 보자 온종일 어디 갔다 이제 오느냐고 나무라기보다는 우선 당신이 애 잘못 본 변명부터 하시려고 했다. “글쎄 눈깜빡할 사이에 이런 일이 일어났구나. 저녁나절 출출하길래 저 하나 나 하나 먹으려고 달걀을 두 개 삶아서 주전자째 들여놓고 소금을 가지려 돌아서려는데……” 시어머님은 말끝을 못 맺고 어린애처럼 입술을 비죽대더니 아이고, 아이고, 숫제 통곡을 하시는 것이었다. “제 탓이에요” 나는 떨리는 소리로 겨우 그렇게 한마디했다. “애 본 공은 없다더니……” “제 탓이라니까요” “선생님이 그러는데 덧나지만 않으면 험은 안 난다더라. 야안 살성이 나 닮았으니까 덧나진 않을 게야. 나도 어려서 꼭 야아처럼 왼발로 끓는 국그릇을 들어엎어서 어찌나 몹시 데었던지 버선을 벗기니까 살가죽이 홀라당 묻어나더란다. 그때야 덴 데 바르는 약이라면 간장밖에 더 있었냐 참 옛날 고렷적 얘기지. 간장 몇번 발라준 것밖에 없다는데도 감쪽같이 아물었으니까 살성 하난 본받을 만하지. 요새야 약이 좀 좋으냐. 참 주사꺼정 맞았다” 시어머님은 그런 얘기를 내 눈치 봐가며 띄엄띄엄 했기 때문에 끝없는 수다처럼 견디기 어려웠다. 그런 소리가 내 아이가 지금 혼자서 겪고 있는 고통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나는 나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있게 된 내 아이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당면한 엄청난 고통 중 털끝만한 부피도 덜어 가질 수 없다는 게 부당해서 곧 환장을 할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서로 남남끼리요, 사람도 결국은 외톨이라는 걸 받아들이기엔 그 아이는 너무 작고 어렸다. 그래서 더욱 나는 그 아이에 대한 온종일의 방심 끝에 내가 체험한 그 기묘한 섬뜩함에 어떤 의미를 붙이려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섬뜩함을 내 아이와 나 사이에만 있는 눈에 보이지 않되 분명히 있긴 있는, 신비한 끈을 통한 계고(戒告)였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계고라는 걸 진작만 깨달았어도 일을 안 당할 수도 있었으련만…… 나는 내 미련함을 깊이 뉘우치고 다시는 미련하지 않을 것을 별렀다. 그때 내 아이의 화상은 시어머님의 살성을 닮았던지 약이 좋았던지 간에 조금도 험집을 안 남기고 곱게 아물었다. 그후 두 살 터울로 아이를 넷이나 더 낳아서 도합 5남매를 기르려니 어찌 화상뿐이었으랴. 골절상, 낙상, 교통사고, 약물중독 등 가슴이 내려앉고 하늘이 노래지는 사고를 수없이 겪게 됐고 처음 사고가 그랬던 것처럼 번번이 내가 집에 없는 사이에만 일어났다. 집안일에 대한 철저한 방심 끝에 오는 섬뜩한 느낌도 여전했으나 모든 일이 그렇듯이 그것도 타성이 붙으니까 조금씩 미심쩍어지기 시작했다. 그게 정녕 예감이나 계고라면 사고보다 미리 와야 마땅하련만 시간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거의가 다 나중에 왔음을 알 수 있었고 사고마다 영락없이 내가 집을 비운 사이에 일어났다고 치더라도 내 핏줄과 관계없는 사고―시어머님의 낙상, 보일러 폭발사고, 도난사고 등도 역시 나 없는 사이에만 일어날 건 또 뭔가. 신기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집안의 안전을 다스리는 사람이 없는 사이를 틈타는 게 사고의 속성일 뿐이었다. 그 섬뜩한 건 핏줄 사이에만 있는 신비한 끈과 관계가 있다기보다는 내 철저한 방심(放心)과 더 깊은 관계가 있음직했다. 집안일에 대한 일시적인 방심은 나 자신만의 일이나 재미에 대한 몰두를 뜻하기도 했고, 그런 모처럼의 이기(利己)에서 헤어났을 때, 한 집안의 안주인 노릇만을 숭상했던 평소의 의식이 느낄 수 있는 가책과 당황이 그런 섬뜩한 이물감으로 와 닿았다고 생각하는 게 훨씬 지당하고도 속 편했다. 내적인 심리상태와 외부의 현상 사이에 있다고 가정한 어떤 초월적인 힘의 작용에 대해 이런 온당하고 상식적인 해석을 붙이고 나니 섬뜩한 느낌의 영험도 차츰 무디어지기 시작했다. 실상 이미 타상화된 섬뜩한 느낌은 허탕치는 일이 더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애들은 이제 다 자랐고 시어머님은 돌아가셨고 집도 마치 비우는 것을 목적으로 지은 것 같은 아파트로 옮겼으니 집을 비우는 일은 나에게 다반사가 되었고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 만한 건덕지가 집안에 남아 있을 리도 없었다. 식구들이 사고를 저지를 수 있는 무대는 이제 집안이 아니라 집밖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섬뜩한 느낌이 영험을 상실한 후에도 나는 계속해서 그것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것은 집을 비울 때마다 번번이 오는 헤픈 느낌이 결코 아니었다. 집을 비우되 반드시 몸과 마음을 함께 비울 것을 전제로 했다. 몸을 비우는 일은 임의로 할 수 있지만 마음을 비우는 일은 그렇지가 않았다. 집밖에서도 늘 집안일과 집안 걱정에 쫓기는 게 여편네 팔자였다. 또 집안일에 대한 철저한 방심이 사고의 원인이라는 내나름의 미신이 밖에서 일부러라도 자주 집안일을 생각하거나 걱정하게 했고 때로는 전화질 같은 행동으로 그걸 나타내기도 했다. 그렇건만도 어쩌다가 바깥 재미에 빠져 집 생각을 한 번도 안하는 수가 있고 그럴 때마다 섬뜩한 느낌과 함께 제정신이 들었다. 나는 그 섬뜩함 자체를 사랑했다. 그 섬뜩함은 일순 무의미한 진구덩의 퇴적에 불과한 나의 일상, 내가 주인인 나의 살림의 해묵은 먼지를 깜짝 놀라도록 아름답고 생기 있게 비춰주기 때문이다. 그 요술 같은 조명효과 때문에 나는 마치 첫무대에 서는 배우처럼 가슴 울렁거리며 새롭고도 서툴게 나의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가 있었다. 비록 일순의 착각에 불과한 것이더라도 권태가 행복처럼, 먼지가 금가루처럼 빛나는 게 어찌 즐겁지 않으랴. 뜻밖의 삶의 축복이었다. 그뿐 아니라 불길한 것의 감지 능력이 거의 백발백중이었을 소싯적의 그 기분 나쁜 섬뜩한 느낌 또한 나는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지금의 나의 안주인으로서의 당당한 권세―일종의 터주대감 의식도 실은 그 시절 그 느낌에 근거하고 있을 것이다. 나만 없어봐라, 이 집안꼴이 뭐가 되나? 기껏 3박4일쯤의 여행에서 돌아와 신나게 총채를 휘두르며 이런 푸념을 하는 것도 실은 그 시절의 영광의 헛된 반추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럴 땐 나 없는 동안에 잘못된 건 장식장 선반의 부우연 먼지와 방구석에 쑤셔박아 놓은 양말짝이 고작이라는 게 오히려 섭섭할 지경이었다. 그래서도 더더욱 나만 없어봐라는 상투적인 공갈을 되풀이했다. 이런 나를 아이들은 하여튼 우리 엄마는 못 말린다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저희끼리 킬킬거리곤 했다. 물론 언제나 이 구질구질한 살림걱정 안하고 살아보냐는 푸념을 나라고 안하는 바는 아니다. 나만 없어봐라?보다 더 자주 써먹는 소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입술 끝에 달린 엄살일 뿐 내 속셈은 어디까지나 내 살림의 종신집권(?)이다. 그날은 오래간만에 즐거웠다. 친구의 농장에 닿기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오후부터 폭설로 변했다. 동구밖 거목들이 동양화 속의 원경처럼 꼭 필요한 고결한 몇 가닥의 선으로 단순화되면서 아득하고도 부드럽게 흐려 보였다. 어린 과수(果樹)들은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간간이 잔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뚝뚝 비명처럼 들렸다. 벽난로 속에서 청솔가지가 싱그러운 냄새를 풍기며 활활 타올라 방안을 훈훈하게도 정겨웁게도 했다. 바로 유리문 밖 뜨락 앵두나무엔 눈꽃이 탐스럽게 만개해서 황홀했다. 선경(仙境)이었다. 비록 제 차가 있다고는 하지만 친구 남편이 아침저녁 서울 한복판에 있는 그의 사무실까지 출퇴근하기에 불편이 없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그런 선경이 있을 줄이야. 지난 봄 뜨락에 앵두꽃이 만개했을 때도 나는 친구의 농장에 초대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딴 친구들도 여럿 함께여서 뜨락과 과수원 길엔 그들이 타고온 승용차가 즐비했고 만발한 복사꽃 사이론 따라온 아이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가득했었다. 그때 이 농장은 이같은 도시의 여파(餘波)와 잘 어울려 마치 도시 근교의 관광농장처럼 들뜬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의 농장과 지금의 농장을 마치 별개의 두 개의 농장처럼 각각 다른 느낌으로 좋아하고 있었다. 나에겐 그 둘이 별개의 것이기 때문에 거리감도 물론 달랐다. 나는 마치 난리를 피해 천신만고 계룡산을 찾아든 정감록의 신도처럼 평화롭고 달콤하게 피곤했다. 청솔가지가 활기있게 타면서 내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나무도 환성(歡聲)을 지를 줄 안다고 생각했다. 창밖에선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어 레이스 커튼이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느낌은 우리가 앉은 방안이 전체적으로 어디론지 한없이 떠오르는 것 같은 환각으로 이어졌다. 방이 움직여 어디로 가고 있다면 그건 공간적인 이동이 아니라 시간적인 이동일 거라는 생각이 나를 그 이동에 고분고분 순종케 했다. 푸짐한 눈은 인간의 발자국은 물론 인간의 업적까지를 말끔히 말살해서 온 세상을 태곳적으로 돌려 놓고 있었다. 친구가 달덩이같이 생긴 유리병에 든 빨간 액체를 크리스탈 잔에 따랐다. “맛봐. 앵두주야” 앵두주는 루비처럼 고운 빛으로 투명했다. “얘, 지어 보니 농사처럼 좋은 것은 없더라. 저 앵두나무도 뜰에 그냥 화초삼아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더라구. 어떻게 다부지게 열매가 여는지 글쎄 몇 그루 안되는 나무에서 앵두를 서 말이나 땄지 뭐니, 일 봐주는 집 아이들이 들며나며 실컷 따먹고, 나도 친척들 이랑 그이 친구들이랑 구경오는 손님마다 자랑삼아 따보내고 했는데도 말야. 서울 집에서 포도주 담그면 병 갖고는 어림도 없어서 숫제 큰 독을 묻고 술을 담갔으니까 실컷 마셔” “얘는 누굴 모주 취급하고 있어” 그러면서도 나는 그 달콤하고도 아름다운 술을 홀짝홀짝 겁없이 들이켜고 있었다. 봄에서 겨울, 앵두꽃에서 눈꽃 사이 이 아름다운 술을 빚을 수 있는 새빨간 열매를 서 말, 아니지 다섯 말쯤을 그 작은 키에 다닥다닥 매달고 서 있었을 앵두나무의 고달픈 시기를 생각하며 나는 찬탄을 주체못하고 있었다. “글쎄 그 농사라는 게 말이지” 친구가 또 농사자랑을 할 기세였다. 나는 앵두꽃 필 무렵의 친구 초대가 이 집의 집들이 잔치를 겸한 거였다는 게 생각나서 슬며시 비꼬고 넘어가려 했다. “너 농사 몇해나 지어 봤다고 자랑부터 하니? 남 샘나게. 좀더 두고 쓴맛 단맛 다 보고 나서 얘기하자. 한탄도 좀 들어야 생전 콘크리트 닭장 못 면하는 나 같은 사람도 좀 위안이 될 게 아니니?” “아직 1년도 안됐지만, 앞으로 몇년을 여기서 산대도 내가 쓴 맛 볼 게 뭐 있니?” 하긴 그랬다. 과수원도 농토도 친구와 남편의 소유일 뿐이지 농사는 남을 줘서 시키고 있었다. 그렇다고 소작을 준 것하고도 다른 게 거기서 조금도 수입을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먹고 싶은 만큼은 따먹고, 바라보고, 저게 다 내 거로구나, 만족하는 게 그들이 그들의 농장에서 거두길 바라는 소출의 전부였다. 생계는 도시의 업체에서 벌어들이는 걸로 충분했고 다만 친구의 건강이 구체적인 병명을 집어낼 수 없는 상태인 채 수년간 좋지 않아 전지요양삼아 마련한 농장이었다. 그러니까 친구가 농사 농사 하고 으스대는 건 순전히 뜨락의 몇그루의 앵두나무가 올린 수확을 뜻하는 것이었다. 나는 맥도 빠지고 약간은 기가 죽기도 했다. 신경성인가 뭔가 하는 병답지도 않은 병을 위한 전지요양치곤 너무 호화판이다 싶어서였다. 그러나 나의 처진 기분은 앵두술 때문에 별로 오래 가지 않았다. 나는 술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딴사람처럼 기분이 고조되고 말이 많아지고 웃음이 헤퍼지는 버릇이 있었다. 꼭꼭 싸둔 생각, 황당한 불안, 맺힌 마음이 거침없이 술술 말이 되어 넘쳤다. 