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령고등학교 로고이미지

지역사회 연계 프로그램

RSS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카카오톡 공유하기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네이버밴드 공유하기 프린트하기
지역사 교과서 제작 마을 탐방 원평지 마을 5
작성자 *** 등록일 18.04.18 조회수 105
첨부파일

전통문화가 잘 간직되고 자부심이 넘치는 원평지 마을

 

원평지마을 유래

원평지(元平地)마을은 마령면에서 큰 마을로 삼국시대 백제의 영현으로서 당시 완산주 99현 중의 1현으로서의 마돌현(馬突縣)때부터 이뤄지기 시작한 마을이다. 지금은 전답으로 변했지만 당시의 현터, 옥터, 빙고터, 사정터 등이 있으며 고인돌이 발견된 마을이다. 옛날에는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마을 뒷산 산세에 따라 청옥동(靑玉洞), 평동(平洞), 용동(龍洞)이라고도 불렀다. 또한, 상평지(上平地), 하평지(下平地)라고도 불렀고, 은행골이라고 부른 적도 있다고 한다. 원평지 마을은 현이 설치된 지역이었다가 조선 태종 13(1413)에 진안에 딸려 폐현이 되었다. 마을 뒤쪽 큰 정자나무가 있는 곳이 옛날 현청이 있었던 곳이다.

원평지마을 입향조와 역사유적

원평지 마을은 괘양산 기슭에 위치하며 들판 건너편으로는 백마강이 흐른다. 척골에서 내려온 물은 마을을 지나 섬진강으로 유입된다. 입향조는 함양인 오형(吳珩), 청주인 한유량(韓留良), 흥덕인 장한종(張漢宗), 천안인 전종탁(全宗鐸), 장흥인 고덕진(高德鎭), 경주인 최이봉(崔二鳳) 등이 원평지 마을에 들어와 살았다. 마을에는 용계사(龍溪祠)와 방앗간 옆에는 오성복·오형을 모신 정려각이 있다. 그리고 앞 냇가에는 쌍계정(雙溪亭)과 시루봉 아래에는 만취정(晩趣亭)이 있다. 당산은 윗당산, 아랫당산으로 2군데였는데 마을 앞 들 가운데 윗당산은 은행나무, 아랫당산은 돌탑이었다. 지금은 모두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제일은 음력 정월 초이튿날 밤 1011시경에 시작되어 다음날 닭이 울 무렵에야 끝났다고 하는데 6·25전쟁 무렵에 없어졌다고 한다.

원평지마을 용대기와 들노래

원평지 마을은 음력 정월 대보름날에 달집태우기 행사가 진행된다. 올해는 마을축제 일환으로 짜임새 있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마을회관 앞마당에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과 용대기가 세워져 있다. 그 아래에는 백색, 청색, 홍색의 작은 영기가 세워져 있다. 간혹 불어오는 바람에 용대기의 용과 잉어 거북이 그려진 모습이 보인다. 단기 4,350년 정유년 11월에 만들었다는 기록도 함께 보인다. 본래 원평지 마을에는 용대기가 1957년에 제작된 것으로 많이 훼손되어 작년에 복원한 것이다. 이때 제작된 용대기에는 용과 잉어가 그려져 있다.

정월 대보름 행사를 알리는 풍물굿이 펼쳐진다. 풍물패 마이울림’(회장 송대귀)이 초청되어 원평지마을 터를 다져주었다. 40여 명으로 구성된 마이울림은 마을축제 등 행사에 초청되어 좌도굿을 치며 신명을 돋운다. 과거 풍물은 마을단위로 조직되어 특히 음력 정월초하루부터 대보름날까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터를 다져주었다. 그 흥과 신명이 마을축제 자체였다. 그러나 요사이 쇠소리는 쇠약해지고 더불어 마을도 쇠약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어서 마령들의 소리 행사가 이어졌다. 원평지를 중심으로 마령의 들노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작년에는 진안군의 농요와 민요의 세계가 출간되었는데 그 중심에 원평지 마을 들노래가 있다. 오늘 오길현(36년생) 선생님의 앞소리 가창자로 마을 분들이 함께 들노래가 재현되었다. 오길현 선생님의 소리는 우렁차며 매우 신명이 있다. 그는 들노래를 젊어서 어른들이 하는 소리를 들으며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 사라져가고 있는 상황에서 오늘 이렇게 후세에 남기기 위하여 고군분투하고 계신다. 문화는 오길현 선생님같이 치열함과 열정이 있어 전승되는 것이다. ‘섬마타령’ ‘뚜루마 소리’ ‘매화타령’ ‘싸오 소리’ ‘양산도’ ‘산타령’ ‘늦은 방개타령등은 원평지 마을에서 김매기를 마치고 논에서 나오면서 부르는 논농사 민요다. 벼농사의 기계화로 이제는 CD를 통해서나 들을 수 있으나 원평지 마을에서 지금도 생생하게 신명난 들노래를 들을 수 있으니 이것은 그나마 행운이다.

 

원평지 마을 달집태우기

마을회관 앞에 커다란 달집에 만들어졌다. 가운데 지주목을 세우고 솔가지와 대나무로 만든 달집에는 국태민안(國泰民安), 남북통일(南北統一), 출향인의 건강과 발전을 기원합니다. 그리고 화선지에 소망을 담아 달집에 걸어두었다. 객지에 나간 자식과 손주들의 이름까지 새기면서 한 해 동안 건강을 기원하였다. 달집태우기는 정월대보름을 장식하는 최대의 축제이다. 달이 떠오를 무렵 망월제(望月祭)를 지내기 시작했다. 유교적 전통이 잘 남아 있어서 인지 유교식으로 제를 모시며 달을 맞이하였다. 초헌관 이승호, 아헌관 전태봉, 종헌관 송기우 등이 정성들여 달을 맞이하고 마을과 고을의 안녕을 기원했다. 풍년을 기원하고 행복한 삶을 바랬다. 망월제가 끝나고 달집태우기 축제가 시작되었다. 대보름달은 달집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듯 맞닿아 있는 듯 했다. 달집의 불꽃이 보름달에 닿아 마을사람들의 얼굴이 환하게 비췄다. 마을사람들도 저마다 소지를 올리면서 소망을 기원했다. 멀리서 바라다 본 원평지 마을은 마치 환하게 핀 한 송이 꽃 같았다.

유교의 전통문화가 잘 간직되고 과거 원평지 뜰에서 신명나게 농사짓던 들노래가 지금도 보존되고 용대기를 복원하면서 전통을 간직하며 자부심을 가지고 사는 마을사람들의 삶도 풍요롭기를 기원해 본다.

이전글 지역사 교과서 제작 마을 탐방 평산 마을 6
다음글 지역사 교과서 제작 석교마을과 마령생활사 박물관 탐방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