퍼내어도 퍼내어도 넘치는 맑은 샘물처럼 말이 범람했다. 듣는 상대방에게도 그게 맑은 샘물이 될 것인지 구정물이 될 것인지는 내 아랑곳할 바도 아니었다. 오로지 나는 내 속에 갇힌 것들이 말을 통해 자유로워지는 쾌감에 급급했다. 그건 또한 내가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 느낌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방법으로 자유를 맛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평소 나에게 있어서 자유란 나뭇가지 끝에 걸린 별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딸 수 있을 것 같아 나무를 기어올라가 봤댔자 허사였다. 올라갈수록 별은 멀고 돌아갈 수 있는 땅 역시 멀어져서 얻어 가질 수 있는 것은 위기의식밖에 없었다. 평소의 그런 감정이 술주정 비슷한 품위 없는 방법으로나마 자유를 향유코자 했음직하다. 친구가 몇 번을 자랑해도 과함이 없을 만큼 친구의 농사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앵두술은 달콤하고 영롱하고 아름다웠고 주정(酒精)은 향기롭고 순도 높아서 나를 온종일 유쾌하고 황홀하게 했다. 친구의 남편이 돌아왔다. 폭설은 멎었지만 논, 밭, 길, 개울의 구별 없이 망막한 눈밭에 새로운 길을 내면서 돌아온 그의 귀가는 휘황한 헤드라이트를 앞세우고 엔진소리도 요란하게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무릅쓴 동물의 귀소(歸巢)처럼 야성적으로 보였다. 나는 크게 감동해서 예의 거나한 다변으로 찬사를 퍼부었다. 나의 주정의 또 하나의 미덕은 아무리 마셔도 거나한 것 이상은 취하지 않는 거였다. 나의 찬사에 마냥 수줍어하던 그는 서울 가는 길이 위험하니 자기 차로 데려다주마고 했다. 친구는 남편의 목에 팔을 감고 펄쩍펄쩍 뛰면서 좋아했다. “정말 그래 주시겠어요? 나도 아까부터 이 귀한 손님을 그 털털거리는 시외버스에 맡기고 어떻게 오늘밤을 편하게 자나 걱정했었다우” “털털거리는 시내버스나마 다니는 줄 알아. 지레 겁을 먹고 벌써부터 안 다닌다구. 주무시고 가신다면 모를까 가시려면 내 차가 유일한 교통 수단이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를 쫓아 보내려면 별수 있겠느냐는 그의 다음 말을 나는 취중에도 총기있게 짐작하고 얼른 자리를 떴다. “당신 졸면서 운전하면 난 싫어” 그러더니 친구도 따라나섰다. 친구 부부가 나란히 앞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나는 뒷자리에서 안심하고 깊은 잠에 빠졌다. 얼마동안 걸렸는지 친구 부부가 나를 엘리베이터에 쑤셔박고 가버린 후에야 겨우 잠에서 깼다. 콤팩트를 꺼내려고 핸드백을 여니까 맨 위에 웬 껌이 한 통 들어 있었다. “이거 씹어. 냄새 안 나게” 친구가 그러면서 내 핸드백에 쑤셔넣던 생각이 어렴풋이 났다. 어디쯤에서였더라까지는 생각이 안 났지만 남편과 아이들 앞에 술 냄새 풍기지 않고 귀가하길 바라는 친구의 자상한 마음은 알고도 남았다. 그러고 보니 친구가 내 집 생각을 해줄 때까지, 아니 그후까지 어쩌면 나는 단 한번도 집 생각을 안한 것이다. 집으로부터의 완전한 방심…… 여기에 생각이 미치면서 그 섬뜩한 게 또 등덜미를 지나갔다. 그것은 내가 여지껏 경험한 섬뜩함 중에서도 최악의 것이었다. 마치 나의 맨살 위로 피[血]가 찬 기어다니는 짐승이 기는 것 같은 느낌을 맛보았다. 그 느낌의 생생한 현실감에 비기면 하루의 청유(淸遊)는 꿈처럼 자취없이 헛된 것이었다. 나는 휘청거렸다. 술 기운 때문이 아니었다. 술은 이미 말끔히 깨 있었다. 내 나이를 생각했다. 이제 재난이나 화(禍)를 견딜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앞으론 내가 식구들의 화가 되는 게 순서, 아니 권리일 것 같았다. 근래에 와선 섬뜩한 느낌이 허탕을 친 경우가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식구 중 하나가 당하고 있을 재난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날의 섬뜩함은 각별하고도 새로웠다. 엘리베이터가 멎고 문이 열렸다. 거기 나의 식구들이 고스란히, 그리고 무사하게 서 있었다. 마치 제막된 동상처럼. 정말 동상으로 고정된 사람처럼 그들은 나를 보고도 꼼짝도 안 했고 꾸민 듯 데면데면한 표정도 고치지 않았다. 숫제 나를 몰라보는 것 같았다. 그런 일이 있을까. 그야말로 재난이었다. 온전한 나만의 재난…… 그러나 역시 견딜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진저리를 빠져나갔던 생활이라도 돌아와 보니 나를 모른다고 할 때 돌연 그 생활은 얼마나 사랑스러운 게 되어 있는 것일까? 나는 온몸으로 아부하며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생전 처음 웃어보는 것처럼 살갗이 당길 뿐 웃음은 마냥 서툴렀다. “내가 너무 늦었나 보지. 말도 말아 그게 웬눈인지, 버스가 끊겨 혼났다. 자고 가라는 걸 사정사정해서 그 집 자가용을 얻어타고 오는 길야. 운전수도 안 두고 사는 집 차를 얻어타려니 어찌나 황공한지. 귀한 사람들이 목숨 걸고 여기까지 데려다준 거란다. 정말 지독한 눈이었어” 나는 그들의 어깨 너머로 눈과는 무관한 우리집 골목, 아파트의 복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놀라지 마세요” “여보 놀라지 말아요” “그 동안에 일이 좀 생겼어요” “놀라지 마 엄마” 놀라지 말라는 말처럼 사람을 놀라게 하는 데 효과적인 말이 또 있을까. 그러나 나 역시 후들대는 가슴을 진정하기 위해 생각나는 말도 그 말밖엔 없었다. 놀라지 마. 네 식구는 내 눈앞에 저렇게 건재하지 않니? 사람이 성한 그 나머지 재난 같은 건 나는 하나도 안 무서워. 암 안 무섭고말고, 설사 그들이 공모를 해서 나를 생전 모른다 하기로 작정을 했다고 하더라도 놀랄 건 없어. “외할머니가 다치셨대 엄마” “눈에서 넘어지셨는데……” “중상인가봐” “정신을 잃으셨는데 아직 못 깨어나셨대” “엄마 오시길 얼마나 기다렸다고요” “기다리다 못해 우리끼리 먼저 병원을 가는 길이오. 당신도 같이 가겠소?” 식구들이 모두 한마디씩 했다. 나를 비난하는 투는 조금도 없었는데도 나는 부끄러워서 그들로부터 숨어 버리고 싶었다. “아, 아니에요. 얼른 먼저들 가세요. 곧 뒤미처 갈게요. 가슴이 떨려서요. 다리도 떨리고요” 나는 울먹이며 화끈대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거 봐. 엄마 쇼크 받았잖아. 그렇게 한꺼번에 말해 버리는 게 어디 있니?” “어때? 아무 때 알려도 알려야 할 건데” “그래 그래. 자식이 나쁜 일 당한 걸 부모에게 속이는 건 봤어도 부모한테 일 생긴 거 자식한테 숨기는 건 못 봤다” 아이들 사이에서 작은 말다툼이 생겼다. 남편은 말없이 아이들 중 하나를 쇼크받은 아내를 위해 떼어놓고 먼저 병원으로 갔다. 나는 그 아이마저 떼어놓고 내 방을 걸어 잠그고 방바닥에 쓰러졌다. 충격 때문이 아니라 부끄러움과 졸음 때문이었다. 나 없는 동안에 일어난 재난의 당사자가 내 식구가 아니라 친정어머니라는 걸 알아 들으면서 속으로 나는 얼마나 안도하고 기뻐했던가. 그 사실이 나를 심히 민망하고 부끄럽게 했지만 그런 죄책감조차 별로 절실하지도 못해 들입다 잠이 쏟아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나에게 힘이 되어 주려고 집에 남아서 어쩔줄을 모르고 있는 아이에겐 끝내 슬픔을 가장한 채 허겁지겁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마치 불륜의 쾌락처럼 단잠이었다. 짧고 깊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찬물로 끼얹듯이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내 아이들이 나에게 가장 가까운 육친이듯이 어머니 역시 가장 가까운 육친이라는 거였다. 소위 말하는 일촌(一村) 사이가 서로 동등하거늘 나는 내 아이들 대신 어머니가 당한 재난을 마치 타인에게 그것을 떠맡긴 양 다행스러워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어머니에게 나는 단지 하나 남은 일촌이었다. 나에겐 다섯씩이나 있어도 얼고 떠는 일촌이 어머니에겐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자식사랑이 결코 그 수효에 따라 수박쪽 나누듯이 분배되어 줄어드는 게 아니라는 뜻으로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있느냐>는 속담이 있다. 그렇더라도 하나밖에 안 남은 손가락에 대한 집착과 애정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 생각이 나를 소스라치게 했다. 6․25때 여읜 오빠 생각이 났다. 친척이나 이웃간에 효자로 널리 알려졌던 오빠였다. 소년 시절의 그의 모습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엄마와 오빠와 나, 세 식구가 한창 곤궁했을 적, 엄마가 바느질 품판 돈을 졸라 군것질을 일삼다 마침내 구멍가게 유리창까지 깨뜨려 엄마에게 큰 손해를 입힌 나를 그는 인왕산 성터로 데리고 올라가 눈물로 매질을 했었다. 그때의 매질이 나를 두들겨 일으킨 것처럼 잠은 깨끗이 사라지고 그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나에게서 가까이 있었다. 그때의 그의 눈물이 지금도 나를 울게 했다. 그를 가까이 느낄수록 그를 잃었다는 상실감도 그만큼 컸다.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나든 그것을 제일 먼저 책임져야 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걸 더는 회피할 수가 없었다. 나는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병원으로 향했다. 뜻밖에도 어머니는 의식을 회복해서 나를 보자 희미하게 웃기까지 하셨다. 오빠가 남긴 두 아들이 이젠 오빠보다 훨씬 더 나이를 먹어 의젓하게 처자식을 거느리고 있고, 거기다 우리집 대식구까지 합해 응급실의 어머니의 병상은 제법 근엄했다. 나는 그때까지 줄창 오빠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은 나이를 먹을 수 없다는 평범한 사실이 새삼스럽게 쓸쓸한 감회가 되었다. 나는 일촌답게 허둥지둥 그들을 헤치고 왈칵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시신도 감동시킨다는 일촌의 당도였다.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그렁이더니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어머니에게 내가 단 하나 남은 자식이란 사실이 서러운 눈물이 되어 모녀 사이를 흘렀다. “어쩌다가 이 지경을 당하셨어요?” “석이 애비가 밖에서 눈을 치는 걸 들창으로 내다보다가 마음은 젊어서 좀 거들어줄까 싶어 마당으로 한 발짝을 내딛다가 그만……” 석이 애비란 현재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오빠의 큰아들, 어머니의 장손, 나의 장조카였다. “거들긴 뭘 거드셔? 잔소리가 하고 싶으셨겠지” 석이 에미가 혼자말처럼 종알거렸다. “그럼 느이들이 다 옆에 있으면서 할머니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이냐?” 나는 나도 모르게 그만 조카 내외 탓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총찰 안하시는 게 있는 줄 아세요? 또 총찰하시고 싶어 나오시나 보다 할 수밖에요” 조카가 얼른 제 아내 역성을 들고 나섰다. 어머니는 팔십을 훨씬 넘어선 연세였고 조카 내외는 서른 안팎이었다. 시부모 모시기도 꺼리는 세상에 한 세대를 건너뛰어 조손(祖孫)이 한지붕 밑에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터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달갑잖은 존재가 이렇게 드러나 보이긴 처음이었다. 응급실이라 여기저기 신음소리, 울음소리, 가족들이 술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다치신 덴 어디에요?” 조카며느리가 홑이불을 젖히고 다리를 가리켰다. 어머니의 왼쪽 다리가 엉치 밑에서 획 밖으로 돈 채 퉁퉁 부어 있는 게 남의 다리를 얻어다가 어설프게 이어놓은 것처럼 이물스러워 보였다. 한눈에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여든여섯이었다. “빨리 공구리를 해주지 않고……” 어머니가 우리 모두를 위로하듯이 중얼거렸다. “안 아프세요?” “안 아프긴, 다시 기절이나 했으면 싶구나” “아, 어머니!” 이때 간호원이 우리 가족을 불렀다. 우리는 우르르 담당의사한테로 몰려갔다. 응급실 담당 레지던트는 너무 젊고 피곤해 보였다. 벽에 붙은 전자시계의 빨간 초침은 소리없이 자정을 넘고 있었고, X-레이 감광판에서 어머니의 앙상한 엉치와 대퇴골이 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입원시키고 경과 봐서는 수술을 해야겠는데요” “무슨 말씀이신지?” “경과를 본다는 건 수술을 견딜 수 있나를 체크해 본다는 뜻이지 자연치유의 가능성을 말하는 게 아니니까요” “그분은 여든여섯이세요, 어떻게 수술을…… 참 그분은 깁스를 원하시던데, 오래 걸려도 상관 없어요. 깁스를 해주세요” “고령이기 때문에 수술을 하라는 겁니다. 깁스로 뼈가 붙기엔 너무 늙으셨어요. 그 나이에 깁스는 살아 있는 관(棺)이죠. 이런 저런 합병증으로 깁스한 채 돌아가실 게 틀림없으니까요” 젊은 의사가 냉담하게 말했다. “그분은 깁스를 하는 걸고 알고 있는데…… 저어…… 어떻게 깁스로 안될까요?” 나는 거의 애원조로 빌붙였다. “진단이나 치료는 환자가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린 선택의 여지도 없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죠, 방법은 수술밖에 없으니까요” “수술하면 다시 걸으실 수 있을까요?” “경과가 좋으면……” “그러니까 수술 결과도 장담 못하겠단 말씀 아녜요? 말도 안돼요” 나는 싸울 듯이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젊은 의사는 좀처럼 덩달아 흥분할 것 같지 않았다. 그의 냉담은 명철한 지성에서 온다기보다는 직업적인 과로에 연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일 주치의 선생님하고 자세한 걸 의논하시죠. 우선 입원수속이나 밟으시고……” “선생님이 주치의도 아니면서 어쩌면 그렇게 단정적으로 수술을 권하세요?” “오늘의 의술이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흥, 결과도 보장을 못하면서……” “유일한 방법이라고 했을 뿐이지 안전한 방법이라곤 안했습니다. 유일한 방법일수록 위험부담이 더 따른다고 볼 수 있어요” 마침내 의사가 발끈했다. “고모 왜 그러세요? 병원에 온 이상 의사선생님 말씀에 따라야죠”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던 두 조카가 나섰다. “너희들은 모른다. 아무것도 몰라” 나는 무턱대고 치미는 격정에 못 이겨 악을 썼다. “뭘 모른다고 그러세요?” “할머니는 여든여섯이셔. 그런 큰 수술을 견디실 수 있을 것 같니?” “도리가 없잖아요? 우선 입원수속 밟고 자세한 건 내일 주치의 선생님과 의논합시다. 고모, 여긴 응급실이에요” 조카들이 나를 난동분자 다루듯이 거칠게 복도로 끌어냈다. 그러나 그때 그런 방법으로 젊은 의사와 나눈 대화가 가장 자세한 의논이 될 줄은 미처 몰랐었다. 큰 대학부속병원 회진시간이 다 그렇듯이 다음날 아침 한 떼의 레지던트, 인턴, 간호원을 거느리고 나타난 주치의 선생님은 한눈에 믿음직스럽고 권위 있어 보였다. 권위란 상대방으로 하여금 하고 싶은 말을 참게 하는 어떤 힘이 아닐까? 나는 한편에 다소곳이 비켜서서 무슨 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는 거느린 수련의들한테만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짤막하게 몇마디 하고 나가 버렸다. 나는 허둥지둥 뒤따라 나갔지만 수련의 중에 섞여 있던 어젯밤의 응급실 당직의사를 붙드는 게 고작이었다. 그는 내가 묻기 전에 수술날짜는 사흘쯤 후가 될 거라고만 말하고 다른 병실로 사라졌다. 그 사흘 동안에 주치의를 이리저리 쫓아다녀서 알아낸 건 골절된 부위가 과히 예후(豫後)가 좋지 못한 부위라는 것, 저절로 진이 나와서 붙을 걸 기대할 수 없는 연세이기에 금속을 집어넣어서 뼈와 뼈를 잇게 하는 수술은 불가피하다는 것, 간단한 수술은 아니라는 것들이었다. 주치의가 그 많은 말을 한꺼번에 다한 게 아니라 어렵게 마지못해 한마디씩 한 걸 내 상상력으로 뜯어맞추면 대강 그런 뜻이 되었다. 그의 권위에 주눅이 들어선지 과묵(寡黙)이란 전염성이 있는 건지 나는 아무리 벼르던 말도 그 앞에선 제대로 다 말하지 못했다. 주치의가 가족들을 답답하게 하는 것처럼 가족들 역시 어머니를 답답하게 했다. “얘, 숫제 접골원으로 갈 걸 그랬나 보다. 어긋난 뼈 맞추는 덴 아무래도 접골원이 신효하다는데, 괜히 병원으로 끌고와 가지고 너희들 큰돈 없애게 생겼다. 얼른 부러진 다릴 맞춰서 공구리할 생각은 안하고 이 꺼풀만 남은 늙은이 피는 왜 맨날 빼가고 검사는 무슨 놈의 검사가 그리 많은지 아픈 거 참는 것도 참는 거지만 그게 하나라도 공짜일 리가 있냐. 공구리만 해서 내보내자니 억울해서 잔뜩 돈을 뜯어낼 심산인가 본데 느이들이 가서 궁색한 소릴 좀 해야 한다. 아이구! 다리야. 이게 내 다린가? 내 웬순가? 공구리를 하고도 이렇게 아프려거든 제발 지금 죽여주소. 죽여 줘. 자식 앞세우고 남부끄러우리만큼 오래 살았으면 됐지 무슨 죄가 또 남아 이 몹쓸 고생을 할꼬” 어머니는 이렇게 괴로워하면서도 깁스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있었다. 깁스보다 더 나쁜 일이 자기에서 일어나리라곤 아예 상상도 못했다. 식구들은 노인에게 그걸 알리는 일을 미적미적 미루면서 내 눈치만 봤다. 설득과 위로를 필요로 하는 일을 딸이 맡아서 하는 건 당연했다. 마침내 수술날짜가 내일로 박두해 침대에 금식(禁食) 팻말이 붙은 날 밤 나는 어머니가 받아야 할 수술에 대해 알릴 수밖에 없었다. “수술? 누구 맘대로 수술을 해? 안된다. 안돼. 누구 맘대로 내 몸에 칼을 대? 내가 남 못 당할 몹쓸 꼴만 골라 당하고도 이날 입때 목숨을 못 끊고 살아남은 건 죽는 게 무서워서가 아냐. 주신 목숨을 내 맘대로 건드렸다가 받을 벌이 무서워서지. 수술 안하면 죽는 대도 내버려 둬. 내 나이 90이 내일 모레야. 나 내버려 뒀다고 자손들 흉볼 사람 아무도 없어” 어머니는 망설이지도 않고 단호하게 수술을 거절했다. 이미 장손이 수술동의서에 도장까지 찍은 후였고, 내일 아침 어머니를 수술실로 보내는 일은 어머니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의 육신에 그런 모욕을 가하고 싶지 않았다. 퉁퉁 부어 오른 한쪽 다리를 뺀 어머니의 나머지 육신은 뭉치면 한줌도 안될 꺼풀처럼 가볍고 무력해 보였다. 그 작은 육신에나마 자존심이라는 게 남아 있는 이상 앞으로 당할 일을 알고 있을 권리가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어머니 속으로 난 단 하나 밖에 없는 자식으로서의 애정이자 미움이기도 했다. 나는 망설이지도 감추지도 않고 내가 아는 한 소상하게 어머니가 받아야 할 수술에 대해 설명을 했다. 대퇴골 골절을 부러진 막대기에 비유할 여유마저 생겼다. “생각해 보세요. 부러진 나무 막대기를 꼭 이어서 써야 할 일이 생겼을 때 아교풀로 잇는 게 더 튼튼하겠어요, 쇠붙이로 끼고 나사로 죄는 게 더 튼튼하겠어요? 더군다나 아교풀이 모자라거나 아주 없을 땐 어떡하겠어요? 두려워하실 거 조금도 없어요. 박사님이 어머니의 부러진 뼈에다 쇠붙이를 끼고 튼튼히 이어놓을 테니까요. 단 며칠을 사셔도 수족을 쓰셔야 그게 사시는 거죠, 안 그래요? 어머니” 뜻밖에 어머니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 동안 정기없이 흐려졌던 눈도 난데없이 꿈꾸는 소녀의 눈빛처럼 은은하게 빛났다. “그러니까 지금도 뼈 부러진 덴 산골이 제일이란 말이지?” “네?” 나는 어머니의 말뜻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을 뿐더러 돌변한 어머니의 태도는 막연히 기분 나쁘기까지 했기 때문에 생금스러운 소리로 악을 썼다. “의술이 제아무리 발달해도 뼈 부러진 덴 산골밖에 없다고? 암 산골이 제일이고말고…… 산골은 영약인걸” 어머니는 마치 잃었던 어린 날의 동요를 주워올리듯이 그립고 달콤한 목소리로 이렇게 읊조렸다. “어머니, 무슨 말씀이세요? 정신 차리세요” 나는 어머니의 가냘픈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잔뼈만 부러졌어도 산골을 먹으면 되는 건데 굵은 뼈가 부러졌으니 수술을 해서라도 끼울 수밖에. 얘들아. 나 수술받는 거 조금도 안 무섭다. 느이들도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 산골로 붙여놓은 뼈는 부러지기 전보다 훨씬 더 튼튼해진다는 걸 난 잘 알지. 이 손목 좀 보렴” 어머니는 오른손을 높이 쳐들어 보이면서 우리 모두를 감싸고도 남을 듯이 너그럽고 훈훈하게 미소지었다. 그러나 누가 보기에도 어머니의 오른손 손목은 정상이 아니었다. 뼈가 불거져 나오고 한쪽으로 약간 삐뚤어져서 성한 손목보다 굵어 보이긴 했지만. 나는 그게 그렇게 된 까닭을 알고 있었다. 뒤늦게 산골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알아차렸다. 다음날 아침 어머니는 수술실로 들어가기 위해 틀니를 빼고도 시종 그렇게 웃으셨기 때문에 마치 갓난아기 같았다. 여든보다 아흔에 더 가까운 연세에 크나큰 시련을 앞두고 갓난아기처럼 웃을 수 있는 어머니의 비밀이 나를 참을 수 없이 슬프게 했다. 우리 세 식구가 처음으로 서울에 장만한 내 집인 현저동 꼭대기 괴불마당집에서의 첫겨울은 가혹했다. 추위도 예년에 없이 혹독했지만 여름철 장마처럼 눈이 한번 내리기 시작하면 몇날 며칠 계속됐다. 제아무리 충직한 함경도 물장수 김서방도 그 겨울의 지독한 눈구덩이만은 헤칠 엄두가 안 났던지 자주 물장사를 걸렀다. 그러나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안마당, 바깥마당, 장독대, 지붕 위에 지천으로 쌓인 눈을 펴다가 가마솥에 붓고 장작불만 지피면 됐다. 물보다는 불 걱정이 훨씬 더 심각했다. 우린 가늘게 패서 새끼로 한아름씩 묶은 단 장작을 매일 한두 단씩 사다 때며 살았었는데 어머니는 그걸 이웃 구멍가게에서 안 사고 꼭 전차 종점께에 있는 나무장까지 가서 사왔다. 겉보기엔 부피가 비슷해 보이지만 들어보면 판이하게 나무장 것이 올차다는 거였다. 한꺼번에 열 단만 사도 거뜬히 지게로 져다주건만 당시의 우리에겐 그만한 경제력도 없었던지 어머니가 손수 그 멀리서 단 장작을 한두 단씩 날라다 땠다. 허구한 날 퍼부어 쌓인 눈으로 산동네 비탈길이 위험해지자 오빠는 그 일을 자기가 맡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어머니가 오빠에게 그 일을 시킬 리가 없었다. “에민 너한테 이까짓 장작단 심부름이나 하는 효도 안 바란다. 넌 더 큰 효도를 해야 할 외아들이야. 공부 잘해 출세해서 큰돈 벌거던 우선 청량리 나무장에서 통나무를 한 바리 들여다가 쓱쓱 톱질하고 짝짝 패서 한광 가득 차곡차곡 쟁여놓고 겨울을 나보자꾸나”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 아녜요. 다 큰 자식 놓아두고 어머니가 그 일 하시면 사람들이 흉봐요. 자식된 도리도 아니구요” “장차 큰일 할 자식을 몰라보고 탐탁찮은 일이나 시켜먹는 건 그럼 에미 도리라던?” 이렇게 한마디로 딱 잘라 거절을 하는데야 제아무리 효성이 지극한 오빠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추위가 그악스럽던 날 어머니는 장작단을 이고 눈에서 미끄러져 만신창이가 돼서 돌아왔다. 여기저기 난 생채기는 보기만 하면 잠깐 흉할 뿐 아무것도 아니었다. 담박 퉁퉁 부어 오르면서 심한 동통을 호소하는 손목이 문제였다. 오빠와 나는 엄마의 짓눌린 것처럼 나지막한 신음소리에 귀기울이느라 밤새도록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 기둥이 흔들리는 것처럼 불안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부터 어머니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집안일을 해냈고 억지로 꾸민 티없이 씩씩하고 명랑했다. 그래도 삯바느질만은 도저히 안되는 모양이었다. 어머니에게 기생집 삯바느질을 대던 노파를 불러다가 아직 끝맺지 못한 바느질거리를 돌려주면서 미안해 했다. 노파는 어머니의 부어오른 손목을 보더니 대경실색을 하면서 당장 장안의 용한 침쟁이들을 줄줄이 엮어댔지만 어머니는 별로 귀담아듣는 것 같지 않았다. “곧 나을 거예요. 오늘만 해도 벌써 어제보다 손놀리기가 훨씬 수월한걸요” 나중에 노파는 치자를 몇 개 가지고 와서 말했다. “치자떡을 해붙여 보우. 부기 내리는 데는 그저 치자떡이 그만이니까” 그리고 혼자말처럼 덧붙였다. “부기만 내리면 뭐하누. 정작 부러진 뼈가 붙어야지. 부러진 뼈 붙는 데는 산골이 그만인데, 저 여편넨 돈 드는 거라면 귓등으로도 안 들으니. 제 몸 위하는 게 새끼들 위하는 거라는 걸 왜 모르누. 미련한 사람 같으니라구 오빠도 그 소리를 들었다. 오빠는 어머니가 못 듣는 데서 노파의 집을 아느냐고 나한테 물었다. 우리는 엄마 몰래 노파의 집을 방문했다. 오빠는 노파에게 산골이란 뭐고 어디서 구할 수 있는 건가를 물었다. “느이 엄마가 보내던? 아니야? 저런 그러면 그렇지. 아이고 신통한 새끼들. 그럼 그래야지. 이래서 사람은 자식을 낳아 기른다니까. 자식 없는 인생이란 천만금이 있으믄 뭘해. 말짱 헛거지” 이런 호들갑스러운 수다로 시작해서 노파의 산골 얘기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거였지만 신화처럼 매혹적이었다. 우리는 이미 신화 속에 한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사람이 바늘구멍만한 구원의 여지도 없는 곤경에 빠졌을 때 신화는 갑자기 우리 앞에 그 신비의 문을 활짝 열고 그곳의 주인이 되라고 유혹한다. 산골이 나는 굴(窟)은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데 현저동에서 과히 멀지 않은 무악재 고개 마루턱에 있다고 했다. 생기기는 주사위 모양이지만 크기는 그저 좁쌀보다 클까말까 한 반짝거리는 쇠붙이인데, 네모 반듯한 주사위 모양이 어느 한 군데라도 이지러진 건 약효가 없기 때문에 미리 골라서 팔지만 사는 사람도 잘 봐서 사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부러진 뼈를 붙게 하는 효력은 실로 놀라워서 노파가 들은 바론 생전에 산골을 사다먹고 뼈 부러진 걸 고친 사람의 시신(屍身)을 면례(緬禮)하면서 보니까 반짝거리는 잗다란 쇠붙이가 다닥다닥 한 군데 붙어서 뼈를 이어주고 있는데 산 사람의 기운으로도 떼어 놓을 수가 없을 만큼 단단하더라는 것이었다. 약으로 먹은 게 직접 부러진 부위로 가서 붙여 놓는 역할을 한다는 걸 우리가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었던 건 우린 이미 신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비쌉니까?” 오빠가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아냐, 비싸긴. 돈 들게 뭐 있담. 흙이나 모래처럼 저절로 나는 걸. 그 굴을 차지한 사람이 자릿세처럼 좀 받기야 받지만서두 얼마 안될 거야. 병원이나 침쟁이한테서 못 고친 사람들도 오지만 침 한 대 맞을 형편도 못되는 사람꺼정두 오니까” “가자” 우리 남매는 눈두덩이를 뚫고 무악재 고개를 더듬어 올라갔다. 적설 강산에 혹한까지 겹쳐 길은 험했지만 집에서 비교적 가깝고 열두 고개 너머도 아니었기 때문에 신화적인 감동을 맛보기 위해선 길이라도 험해야 했다. 묻고 물어서 당도한 산골굴은 암벽에 빈지문이 달린 굴속이었다. 대낮인데도 촛불을 켜놓고 있었다. 한눈에 보통 토굴이나 암굴하곤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벽이고 천정이고 온통 반짝이는 쇠붙이로 뒤덮여 있었다. 오톨도톨 모자이크된 잗다란 쇠붙이들이 촛불이 출렁이는 대로 물결처럼 흔들려 신비한 몽환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산골굴의 주인은 흰무명 두루마기를 입은 젊은 남자였다. 만약 그가 나이들고 흰 수염이라도 기르고 있었더라면 우리 남매는 다짜고짜 그의 발 밑에 몸을 던지고 어머니를 위한 영약을 주십시사 간절히 빌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젊은 남자도 우리 마음으로 신격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세상 사람들하곤 다르게 빼빼 마르고 멍한 게 영적(靈的)으로 보였다. 그 남자와 비교해 보니 오빠가 다 자란 건강한 청년이라는 것도 새삼스럽게 나를 감격케 했다. 나는 그 남자를 우러러보면서 오빠에게 찰싹 매달렸다. 오빠는 그 남자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나서 용건을 말했다. 남자는 두 자루의 촛불이 켜진 소반으로 가서 산골을 고르기 시작했다. 노파의 말대로 그 굴에선 산골이 무진장 나지만 산골이라고 다 약이 되는 게 아니라 어느 한 군데도 이지러지거나 삐뚤어진 데 없이 정확한 여섯모꼴이어야만 비로소 신효한 효과가 나타난다는 거였다. 그래도 그 남자는 산골이 직접 부러진 뼈에 가서 다닥다닥 붙어서 뼈를 이어놓는다고까지 말하진 않았다. 그 남자가 산골을 고르는 모습은 특이했다. 소반 앞에 단정히 꿇어앉아 조는 듯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 되나 되게 쌓인 산골 중에서 몇 알씩을 집어내어 흰종이에 쌌다. 깡마르고 창백한 얼굴이 더욱 영적으로 돋보이고 육안으로 고르는 게 아니라 심안으로 고른다 싶게 그 일에 힘 안들이고 몰입해 있었다. 오빠를 쳐다보니 숙연한 얼굴로 두 손을 마주잡고 허리를 굽히고 읍하고 있길래 나도 얼른 그대로 했다. “우선 열흘치를 줄 테니까……” 남자가 흰종이에 나누어 놓은 걸 싸면서 말했다. 메마르고 허한 목소리였다. “신령님께 정성 들이면 약효가 더 있을 것이니까, 이리와 봐” 소반말고 굴 속의 가장 후미진 곳에도 두 자루에 촛불이 켜져 있었고 산골로 된 자연의 단위에 신령님의 영정이 모셔져 있었다. 단에는 정안수를 떠놓은 불기가 있고 10전짜리, 50전짜리 동전도 흩어져 있었다. “자아 신령님께 절하고, 약값 가져온 것 있으면 신령님께 바쳐. 그리고 이 정성 받으시고 영험을 내려주십사 빌어, 이렇게” 오빠는 그대로 했다. 꾸벅꾸벅 절을 하고 또 했다. 내가 평소 오빠를 속으로 깊이 사랑하면서도 어려워해서 깍듯이 예절로 대했던 것은 10년이나 되는 연령차도 있었지만 함부로 할 수 없는 오빠의 특이한 사람됨 때문이었다. 어떤 깜깜한 무지도 꾀 많은 미신도 현혹시킬 수 없을 것 같은 명석함과 떳떳함은 오빠의 사람됨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었다. 나는 가난한 동네의 미천한 사람들 속에서 오빠의 그런 인품이 저절로 돋보이는 걸 마치 자신의 때때옷처럼 자연스럽게 여겨왔다. 그런 오빠가 어린 눈에도 서투른 솜씨임이 빤히 드러나는 속악한 신령님의 영정에 수없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오빠의 이런 미신적인 의식은 그의 떳떳함을 한층 돋 보이게 할지언정 조금도 모순되어 보이질 않았다. 정성이 그 극치에 이르면 서로 반대되는 방법까지도 화합하게 하는 것인지.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았건만 공손하게 읍하고 오빠가 올리는 의식을 지켜보았다. 오빠가 신령님 앞에 바친 돈이 산골값으로 넉넉한 것이었는지 모자라는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오빠의 정성은 그 산골장수까지도 흡족하게 한 것 같았다. “아까는 우선 열흘만 잡숴보라고 했는데 보아하니 더 잡술 것도 없이 열흘 안에 거뜬해지실 거구먼. 내 말 틀림없으니 두고보소. 이 산골이라는 게 약기운보다는 신(神)기운을 더 타는 영물인데 젊은이 효성이면 어떤 신령님들인들 안 동하고 배기겠수? 더구나 우리 신령님 영검이 어떻다고” 오빠의 산골이 어머니를 감동시킨 건 말할 것도 없다. 어머니는 안 다쳤을 때보다 훨씬 더 행복해졌고, 매일매일 모래시계처럼 정확하게 손목의 부기와 아픔을 덜해가다가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열흘만에 완쾌를 선언했다. 우리 보기엔 아직도 손목의 모양이 정상이 아니었지만 어머니의 설명에 의하면 그곳에 산골이 모여서 뼈를 붙여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어머니는 완쾌가 틀림없는 사실이란 걸 증명하기 위해 열흘 되던 날부터 다시 삯바느질을 시작하셨고 그 솜씨는 전과 다름없이 빼어났다. 어머니는 또 산골 먹고 붙은 뼈가 얼마나 튼튼하다는 걸 과시하기 위해 우리 앞에서 무거운 걸 번쩍번쩍 들어보이길 즐기셨다. 영천시장에서 장작을 날마다 한두 단씩 사다 때는 버릇도 여전했다. 해동할 때까진 오빠가 그 일을 하겠다고 해도 어머니는 막무가내였다. “걱정 말아. 야아. 또 넘어지게 되면 이 오른손으로 콱 짚으면 되니까. 내 오른 손목은 이제 예전과 달라 무쇠보다 더 튼튼한 걸” 이렇게 뽐내면서 보기 싫게 삐뚤어진 손목을 휘둘러 보였다. 텔레비전 연속극이나 영화 같은 데서 보면 수술실로 들어가기 직전의 집도의와 환자 가족 사이가 사뭇 감동스럽다. 초조해하는 가족 앞에서 의사는 잠깐 권위의 갑주(甲冑)를 벗고 인간적인 온정과 성의를 내비친다. 실수할 확률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손치더라도 인간을 인간에게 맡겼다는 게 인간을 백발백중의 기계에게 맡긴 것보다 훨씬 마음놓이게 한다. 그런 마음이 의사에게 당치 않은 응석도 부리게 하고 때로는 추태에 가까운 애걸이나 부탁, 다짐까지 하게 되고 의사는 가족들의 그런 인간적인 약점에 잠깐이나마 그 어느 때보다도 너그러워지는 아량을 보인다. 어쩌면 그건 아량이라기보다는 동정이나 감상인지도 모르지만. 나 역시 어머니의 주치의인 홍박사와 수술실 밖에서 잠깐이나마 그런 따뜻한 인간적인 교감이 있길 바랐다. 진과 기름이 다 빠진 앙상한 노구, 그러나 아직도 여체인 어머니의 몸이 의식을 박탈당한 채 그에게 맡겨지는 광경은 상상만으로 충분히 참혹했다. 나는 내가 위로받고 싶어서도 그가 필요했다. 그러나 큰 병원 수술실은, 수술실이 아닌 수술장이었다. 그 수술장에서 수술을 받은 환자는 하루에 2,30명을 헤아렸다. 마치 컨베이어 시스템에 의해 제품이 완성되며 운반되듯 종합병원이란 거대한 메커니즘이 환자에게 필요한 조치를 베풀어가며 제시간에 수술실로 보내고 일정한 시간이 경과하면 저절로 수술실에서 내보냈다. 수술실로 들어가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손길이 닿았지만 그 누구도 내가 진심으로 부탁하고 매달리고 싶은 책임자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수술장은 저만큼서부터 가족들에게 금단의 구역이었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속에서의 일을 책임질 사람도 만날 길이 없었다. 집도의는 수술장에 상주하는 것인지 그들만의 전용 출입문이 따로 있는 것인지, 환자를 들여보내고 아무리 그 앞에서 서성대도 홍박사뿐 아니라 어떤 의사도 만나볼 수 없었다. 딴것도 아닌 사람들의 목숨을 맡고 맡기는 관계에 있어서 사전에 잠시라도 그런 인사치레 내지는 교감이 없다는 게 나는 몹시 허전했다. 수술동의서에 도장 찍는 일보다는 그게 더 필요한 일일 것 같았다. 그런 중에도 수술장에 들어가기까지의 어머니의 밝고 천진한 태도는 많은 위안이 되었다. 80 노구에 가해질 대수술에 대해서 어쩌면 그렇게 불안없이 마냥 편안할 수가 있는지 어머니는 산골요법과 수술을 동일시함으로써 그런 편안함에 도달할 것이다. 어머니에게 아직도 오빠는 종교였다. 수술장은 커다란 ㄱ자꼴로 되어 있어서 그 양끝이 입구와 출구로 나누어져 있었다. 출구에서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엿볼 수 없기는 입구나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수술환자 가족들이 출구 쪽 복도에서 초조하게 서성대고 있었다. 아이를 수술실에 홀로 들여보낸 젊은 엄마가 남편 어깨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고 있는가 하면 장정 아들을 수술실로 들여보낸 노모가 염주를 세며 염불을 외고 있기도 했다. 가족들의 그런 초조한 심정을 위한 배려로 가끔 간호원이 나와서 벽에 붙은 환자명단에다 숫자를 기입하고 들어갔다. 숫자는 수술이 끝난 환자가 회복실로 옮겨진 시간을 의미했다. 회복실로 옮겨진 지 한 시간 가량이 되면 대개 환자가 실려나왔다. 환자가 실려나올 때마다 가족들은 덮어놓고 몰려가서 확인하려 들었다. 수술실 문이 열리고, 아직 수술복인 채인 의사가 눈만 반짝거리는 커다란 마스크의 한쪽 끝을 천천히 귀에서 벗기면 입가엔 어려운 일을 성공적으로 끝낸 사람 특유의 만족스런 피곤이 감돌고, 마침내 입을 열며 “안심하십시오. 수술은 성공적이었습니다” 하면 가족들이 혹은 우러러보기도 하고, 혹은 머리를 조아리기도 하면서 감격과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광경은 출구 쪽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입구는 환자를 받아들이고 출구는 환자를 토해내고 가족은 전송하고 마중할 뿐이었다. 나붙은 명단엔 성별과 연령도 기입돼 있었다. 86세, 어머니가 최고령이었다. 그 다음 고령이 57세란 걸로 86세의 수술이 심히 무모한 모험으로 여겨졌다. 아홉시에 수술실로 들어간 어머니는 한시가 지나서야 회복실로 옮겨졌다는 고지가 나붙고, 그 다음은 감감 무소식이었다. 출구가 열리고 환자가 실려나올 때마다 나는 경박하게 놀라면서 달려가서 얼굴을 확인하곤 했다. 방정맞은 생각과 피곤과 공복으로 눈이 침침해져서 나는 아무 환자나 따라다니면서 오래 들여다보았다. “고모도 참, 할머니가 뭐 주름살 성형수술이라도 하고 나올 줄 아슈?” 이렇게 이죽댈 수 있는 조카들의 여유가 밉살스러웠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조카들이 믿음직스러운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마침내 어머니가 실려나왔다. 어머니도 우리를 알아보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틀니를 빼버린 어머니의 발음은 가냘프고 불확실했다. 병원 마크가 붙은 홑이불이 어머니의 벌거벗은 어깨를 미처 다 못 가리고 반쯤 드러내주고 있었다. 나는 그런 무례를 참을 수 없어 홑이불을 끌어올려 목만 내놓고 꼭꼭 여몄다. 링거줄이랑 피 받아내는 줄 때문에 홑이불이 여기저기 떠들썩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벌거벗은 어머니는 홑이불 속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추우세요?” “아냐 그냥 저절로 떨린다” 그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게 신기해서 식구들이 우루루 모여들어 차례차례 어머니를 시험하러 들었다. “할머니 제가 누군지 아시겠어요?” “석이 애비지 누군 누구야?” “할머니, 할머니, 저는요?” “석이 에미” “저는 누구게요?” “경아 애비” 시험을 무사히 통과한 어머니는 자랑스럽게 웃으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방금 수술실에서 나온 어머니의 이런 웃음은 나를 또 다시 섬뜩하게 했다. 장정 둘이서 미는 바퀴 달린 침대는 긴 복도를 신속하게 통과해서 엘리베이터 앞에 멎었다. 그러니까 우린 경망스럽게도 이런 시험을 바퀴 달린 침대를 겅정겅정 따라가면서 치른 것이다. 더 경망스러운 것은 그런 간단한 시험으로 우린 어머니의 수술이 성공적이었다고 믿어 버린 것이다. 엘리베이터 속에서 우린 벌써 어머니에 대해 무관심했다. “아아, 피곤하다. 오늘 저녁엔 다리 뻗고 자야지” “점심을 얼렁뚱땅 걸렀더니 속이 쓰린데, 병원 식당 설렁탕 먹을만합디까, 형?” “오늘 저녁은 누가 병원에서 잘 차례지?” “야아, 차례 따질 거 없다. 아무리 저러셔도 마취 깨면 오늘밤 지내시기 안 힘들겠니? 내가 모시고 샐 테니 느이들은 집에 가서 푹 쉬렴” “그래요, 그러는 게 좋겠어요. 고모. 그럼 오늘 저녁은 고모가 수고 좀 해주세요. 내일 일찌거니 석이 엄마 보내서 교대해 드릴게요” “우리 할머니 강단 센 건 하여튼 알아줘야 돼. 90 고령에 그런 대수술을 치르시고도 정신이 저렇게 말짱하실 수가 있으니……” “못된 것들 그럼 할머니가 못 깨어나셨으면 느이들 속이 시원했겠구나. 회복실에서 얼마나 오래 걸렸게 그러니? 난 꼭 뭔일 당하는 줄 알고 얼마나 마음을 조였게 그러니? 사람마다 나이는 못 속여. 남들은 회복실에서 한 시간도 안 걸리는데 할머니는 세 시간을 넘어 걸렸잖니?” “아니다. 야아, 나도 금세 깨어났어. 깨어나서 아이들 있는 데로 데려다 달라고 아무리 악을 써도 누가 거들떠나 봐야지. 떨리긴 또 왜 그렇게 떨리는지 추워 죽겠다고 애걸을 해도 소용이 없고 정신은 났는데도 목소리는 속에서 끌어잡아 당기는 것처럼 잘 안 나오긴 하더라만 거기 사람들도 너무 무심한 것 같더라” 우리끼리 수근대는 소리에 어머니는 이렇게 긴 소리로 참견까지 하셨다. 우린 서로 눈짓만 했다. 우리의 눈짓에는 90 노인의 수술의 성공을 재확인하고 경탄하는 뜻에다 노인의 지나친 강단을 비웃는 뜻까지 포함돼 있었다. 병실에 돌아오자 우린 더욱 말이 많아지고 어머니는 말끝마다 참견을 하려 드셨다. 나도 어머니의 강단이 지겨운 생각이 나서 간간이 핀잔까지 주기 시작했다. 틀니를 빼놓았기 때문에 발음이 헛소리처럼 불확실한 걸 알아듣기도 피곤했지만 무엇보다도 조카들이나 조카며느리들 보기가 면구스러웠다. 엄살로라도 대수술 후의 빈사상태를 가장했으면 좀 좋으랴 싶었다. 참다못해 나는 조카들을 일찌거니 집으로 쫓아보냈다. “얘들아 어서 가보렴. 할머니보다 느이들이 더 피곤해 뵌다. 뭣좀 배불리 먹고 일찌거니 자거라. 할머니도 느이들이 가야 잠을 좀 주무시지 않겠니? 다 나으신 줄 알고 저러시지만 노인네 일인데 무슨 변사를 부릴지 아니? 조심조심 아무쪼록 어려운 고비를 잘 넘겨야지” 조카들을 보낸 후에도 어머니는 쉬지 않고 무슨 소리든지 하려 들었다. 귀담아듣지 않으면 소의 되새김질 같은 입놀림으로만 보였다. 나는 점점 더 어머니의 지칠 줄 모르는 근력이 짜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밤에 홍박사가 수련의들을 거느리고 병실에 들렀다. 회진시간이 아닌데 들른 걸 보면 그날 수술한 환자만을 특별히 한 번씩 돌아보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회진 때와 마찬가지로 일진의 질풍처럼 순식간에 몰려왔다가 순식간에 몰려갔다. 회진은 늘 질풍이었고 복도에서 마주치는 의사 개개인의 걸음걸이나 행동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어디에고 머물기를 꺼리는 바람처럼 신속하고 정없이 스쳐갔다. 나는 홍박사에게 최고의 치사(致謝)의 말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이루지 못했다. 그건 정중하고 은밀하고 약간 더듬거리는 것이어야 하거늘 그러기엔 너무 기회가 빨리 지나가고 말았다. 나는 허둥지둥 복도까지 쫓아가서 수고했다는 상투적이고도 경박한 인사말을 중얼거리고 수술경과에 대해 물었다. “잘됐어요. 크게 염려 안해도 될 겁니다. 워낙 고령이니까 간병에 신경은 좀 쓰셔야죠” 그에게서 처음으로 긴 말을 들은 게 황송해서 더 묻진 못했지만 미진했다. 어머니는 여전히 중얼거렸다. 수련의들과 간호원이 자주 드나들며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고 몸에 매달린 여러 개의 줄을 점검했다. 내가 밤동안 보살피고 기록해 놓을 것에 대해서도 지시를 받았다. 내가 할일은 자주 기침을 시켜 가래를 뱉게 할 것, 링거가 다 되기 전에 알릴 것, 소변량의 체크, 수술자리에서 흐르는 피를 흡입하는 비닐 팩이 다 차면 알릴 것 등이었다. 나는 홍박사에게 속시원히 못 물어본 걸 그들에게 꼬치꼬치 물으려 들었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대체로 정상이라는 소견에다 워낙 고령이시니까라는 주를 달기를 잊지 않았다. 하긴 고령이라는 건 이상도 병도 아닌 주(註)일 뿐이었다. 어머니는 기운이 없다는 핑계로 기침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가도 가래가 괴면 목에 경련을 일으키며 괴로워해서 나를 깜짝깜짝 놀라게 했다. 가래를 삼키면 폐렴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아무리 일러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쉬지 않고 무슨 말인지 웅얼거렸다. 기력이 쇠진해서 사람의 육성 같지가 않고 미풍이 가랑잎 흔드는 소리가 났다. “제발 좀 눈감고 잠을 청하세요” 나는 짜증을 내면서 어머니를 구박했다. 어머니가 원망스러운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오싹하도록 푸른 기가 도는 눈이었다. “불을 끌까요?” 나는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싫어, 싫어” 어머니가 도리질을 했다. “그럼 제가 눈을 감겨 드릴게요. 마음을 편안히 가지시고 잠을 청해 보세요” 나는 한 손으로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한 손으로 어머니의 눈꺼풀을 지그시 눌러 감겼다. 어머니는 잠시를 못 견디고 나를 뿌리쳤다. “수술자리가 아프셔서 그렇죠? 오늘밤만 잘 넘기면 내일부턴 한결 수월해질 거예요. 정 몹시 아프시면 말씀하세요. 진통제를 놓아 달라고 그래볼 테니까요” “아니 하나도 안 아파. 잠이 안 와서 그래” “그럼 수면제를 달래 볼게요” 간호원실에 가서 그런 얘기를 했더니 알았으니 가 있으라고 했다. 잠시 후에 인턴이 작은 알약을 한 알 갖다주면서 될 수 있으면 실내를 어둡게 해드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알약을 들게 한 후 보조침대 옆에 붙은 희미한 벽등 하나만 남기고 불을 껐다. 이번에는 어머니도 저항하지 않았다. 약효가 곧 나타나려니 안심하는 마음은 간사스럽게도 당장 참을 수 없는 잠을 몰고왔다. 나는 잠깐만 눈을 붙일 양으로 반나마 남아 있는 링거병과 아직은 반도 차지 않은 소변통과 피 받는 통을 확인하고 나서 침대에 쓰러졌다. 얼마나 잤는지 몹시 술렁이는 기미에 퍼뜩 깨어났다. 병실은 소리없이 술렁이고 있었다. 어머니가 두 손으로 허공을 휘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작정 휘젓는 헛손질하고는 달라 보였다. 열심히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는 것처럼 신중하고 규칙적이었다. 나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잠이 달아나 버린 것을 느끼며 화들짝 몸을 솟구쳐 우선 불 먼저 켰다. 어머니는 얼굴을 잠깐 찌푸렸지만 두 손으로 하던 일만은 멈추지 않았다. “엄마 뭐해?” 나도 모르게 어릴 때의 말투로 물었다. “보면 모르냐? 빨래를 했으면 윗도리는 윗도리, 빤스는 빤스, 양말은 양말끼리 개켜놔야지 한데 쑤셔박아 놓으면 쓰냐?” 어머니의 목소리는 힘차고 또렷했다. “빨래라뇨? 좀 주무시지 않고……” “이걸 이 모양으로 늘어놓고 잠이 와? 못된 것들” 어머니가 쨍하는 쇳소리를 내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눈의 푸른 기가 한층 깊어져서 귀기(鬼氣)가 감돌았다. 나는 불현듯 도망가 구원을 청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어머니의 손놀림은 허공에서 분주하게 빨래를 분류하고 개키고 있었고, 전체적으로 기세가 등등했다. 하루 전부터의 금식, 관장, 마취, 대수술 끝에 느닷없이 그런 기운이 솟다니, 나는 놀랍다기보다는 다리가 후들댈 만큼 겁부터 났다. 이때 간호원이 들어왔다. “어머니가 좀 이상하세요. 들입다 헛손질을 하시고 헛것도 보이시는 모양이에요” “마취 끝에 더러 그런 환자들도 있어요. 차차 나아지겠죠” 간호원은 심드렁하게 말하고 체온과 맥박을 체크하고 나가 버렸다. 나는 따라나가서 어머니가 주무시게 해달라고 졸랐다. “아까도 그러셔서 약을 드렸잖아요?” “그 약이 안 듣잖아요. 참 그 약 잡숫고 더하신 것 같아요. 맞았어요. 그 약을 드시기 전엔 잠은 못 주무셔도 헛것을 보시진 않았어요. 어떡하면 좋죠?” “그럴 리는 없지만, 혹 그 약의 부작용이라고 해도 별일은 없을 테니까 안심하세요. 임상시험 결과 가장 부작용이 없는 걸로 알려진 신경안정제를 투약했을 뿐이니까요” “이것보다 더 큰 별일이 어디 있어요. 우리 어머닌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니까요” “차차 나아지실 거예요” “그까짓 신경안정제말고 수면제를 주든지 주사를 놓아주든지 하세요” “그럴 순 없어요” “아니, 이 큰 병원에서, 별의별 수술을 다 하는 대종합병원에서 그래 잠 못 자 고생하는 환자 잠도 못 재워 준대서야 말이 돼요” “환자를 위하는 일은 우리가 더 잘 알아서 하고 있으니 가족들은 협조를 해 주셔야지 덮어놓고 이렇게 떼를 쓰시면 어떡해요?” 간호원이 휙 돌아서면서 쏘아붙였다. 나는 무안하고 노여워서 다시는 네 따위한테 애걸을 하나 봐라, 중얼중얼 뇌까리며 돌아왔다. 아직도 빨래를 덜 개켰는지 허공에서 규칙적인 손놀림을 계속하고 있던 어머니의 손이 별안간 나를 향해 두 손바닥을 보이며 방어의 자세를 취했다. 푸른 귀기가 돌던 두 눈이 극단적인 공포로 튀어나올 듯이 확대됐다. “왜 그래 엄마!” 나는 덩달아 무서움에 떨며 어머니한테로 달려갔다. 어머니의 팔이 내 목을 감으며 용을 쓰는 바람에 나는 숨이 칵 막혔다. 굉장한 힘이었다. 숨이 막혀 허덕이는 나의 귓전에 어머니는 지옥의 목소리처럼 공포에 질린 소리로 속삭였다. “그놈이 또 왔다. 하느님 맙소사 그놈이 또 왔어” 어머니는 아직도 한 손으론 방어의 태세를 취한 채 문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혹시 내 뒤에 누가 따라 들어왔는가 해서 돌아다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순간 머리끝이 쭈뼜했다. “엄마!” 무서움증이 큰 힘이 되어 나는 어머니의 팔에서 벗어났다. 어머니는 악귀처럼 무서운 형상을 하고 와들와들 떨면서 문쪽을 보고 있었다. 문쪽엔 아무도 없었지만 어머니는 혼신의 힘으로 누군가와 대결을 하고 있었다. 순간 나는 저승의 사자가 어머니를 데리러 와 거기 버티고 서 있는 게 어머니에게만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가 얼어붙는 것처럼 무서워서 감히 그쪽으로 발을 옮길 수도 없었다. 그러니 누구한테 구원을 요청할 가망도 없었다. 여든여섯의 노인의 병실을 저승의 사자가 넘보는 건 당연했다. 오늘의 수술환자 중에서뿐 아니라 이 거대한 종합병원에 입원한 모든 환자 중에서도 어머니는 최고령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분별이 있는 저승의 사자라면 앙탈을 해봤댔자일 것 같았다. 나는 이미 저승의 사자한테 어머니를 내줄 각오를 하고 있었다. 여든여섯이면 누가 감히 천수를 못 누렸다 하랴. 다만 몸에 큰 칼자국을 내고 거기서 나는 선혈이 아직 마르기도 전에 끌고가려는 게 괘씸하지만 세상의 죽음치고 그 정도의 여한도 자식에게 안 남기는 죽음이 어디 있으랴. 각오는 하고 있으니 제발 네 모습을 어머니에게 보이지만 말게 해다오. 백 살을 살다 죽어도 죽기는 싫은 게 인간의 상정이라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네 모습만은 드러내지 않는 게 저승의 사자된 도리요, 유일한 자비가 아니더냐. 사라져라. 제발. 훠이 훠이. 나는 어머니의 참혹한 공포를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 이렇게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놈이 내 눈에까지 보이는 일이 일어날까봐 더더욱 겁이 났다. 그러나 그는 사라지기는커녕 다가오고 있음이 분명했다. 어머니의 부릅뜬 눈동자의 초점거리가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맙소사 나 혼자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게 되다니. “그놈 또 왔다. 뭘하고 있냐! 느이 오래빌 숨겨야지, 어서” “엄마, 제발 이러시지 좀 마세요. 오빠가 어디 있다고 숨겨요?” “그럼 느이 오래빌 벌써 잡아갔냐” “엄마 제발” 어머니의 손이 사방을 더듬었다. 그러다가 붕대 감긴 자기의 다리에 손이 닿자 날카롭게 속삭였다. “가엾은 내 새끼 여기 있었구나. 꼼짝 말아. 다 내가 당할 테니” 어머니의 떨리는 손이 다리를 감싸는 시늉을 했다. 그때부터 어머니의 다리는 어머니의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온몸으로 그 다리를 엄호하면서 어머니의 적을 노려보았다. 어머니의 적은 저승의 사자가 아니었다. “군관 동무, 군관 선생님, 우리 집엔 여자들만 산다니까요” 어머니의 눈의 푸른 기가 애처롭게 흔들리면서 입가에 비굴한 웃음이 감돌았다. 나는 어머니가 환각으로 보고 있는 게 무엇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가엾은 어머니, 차라리 저승의 사자를 보시는 게 나았을 것을…… 어머니는 그 다리를 어디다 숨기려는지 몸부림쳤다. 그러나 어머니의 다리는 요지부동이었다. “군관 나으리, 우리 집엔 여자들만 산다니까요. 찾아보실 것도 없다니까요. 군관 나으리” 그러나 절대절명의 위기가 어머니에게 육박해오고 있음을 난들 어쩌랴. 공포와 아직도 한 가닥 기대를 건 비굴이 어머니의 얼굴을 뒤죽박죽으로 일그러뜨리고 이마에선 구슬 같은 땀이 송글송글 솟아오르고 다리를 감싼 손과 앙상한 어깨는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가엾은 어머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차라리 죽게 하시지, 그 몹쓸 일을 두 번 겪게 하시다니…… “어머니, 어머니 이러시지 말고 제발 정신 차리세요” 나는 어머니의 어깨를 흔들면서 울부짖었다. 어머니는 어디서 그런 힘이 솟는지 나를 검부러기처럼 가볍게 털어내면서 격렬하게 몸부림쳤다. “안된다. 안돼. 이 노옴. 안돼. 너도 사람이냐? 이 노옴, 이 노옴” 나는 벽까지 떠다밀린 채 와들와들 떨면서 점점 심해가는 어머니의 광란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몸에서 수술한 다리만 빼고는 온몸이 노한 파도처럼 출렁였다. 그래서 더욱 그 다리는 어머니의 몸이 아닌 이물질처럼 괴기스러워 보였다. 어머니의 그 다리와 아들과의 동일시가 나한테까지 옮아붙은 것처럼 나는 그 다리가 무서웠다. “안된다 이 노옴”이라는 호통과 “군관 나으리, 군관 선생님, 군관 동무”라는 아부를 번갈아 하며 몸부림치는 서슬에 마침내 링거줄이 주사바늘에서 빠져 버렸다. 혈관에 꽂힌 채인 주사바늘을 통해 피가 역류(逆流)해 환자복과 시트를 점점 물들였다. 피를 보자 어머니의 광란은 극에 달했다. “이 노옴, 게 섯거라. 이 노옴, 나도 죽이고 가거라 이 노옴” 어머니는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이를 갈았다. 틀니를 빼놓아 잇몸만으로 이를 가는 시늉을 하는 게 얼마나 처참한 것인지 나말고 누가 또 본 사람이 있을까. 이게 꿈이었으면, 꿈이었으면. 어머니는 이 세상 소리가 아닌 기성을 지르며 머리카락을 부득부득 쥐어뜯다가 오줌을 받아 내는 호스도 다 뜯어버렸다. 피비린내가 내 정신을 혼미케 했다. 퍼뜩 정신이 나서 구원을 청하려 나가려는데 어머니의 기성이 바깥까지 들렸던지 간호원이 뛰어왔다. 뒤미처 나이 지긋한 수간호원도 달려왔다. 어머니의 몸에 부착시켰던 의료기구들을 원상복구시키기 위해선 여러 사람의 힘이 필요했다. 어머니는 힘이 장사였다. 내가 수간호원과 다른 간호원과 함께 어머니를 힘껏 찍어 누르는 동안 담당간호원이 어머니가 뽑아 낸 것들을 다시 삽입했다. 링거는 숫제 발등으로 옮겨 꽂았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습니까?” 나는 수간호원에게 원망스럽게 말했다. “너무 심려 마세요. 흔하진 않지만 이런 특이체질이 아주 드문 것도 아니니까요. 곧 나아지실 겁니다” 수간호원이 이렇게 나를 위로했다. 어머니의 악몽이 특이체질 탓이라구? 하긴 타인의 꿈에 대해 누가 감히 안다고 할 수 있으랴? 이제 “너 죽고 나 죽자”는 발악으로 변한 어머니의 몸부림은 지칠 줄 몰랐다. 수간호원이 간호원에게 지시해서 침대 양쪽 난간을 올리고 끈을 가져다가 어머니의 사지를 꽁꽁 묶게 했다. “따님 된 마음에 좀 안됐다 싶으셔도 참으세요. 이런 경우는 이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제 안심하고 눈 좀 붙이세요. 지레 병 나시겠어요. 곧 정상으로 돌아오실 테니 염려 마시고……” 그들은 어머니를 묶어놓고 나를 위로하고 병실을 나갔다. 나는 지칠 대로 지쳐서 신 신은 채 보조침대에 상반신을 꺾었다. 그러나 웬걸, 원한 맺힌 맹수처럼 으르렁대던 어머니가 에잇하고 한번 기압을 넣자 사지를 묶은 끈은 우지직 끊어지기도 하고 혹은 풀리기도 했다. 어머니는 다시 길길이 뛰기 시작했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괴력이었다. 목소리도 뜻이 통하는 말이 아니라 원한의 울부짖음과 독한 악담이 섞인 소름끼치는 기성이었다. 조금도 과장없이 간장을 도려내는 아픔과 함께 내 속에서도 불가사의한 괴력이 솟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어머니에게로 돌진했다. 다시는 아무의 도움도 청하지 않고 어머니와 맞서리라 마음먹었다. 이건 아무의 도움도 간섭도 필요없는 우리 모녀만의 것이다. 나는 어머니를 힘껏 찍어 눌렀다. 온몸으로 타고 앉다시피 했다. 어머니의 경련처럼 괴로운 출렁임이 고스란히 전해왔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움직이거나 약해져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어머니가 나를 타고 앉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리 전심전력으로 대결해도 어머니의 힘과는 막상막하여서 내 힘이 위태로워질 때마다 나는 어머니의 뺨을 쳤다. “엄마, 정신 차려요. 엄마, 정신 차려요” 처음으로 엄마의 뺨을 치고 나는 내 손이 저지른 패륜에 경악해서 두번째는 더욱 세차게 때렸고, 어머니의 뺨에 솟아오른 내 손자국을 보고 이것은 악몽 속 아니면 지옥일 거라는 일종의 비현실감이 패륜에 패륜을 서슴없이 보태게 했다. 어머니의 힘도 무서웠지만 더 무서운 건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그건 내 어머니의 얼굴이 아니었다. 이제 나는 어머니와 싸우고 있는 게 아니라 내 나름의 공포와 싸우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를 사랑했고 내가 사랑한 것 중엔 물론 어머니의 얼굴도 포함돼 있었다. 어머니는 늙어갈수록 아름다운 분이었다. 그건 드물고도 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아름다움은 어머니가 말년에 믿게 된 부처님과도 깊은 관계가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는 부처님을 믿는 걸로 어머니가 당한 남다른 참척의 원한을 거의 극복한 것처럼 보였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을 닮은 곱고 자비롭고 천진한 얼굴로 늙어가셨다. 비록 아들은 잃었으나 거기서 난 손자들을, 그의 짝들을, 거기서 난 증손자들을 딸과 외손자들을 사랑하며, 그러나 결코 집착하진 않으시며 행복하게 늙어가셨다. 누구보다도 화평하게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거의 황홀하리만큼 아름답게 늙으신 어머니를 볼 때마다 나는 저분이야말로 참으로 보살(菩薩)이라고 숙연해지곤 했었다. 사람 속의 오지(奧地)는 아무 끝도 없고 한도 없는 거라지만 그런 어머니에게 그런 격정이 숨겨져 있었을 줄이야. 내 어머니의 오지에 감춰진 게 선(善)과 평화와 사랑이 아니라 원한과 저주와 미움이었다는 건 정말 너무했다. 설사 인간이 속속들이 죄의 덩어리라고 하더라도 그건 너무했다. 악과 악의 대결처럼 살벌하고 무자비한 모녀의 힘의 대결에서 어머니가 패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나의 손가락 자국대로 선명하게 부풀어 오른 어머니의 뺨에 비로소 내 뺨을 비비며 소리내어 통곡했다. 어머니가 그때 왜 현저동 꼭대기를 우리의 은신처로 생각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때 우린 그 동네의 가난으로부터 벗어나서 남부럽지 않게 산 지 오래되었지만 그때 우리가 처한 곤경은 참으로 억울하고 난처한 것이었다.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곤경이었다. 그런 막다른 곤경이 엄마가 서울 와서 처음 말뚝 박은 동네를 고향 다음 가는 신뢰감으로 의지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또 우리의 곤경의 특수성과도 관계가 있음직하다. 그때의 우리 곤경은 6․25라는 커다란 민족적 비극 속의 한 작은 단위에 불과했지만 중산층이 모여사는 점잖은 동네의 인심의 간사함, 표리 부동성과도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오빠가 의용군에 지원한 일만 해도 그랬다. 오빠는 해방 후 한때 좌익운동에 가담했다가 전향한 적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남하를 못하고 적치하에 서울에 남은 걸 극도로 불안해 했다. 이런 불안과 공포를 혼자 견디기엔 벅찼던지 비슷한 처지의 전향자들의 동태에 대해 몹시 알고 싶어했다. 그가 어설프게 알아낸 바로는 어떡하든 남하를 하지 않았으면 다시 변신해 있는 것도 오빠를 새로운 불안에 빠뜨렸다. 그 요란한 포성보다 서울을 사수할 것이라는 방송만 믿고 피난의 기회를 놓친 자신의 고지식함과 국민을 그렇게 기만하고 저희끼리만 달아나버린 정부의 엄청난 무책임을 홀로 저주하고 분노했다. 그렇다고 새로운 변신을 꾀할 만큼 비루하지도 못했다. 그는 그가 기왕에 한 전향이, 잘못을 뒤늦게 깨닫고 신념과 용기를 가지고 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향이란 말 자체엔 늘 도덕적인 불쾌감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의 최초의 선택이 웬만큼만 잘못된 것이었더라도 그는 전향을 해서 잘못을 시정하느니 차라리 최초의 신념에 일관함으로써 자신과의 신의를 지키고자 했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지조를 최고의 이상으로 삼는 선비기질을 간직하고 있었고, 그런 선비기질이 목적을 위해 수단을 안 가리는 좌익사상의 본심(本心)을 참을 수 없는 데서 그의 갈등은 불가피했다. 동란 전의 한때 좌익사상이 청소년들을 선동하는 마력이 대단했을 적에도 내가 그 방면에 무관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오빠 같은 사람이 여북해야 전향을 했을까 하는 오빠의 고통스러운 경험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살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변신이란 생각조차 하기 싫은 그의 인품이기에 더욱 더 국민을 듣기 좋은 말로 달래 적치하에 팽개치고 저희끼리 뺑소니친 꼴이 된 정부에 대한 원망도 컸다. 원망과 불신, 불안 그리고 고독으로 그는 날로 정신이 망가져 갔다. 이런 그가 이웃의 고발로 기습을 당해서 끌려가는 걸 가족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후 들려온 소식은 전혀 예상을 빗나간 것이었다. 인민재판에 회부돼서 당장 목숨을 잃었거나 모진 벌을 받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인민 총궐기대회에서 제일 먼저 의용군을 지원해서 많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감격해서 동조케 했다는 소식이었다. 남은 식구들은 그저 그렇다니 그렇게 알 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떤 농간이 그의 운명을 희롱하고 있는지 알아볼 도리는 없었다. 실상 운명의 희롱은 가족도 당하고 있었다. 전향자라고 지목해서 따돌리고 고발까지 한 이웃은 적치하에서 대단한 세력을 누리고 있었는데 돌변해서 우리 식구들의 보호자 노릇을 해주었다. 초기엔 그렇지도 않았지만 나중판으로 접어들수록 청장년이 있는 집치고 의용군으로 빼앗기지 않은 집 없다고 할 만큼 사람 수탈이 극심해져서 의용군이 나갔다는 게 하등 특별대우 받을 만한 일이 못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식량배급이다 뭐다 해서 우리는 특별한 혜택을 받고 있었다. 받고 보니 그 세력 부리는 이웃의 귀띔이 동인민위원회까지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런 혜택을 받을 것인가를 망설이거나 취사선택할 경황도 기력도 없었다. 망연자실 목숨을 부지하는 게 고작이었는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먹어야 한다는 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인 조건이었다. 남은 죽도 못 먹는데 보리밥이라도 아귀아귀 먹다가 문득 깜짝 놀라곤 했지만 그건 한 식구를 판 대가라는 생각 때문이었지 그게 옳지 못한 밥이라고 생각해선 아니었다. “세상에 아무리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지만, 그 아들이 어떤 아들이라고 그 아들 목숨하고 바꾼 밥뎅이가 걸리지도 않고 이리 술술 넘어가노……” 어머니도 느닷없이 수저를 놓으며 이런 탄식을 하면 했지 그 후유증을 우려하진 않았다. 만 석 달만에 세상이 바뀌자 우리는 이웃 인심의 극심한 박해를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빨갱이 집이라고 고발을 해서 청년당원들이 몽둥이와 총을 들고 달려들어 온 집안을 들들 뒤지고 쓸 만한 기물을 파괴하고 만삭의 올케의 배를 몽둥이 끝으로 쿡쿡 찔러보는 행패를 동네 사람들은 굿구경하듯 신명까지 내면서 즐겼다. 우리는 그들이 겪은 석 달 동안의 고초를 위한 복수의 표적이 되어 어떤 재앙이 쏟아지든 다만 순종할 밖에 없었다. “여보슈 백성들을 불구덩이에 버리고 도망간 사람은 누구유? 거기서 살아남은 죄로 죽여줘도 난 원망 안할 테니 그 사람 얼굴 좀 보고 그 죄나 한번 묻고 죽읍시다” 가끔 어머니가 통곡하며 이렇게 푸념을 해봤댔자였다. 독종이니, 빨갱이 족속치고 말 못하는 빨갱이 없더라느니 하는 욕이나 먹는 게 고작이었다. 그 정도는 그래도 약과였다. 우리를 이용하고 비호해주던 고위층 빨갱이를 우리가 감춰두고 있다는 고발까지 당해 어머니와 올케, 나 세 식구가 따로따로 붙들려가서 며칠씩 심문을 받고 나오기까지 했다. 그 동안 어린 조카가 친적집에서 받은 구박은 먼 훗날까지 우리 식구에게 깊은 상처로 남았다. 빨갱이라면 젖먹이 어린것까지도 덮어 놓고 징그러워하고 꺼리던 때였다. 그런 중에 다시 전세가 기울어 후퇴가 시작되자 어머니는 우선 만삭의 며느리와 손자를 친정으로 보냈다. 어머니가 끝까지 남아 있으려는 건 오빠가 혹시 돌아올까 해서였던 건 말할 것도 없다. 의용군 갔다가 도망쳐 오는 젊은이도 꽤 있어서 기대를 걸어볼 만했고 만약 도망을 못 치면 인민군이 돼서라도 돌아올 것만 어머니는 믿었다. 어머니에겐 아들이 살았느냐 죽었느냐가 문제지 빨갱이냐 흰둥이냐는 문제가 아니었다. 어느 날, 기적처럼 아니 흉몽처럼 오빠가 돌아왔다. 그렇게 믿고 기다리던 어머니까지도 감히 오빠를 반기지 못했다. 헐벗고 굶주려 몰골이 흉한 것까지는 예상한 대로였지만 그때 오빠는 이미 속속들이 망가져 있었다. 눈은 잠시도 한 군데 머무르지 못하고 희번덕댔고, 심한 불면증으로 몸은 수척했고 피해망상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깜짝깜짝 놀라고 사람을 두려워했다. 가족들한테도 전혀 친밀감을 나타낼 줄 몰랐고 집에 없는 처자식을 궁금해 하거나 보고 싶어할 줄 몰랐다. 그 동안 무슨 일이 그를 그토록 망가뜨렸는지 알아낼 수는 없었다. 그는 문을 꼭 잠그고 그 안에서 두려움에 떠는 심약한 집 보는 어린이처럼 자기를 단단히 폐쇄하고 외부의 모든 것을 배척하려 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전세는 더욱 불리해져서 서울을 비우고 모든 사람들이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가야만 했다. 여름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정부는 미리미리부터 서울의 위기를 예고하고 피난의 편의를 봐주었고 시민 역시 다시 적치하를 겪느니 죽는 게 낫다 싶은 비장한 각오로 남부여대 엄동설한에 집을 나섰다. 오빠의 다 망가진 정신도 피난에만은 적극적이었다. 어서 가자고 조바심이 대단했다. 오빠의 정신력 중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건 오로지 빨갱이를 피해야겠다는 생각 하나뿐이었다. 그 몸과 그 몰골로 탈출을 하고 격전지를 돌파할 수 있었던 것도 그 힘에 의하지 않고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빠에겐 시민증이 없었다. 젊은 남자가 시민증 없인 피난은커녕 잠깐의 외출도 어려울 만큼 그 단속은 날로 심해졌다. 피난민 중에 패잔병이나 간첩이 섞여 있을 가능성 때문이었다. 시민증을 내기 위해선 우선 신청서에 이웃에 사는 두 사람의 보증을 받아야 하는데 아무도 오빠의 보증을 서주려 들지 않았다. 어머니가 아무리 애걸해도 이웃 인심은 냉담했다. 경찰서에 가서 직접 심사를 받고 시민증을 내는 절차를 밟으라는 거였다. 빨갱이가 아니면 그 절차를 겁낼 까닭이 없지 않겠느냐는 말은 지당했다. 오빠가 돌아오기 전 우리 세 식구가 시민증을 낼 때도 물론 이웃사람들은 도장을 안 찍어 줘서 경찰서에 몇번씩 불려다니고 나서 맨 나중에 그걸 교부받을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오빠의 경우는 그게 난처했다. 경찰서 소리만 해도 그는 안색이 단박 바래면서 덜덜 떨었다. 피난도 못 가고 생전 집 밖에 못 나가도 좋으니 경찰서에 제발로 걸어 들어갈 순 없다는 거였다. 그러다가도 피난 갑시다, 앉아서 또 당할 순 없어요, 피난 갑시다, 이렇게 잠꼬대처럼 얼뜬 소리로 중얼대면서 안절부절을 못했다. 그럼 이판 사판이니 시민증 없이 그냥 피난길에 나서 보자고 하면 스파이로 몰려 누구 총살당하는 걸 보고 싶으냐고 그 초점 없는 눈을 희번덕댔다. 식구들을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이 만들면서 오빠가 바라는 건 자기는 가만히 앉았고, 식구들이 무슨 수를 써서든지 그걸 입수해다 주는 거였다. “어머니 다 팔아요. 집이고 세간이고 다 팔면 그까짓 시민증 하나 못 살라구요. 그까짓 거 애꼈다 뭐 하려고 안 팔아요” 이런 터무니없는 응석으로 어머니의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가 하면 나한테까지 못할 소리를 마구 해댔다. “야아, 너 빽 있는 놈 하나 물어서 이 오빠 좀 살려주면 안되니? 누이 좋다는 게 뭐냐?” 이런 창피스러운 억지가 실은 오빠의 망가진 정신의 마지막 경련이었다. 서울을 포기하겠으니 남은 시민들은 질서있게 피난을 하라는 마지막 후퇴령이 내린 날, 우리 세 식구도 피난짐을 이고 지고 덮어놓고 집을 나섰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끝까지 남아 있다가 그제서야 떠나는 이웃도 있어 그들에게나마 우리도 피난을 가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훗날 또다시 빨갱이로 몰릴까봐 겁도 났지만 그 집에서 또다시 빨갱이 세상을 맞기는 더 무서웠다. 의용군에서 도망친 건 보통 전향하곤 달라서 극형까지도 각오해야 될 것 같았다. 그때 우리 식구의 사고나 행동은 오로지 빨갱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었다. 노도처럼 남으로 밀리는 피난행렬에 끼었으면서도 검문을 피하느라 도심을 몇바퀴 배회한 데 지나지 않았고, 오빠는 검문이 있을 만한 곳을 더듬이처럼 예민한 감촉으로 예감하고 재빠르게 피하는 능력 빼고는 아무런 생각도 의지도 없는 폐인처럼 돼 있었다. 나는 이런 오빠가 짐스러운 나머지 혼자 도망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말했다. “얘들아, 우리 현저동으로 가자꾸나” 어머니로부터 현저동 소리를 듣자, 나는 마치 오랜 방탕 끝에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탕아처럼 겸손하고 유순해졌다. 번들거리는 불안한 빛을 빼면 텅 빈 오빠의 눈에도 일순 기쁨 같은 게 어렸다. “그 처녑 속처럼 구질구질한 동네는 우리가 숨어지내기 알맞을 거다” 어머니는 이제 마음이 놓이는지 편안한 목소리로 이렇게 덧붙였다. 처녑 속처럼 구질구질하다는 어머니의 표현이 경멸보다는 그리움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동네도 텅 비었겠지. 아무 집에서나 숨어 지내다가 우리 국군이 돌아오거든 우리집으로 가자꾸나. 내 생전에 이렇게 사람이 무서워 보기도 처음인가보다. 내 마음이 고약한지 세상 인심이 고약한지. 그렇지만 그 동네 사람은 한두 사람 만난대도 덜 무서울 것 같다. 워낙 진국들이니까” 내로라고 뽐내는 사람들의 인심에 초개처럼 농락당하고 상처받은 우리는 처음 서울 와서 가장 고난의 시절을 보냈던 빈촌에 아직도 남아 있는 고전적인 가난과 진국스러운 인심을 생각하고 마치 구원의 실마리를 찾아낸 것처럼 마음이 밝아지고 있었다. 오빠의 망가진 정신이 어쩌면 치유될지 모른다는 희망까지 생겼다. 우리는 마치 귀향처럼 아니, 크고 너그러운 품으로의 귀의(歸依)처럼 조용한 희열에 넘쳐 허위단심 현저동 꼭대기를 기어올랐다. 골목마다 낯익고 정다워서 우리를 감싸안는 듯했다. 작전상 후퇴의 마지막 날 저녁나절이라 동네는 움직이는 거라곤 개미새끼 한 마리 못 만나게 완전히 비어 있었다. 내려다본 시가지도 불빛 하나 없이 황혼에 잠긴 게 갯벌처럼 공허해 보였다. 어머니가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속삭였다. “빨갱이란 사람들도 참 딱한 사람들이지. 여기 사는 가난뱅이들 인심도 못 얻고 무슨 명분으로 빨갱이 정치를 할 셈인고” 어머니가 그때까지 알고 지낸 몇집을 찾아갔으나 물론 다 비어 있었다. 우린 그 중에 우물이 있는 집을 골라 문을 따고 들어갔다. 집이 허술하니깐 문도 수월하게 딸 수가 있었다. 모든 집이 비어 있어서 어차피 무단침입할 바엔 좀더 나은 집을 차지할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어디까지나 나중에 사과하고 신세를 갚은 걸 전제로 하려 했기 때문에 아는 집 중에서 골라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후 며칠 동안 우린 사람이라곤 못 만났고 세상이 바뀐 건지 안 바뀐 건지 알아낼 수도 없었다. 우린 한 달 가량의 양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 집엔 잡곡과 김장김치와 장작과 우물이 있었다. 우린 그 생활에 만족했다. 오빠가 먼 길을 도망쳐 오며 꿈꾸던 것도 바로 그런 만족한 생활이 아니었을까? 나는 문득 생각하곤 했다. 무엇보다도 자기가 어떠어떠한 사람이라는 걸 나타내 보이려고 말씨나 행동을 꾸밀 필요가 없다는 게 오빠의 치유에 도움이 되리라는 희망이 생겼다. 벌써 조금씩이나마 그런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오빠는 남쪽 친정에 가서 몸을 푼 아내와 아들에 대해 비록 불확실하게나마 염려하고 궁금해 하는 눈치를 보일 때가 가끔 있었다. 여지껏 없던 일이었다. 우선 가장 가까운 사람을 향한 마음으로부터 열릴 가능성이 뵈는 것 같아 반가웠다. 우린 우리의 완벽한 은신을 감지덕지할 줄만 알았지 그 허점을 모르고 있었다. 어느 날 우리는 흰 홑이불을 망토처럼 뒤집어쓴 일단의 인민군에 의해 발각되었다. 그들은 서대문 형무소에 주둔하고 있는데 거기서 산동네를 쳐다보면 매일 아침저녁 굴뚝으로 연기가 오르는 집이 몇집 있더라는 것이었다. 연기 나는 집을 하나하나 다 뒤져봐도 재수 없게 다 죽게 된 늙은이 아니면 병자가 고작이더니 이 집엔 웬 젊은 여자가 다 있냐고 마침 문을 열어준 나를 호시탐탐 노려보았다. “네 그러믄요. 이 집엔 여자들만 산다니까요. 찾아보실 것도 없다니까요” 어머니가 급히 뒤따라나오면서 안해도 될 소리를 두서없이 지껄였다. 그들이 어머니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동무도 여자요?” 앞장선 군관이 싸늘하게 웃으면서 오빠에게 물었다. 인민군을 본 오빠가 갑자기 실어증에 걸렸는지 으, 으, 으, 하고 신음할 뿐 뜻이 통하는 소리는 한마디도 못했다. “갸안 여자는 아니지만서두 병신이에요. 사람값에 못 가는 병신이니까 여자만도 못하죠. 웬수죠. 병신자식은 평생 웬수죠” 어머니의 얼굴에 공포와 비굴이 처참하게 엇갈렸다. 어머니가 그렇게까지 강조할 것도 없이 오빠는 누가 보기에도 성한 사람은 아니었다. 우락부락 거친 그들과 비교되어 더욱 그랬다. 몸은 파리하고 여위고 눈은 공허하고 입에선 알아들을 수 없는 외마디 소리가 새어나올 뿐이었다. 어머니가 병신자식이라는 걸 너무 강조하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후 그들은 겪음 내기로 자주 우리집에 드나들었다. 그 중엔 보위부 군관도 있었는데 오빠에 대해 뭔가를 눈치채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들하고 천연덕스럽게 고향 얘기나 처자식 얘기를 하다가도 갑자기 오빠를 노려보면서 딴사람같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동무 혹시 인민군대에서 도주하지 않았소? 한다든가 동무, 혹시 국방군에서 낙오한 게 아니오? 하면 간이 콩알만큼 오그라들었다. 그러나 오빠는 그들만 나타나면 사색이 되어 떠는 증이 그런 소리로 더해지거나 덜해지지 않았고, 인민군복을 보자마자 새로 생긴 실어증도 끝내 그대로여서 병신 노릇에 빈틈이 없었다. 문제는 우리였는데 우리도 오빠가 병신이 된 걸 연기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슬프고 원통할 일이었지만 오빠가 치유될 가망성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 보위부 군관은 남달리 집요한 데가 있었다. 위협도 하고 회유도 하고 때론 애원까지 하면서 진상을 알고 싶어했다. “어머니, 어머니를 보면 딱해 죽갔어. 아들 하나가 어찌다 저꼴이 됐을까? 그렇지만 배안의 병신은 아니지? 그치? 배안의 병신만 아니면 고칠 수 있어. 우리 북반부 의술은 세계적이거든. 그러고도 가난한 사람 우선이야. 내가 얼마든지 좋은 의사 보내줄 수 있으니까 바른 대로만 말해. 언제부터 왜 저렇게 됐나” 자주 드나들면서 언제부터인지 우리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이렇게 응석 섞인 반말지거리까지 했다. 차고 모질게 굴 때보다도 그럴 때는 어머니도 벌벌 떨면서 횡설수설하기가 일쑤여서 곁에서 지켜보는 나를 불안하게 했다. 그러나 그가 돌아가면 어머니는 눈을 찡긋하면서 일부러 그랬다고 말해서 나를 어이없게 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선 못 익숙해질 게 없었다. 독사와 더불어 춤을 추는 것 같은 섬뜩하고 아슬아슬한 곡예로 하루하루를 넘겼다. 다시 포성이 가까워지고 그들의 눈에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앉으나서나 그들이 곱게 물러가기만을 축수했다. “그저 내 자식 해코저만 마소서. 불쌍한 내 자식 해코저만 마소서” 마침내 보위군관이 작별하러 왔다. 그의 작별방법은 특이했다. “내가 동무들같이 간사한 무리들한테 끝까지 속을 것 같소. 지금이라도 바른 대로 대시오. 이래도 바른 소리를 못하겠소?” 그가 허리에 찬 권총을 빼 오빠에게 겨누며 말했다. “안된다. 안돼. 이 노옴 너도 사람이냐? 이 노옴” 어머니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그의 팔에 매달렸다. 오빠는 으, 으, 으, 으, 짐승 같은 소리로 신음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가 어머니를 획 뿌리쳤다. “이래도 이래도 바른 말을 안할 테냐? 이래도” 총성이 울렸다. 다리였다. 오빠는 으, 으, 으, 으, 같은 소리밖에 못냈다. “좋다. 이래도 바른 말을 안할 테냐? 이래도” 또 총성이 울렸다. 같은 말과 총성이 서너 번이나 되풀이됐다. 잔혹하게도 그 당장 목숨이 끊어지지 않게 하체만 겨냥하고 쏴댔다. 오빠는 유혈이 낭자한 가운데 기절해 꼬꾸라지고 어머니도 그가 뿌리쳐 나동그라진 자리에서 처절한 외마디 소리만 지르다가 까무라쳤다. “죽기 전에 바른말 할 기회를 주기 위해 당장 죽이진 않겠다” 그후 군관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며칠만에 세상은 또 바뀌었다. 오빠의 총상은 다 치명상이 아니었는데도 며칠만에 운명했다. 출혈이 심한데다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며칠 동안에도 오빠의 실어증은 회복되지 않았다. 그 며칠 동안의 낭자한 유혈과 하늘에 맺힌 원한을 어찌 잊으랴. 그러나 덮어둘 순 있었다. 나는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고 자식을 낳아 또 사랑하는 걸로, 어머니는 손자를 거두어 기르며 부처님께 귀의하는 걸로. 마취가 깨어날 때 부린 난동으로 어머니는 어찌나 많은 힘을 소모하였는지 그후 오랫동안 탈진상태가 계속됐다. 부피도 무게도 호흡도 없이 불면 날아갈 듯 한 장의 백지장이 되어 누워 있었다. 간혹 문병을 와주는 친척이나 친구 보기에도 도저히 회복될 가망이 없어 보였던지 모두 심각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들 중에는 어머니가 아예 의식이 없는 줄 알고 서슴지 않고 장례 절차 얘기를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상갓집에 온 줄 착각을 하는지 천수를 누리셨으니 너무 서러워 말라고 우리를 위로하는 이도 있었다. 우리 역시 그런 그들을 말리거나 언짢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두 숟갈 유동식을 받아 넘긴다든가 주사바늘을 찌를 때 찡그리는 것 외엔 어머니에게 의식이 남아 있다는 표시는 참으로 미미했다. 어느 날, 문병을 와준 내 친구도 이런 어머니를 일별하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다. “수의는 장만해 놨니?” “아니, 뭐 그런 끔찍한 걸 미리 장만을 하니?” “얘 좀 봐, 그럼 묘지는?” “묘지? 그런 것도 미리 장만하는 거니?” “얘 좀 봐, 그것도 안해놨구나. 넌 하여튼 알아줘야 해” “뭘?” “너 나이롱 딸인 거, 말야” “나이롱 딸?” “그래 나이롱 딸, 이런 엉터리. 아들도 없는데 딸까지 이런 순엉터리니……” 나는 내가 나일론에다 순 엉터리인 건 상관없었지만 어머니를 위해선 좀 안된 것 같아 변명할 마음이 생겼다. “우린 고향에 선영이 있지 않니?” “느이 고향이 어딘데?” “몰라서 묻니? 개성 쪽, 개풍군이야” “거기 있는 선영이 무슨 소용이 있어?” “그래도” “그래도라니? 변명치곤 너무 구차스럽다 얘. 이북에 두고 온 논밭 저당 잡고 돈도 꿔 달랠라” 입이 험한 친구는 사정없이 나를 몰아세웠다. “그게 아니라 일종의 묵계 같은 거지. 어머니는 비록 살아 생전에 못 가셨더라도 돌아가신 후에만은 어머님이 선영 곁에 누우시길 바라실 거 아니니? 말씀은 안하셔도 속으로 간절히 바라시는 걸 빤히 알면서 어떻게 딴 데다 묘지를 사놓니? 그야 막상 돌아가시면 문제가 달라지겠지? 그때 가서 묘지를 사도 늦을 거 없잖아. 묘지란 어차피 사후의 집이니까” 이때 어머니가 눈을 떴다. 백지장 같은 모습과는 딴판으로 또렷하고 생기있는 눈이어서 친구는 앉은자리에서 에그머니나 비명을 지르며 내 옷소매에 매달렸다. “호숙 에미 나 좀 보자” 어머니가 정정한 목소리로 나를 곁으로 불렀다. “네 어머니” 나는 어머니에게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어머니의 손이 내 손을 잡았다. 알맞은 온기와 악력(握力)이 나를 놀라게도 서럽게도 했다. “나 죽거든 행여 묘지 쓰지 말거라” 어머니의 목소리는 평상시처럼 잔잔하고 만만치 않았다. “네? 다 들으셨군요?” “그래 마침 듣기 잘했다. 그러잖아도 언제고 꼭 일러두려 했는데. 유언삼아 일러두는 게니 잘 들어뒀다 어김없이 시행토록 해라. 나 죽거든 내가 느이 오래비한테 해준 것처럼 해다오. 누가 뭐래도 그렇게 해다오. 누가 뭐라든 상관하지 않고 그럴 수 있는 건 너밖에 없기에 부탁하는 거다” “오빠처럼요?” “그래, 꼭 그대로, 그걸 설마 잊고 있진 않겠지?” “잊다니요. 그걸 어떻게 잊을 수가……” 어머니의 손의 악력은 정정했을 때처럼 아니, 나를 끌고 농바위 고개를 넘을 때처럼 강한 줏대와 고집을 느끼게 했다. 오빠의 시신은 처음엔 무악재 고개 너머 벌판의 밭머리에 가매장했다. 행려병사자 취급하듯이 형식과 절차 없는 매장이었지만 무정부상태의 텅 빈 도시에서 우리 모녀의 가냘픈 힘만으로 그것 이상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서울이 수복되고 화장장이 정상화되자마자 어머니는 오빠를 화장할 것을 의논해 왔다. 그때 우리와 합하게 된 올케는 아비 없는 아들들에게 무덤이라도 남겨줘야 한다고 공동묘지로라도 이장할 것을 주장했다. 어머니는 오빠를 죽게 한 것이 자기 죄처럼, 젊어 과부된 며느리한테 기가 죽어 지냈었는데 그때만은 조금도 양보할 기세가 아니었다. 남편의 임종도 못 보고 과부가 된 것도 억울한데 그 무덤까지 말살하려는 시어머니의 모진 마음이 야속하고 정떨어졌으련만 그런 기세 속엔 거역할 수 없는 위엄과 비통한 의지가 담겨 있어 종당엔 올케도 순종을 하고 말았다. 오빠의 살은 연기가 되고 뼈는 한 줌의 가루가 되었다. 어머니는 앞장서서 강화로 가는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우린 묵묵히 뒤따랐다. 강화도에서 내린 어머니는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서 멀리 개풍군 땅이 보이는 바닷가에 섰다. 그리고 지척으로 보이되 갈 수 없는 땅을 향해 그 한 줌의 먼지를 훨훨 날렸다. 개풍군 땅은 우리 가족의 선영이 있는 땅이었지만 선영에 못 묻히는 한(恨)을 그런 방법으로 풀고 있다곤 생각되지 않았다. 어머니의 모습엔 운명에 순종하고 한을 지그시 품고 삭이는 약하고 다소곳한 여자 티는 조금도 없었다. 방금 출전하려는 용사처럼 씩씩하고 도전적이었다. 어머니는 한 줌의 먼지와 바람으로써 너무도 엄청난 것과의 싸움을 시도하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그 한 줌의 먼지와 바람은 결코 미약한 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어머니를 짓밟고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어머니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분단(分斷)이란 괴물을 홀로 거역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어머니는 나더러 그때 그 자리에서 또 그짓을 하란다. 이젠 자기가 몸소 그 먼지와 바람이 될 테니 나더러 그짓을 하란다. 그후 삼십 년이란 세월이 흘렀건만 그 괴물을 무화(無化)시키는 길은 정녕 그짓밖에 없는가? “너한테 미안하구나, 그렇지만 부탁한다” 어머니도 그짓밖에 물려줄 수 없는 게 진정으로 미안한 양 표정이 애달프게 이지러졌다. 아아, 나는 그짓을 또 한번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머니는 아직도 투병중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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