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학교 둘레길
① 선교사 묘역(해설)
- 음수사원(飮水思源)! 물을 마실 때 물의 근원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매사에 근본을 잊지 않음을 일컫는 말이다. 선교학교인 신흥학교의 뿌리와 정체성을 찾으려면, 신흥학교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모색하려면 선교사 묘역에 가야한다. 거기에는 죽음의 무구유언(無口有言)으로 삶과 신앙의 진실을 간증하고 있는 성경 17권이 놓여있다. 전주 땅에서 가장 ‘외롭고 높고 쓸쓸한’ 풍경이 고즈넉하다.
예수병원 큰길 건너편 화산 자락에는 선교사 묘역이 예수병원과 예수대학을 바라보며 북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호남 지방에 복음과 근대 교육과 의료의 씨앗을 뿌린 선교사와 그 자녀 등 17분이다.
안내판에 표시된 A묘는 리니 데이비스 해리슨(Linnie Davis Harrison, 1858~1903).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송한 호남 최초의 선교사 그룹인 ‘7인의 선발대(Seven Pioneers)’의 한 사람으로 7인의 선발대 중 가장 먼저 순교했으며 한국에 올 때 34세의 독신 여성이었다. 한국에 도착해 서울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파했으며 1896년에 군산으로 부임해 어린이와 부녀자를 상대로 선교활동을 했다. 이후에 신흥학교 초대 교장이 되는 의료 선교사 윌리엄 해리슨(William B. Harrison, 한국명 하위렴)과 1898년에 결혼한 뒤 해리슨이 활동하던 전주로 이사했다. 데이비스는 최초의 신흥인인 김창국에게 전주 최초의 근대교육을 실시하였고, 김창국은 그녀의 주선으로 평양 숭실중학교에 진학하여 1907년에 졸업할 수 있었다. 신흥학교의 산파(産婆) 역할을 했다.
데이비스는 전주에서 사역하던 중 여성 환자를 방문하였다가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1903년 6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결혼한 지 채 6년도 안된 45세의 젊은 나이였다. 데이비스는 전주에 안장되었다가 해리슨이 군산으로 옮겨 갈 때 군산선교부가 있던 구암동산으로 이장했다. 그러나 그곳이 매각되면서 전주 선교사묘역인 현 위치로 다시 이장되었다.
B묘는 윌리암 맥크리 전킨 (William McCleary Junkin, 1865~1908). 윌리암 전킨(한국명 전위렴) 선교사는 ‘7인의 선발대’의 한 사람으로 1865년 미국 버지니아 주 크리스천버에서 태어나 워싱턴 대학과 유니언 신학교를 졸업했다. 전주를 최초로 방문하여 호남 선교의 터전을 마련했다. 특히 군산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며 군산에서 궁말(구암)교회, 영명학교, 멜본딘 여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1904년부터 1907년까지 해리슨 선교사에 이어 신흥학교 제2대 교장과 1904년부터 1908년까지 전주 서문교회 담임목사를 겸임했고 6개 교회를 더 설립하여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고아원을 지어 어린 영혼들을 보살폈다.
부인 메리 레이번(Merry Leyburn, 한국명 전마리아)은 기전여학교 1대 교장을 역임했다. 윌리암 전킨은 1907년에 과로와 장티푸스 발병으로 1908년 1월 2일 43세의 나이에 전주에서 사망했다. 부인인 메리 레이번 전킨은 남편의 선교를 기념하는 대형 종을 서문교회에 기증했다. 이 종은 미국에서 제작하여 제물포항을 거쳐 전주까지 운반되어 1908년 12월 중순에 서문교회 앞에 종각을 지어 사용했다. 1944년 일제는 이 종을 군수물자로 징용하여 빼앗아 갔다. 해방 후 다시 종을 제작하여 종각을 세웠다. 그리고 훗날 선교부는 ‘전킨의 공적을 기리고 기념한다’는 뜻으로 여학교 이름을 ‘기전(紀全) 여학교’라고 이름했다.
전킨의 묘비 앞쪽 바닥에 직사각형 돌이 3개 있는데, 비바람에 글씨가 희미해졌지만 자세히 보면 각각에 새겨진 영어 글씨가 보인다. 풍토병으로 세상을 얼마 살지 못하고 떠난 큰 아들 조지(George, 1893~1894)와 둘째 시드니(Sidney, 1899~1899), 그리고 셋째 프랜시스(Francis, 1903~1903)의 이름을 새긴 묘석이다.
윌리암 전킨은 자신과 어린 세 자녀를 하나님께 바쳤다.
C묘는 데이비드 씨 랭킨 (David C. Rankin, 1847~1902). 미국 장로교회 해외선교부 실행 위원회 보좌역 담당으로 55세에 사망했다.
D묘는 윌리암 랜캐스터 크레인 (William Lancaster Crane, 1963~1966). 폴 크레인(Paul Shields Crane, 한국명 구바울)의 아들이다. 폴 크레인은 미국에서 태어나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의 존스홉킨스 의대를 졸업하고 1947년에 예수병원에 와서, 예수병원 7, 9, 11대 병원장으로 22년간 활동했다. 1948년에는 한국 최초로 체계적인 수련제도를 도입했으며 1950년에 간호학교를 완공했고 애양원에 가서 나환자를 치료하기도 했다. 1954년에 4층, 156병상의 병원을 신축하고 최신 장비를 갖추었다. 1964년에 수술 환자인 여아의 몸에서 1,063마리 회충이 나온 수술 집도 후 큰 충격을 받고 전국의 기생충 박멸과 암 치료에 공헌한 한국 의학계의 탁월한 의료 선교사였다.
E묘는 미첼 자녀 (Mitchell’s son, 1950.2.19.~1950.2.22.).
F묘는 윌리암 에이 린톤 자녀(W. A. Linton’s daughter, 1930~1930). 윌리암 린톤(한국명 인돈)은 네 아들을 낳고 딸을 낳았지만 그 딸은 낳자마자 사망했다. 윌리암 린톤은 호남 선교의 아버지 유진 벨(Eugene Bell, 한국명 배유지) 선교사의 딸 샬롯 벨(Charlotte Bell, 한국명 인사례)과 결혼했으며 교육 사업에 주력하여 신흥학교 교장을 역임했고 기전학교에서도 근무했다. 신흥학교에는 지금도 그를 기념하는 건물인 ‘인돈관’이 서 있다. 그의 손자인 스티브 린톤과 연세대 의예과 교수인 존 올더먼 린톤(John Linton, 한국명 인요한) 형제는 1995년 북한 결핵사업 지원을 위해 유진 벨 재단을 설립하여 북한에 200여 개의 결핵 진료소를 세우고 직접 고안하여 제작한 한국형 구급차를 기증했다. 린톤 가문은 4대째 대를 이어 지금까지 남북한에서 선교와 교육과 의료 봉사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G묘는 윌리암 에이치 클락 자녀(William H. Clark’s son, 1912~1914). 윌리암 클락(한국명 강은림) 선교사의 아들이다. 윌리암 클락은 전주와 서울에서 선교활동을 했으며 신흥학교에서 1919년부터 1년간 임시 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후에 대한기독교회 총무를 역임했다.
부인은 아다 클락(Ada Hamilton Clark, 1879~1922, 한국명 한예정)으로 서문교회에 피아노를 기증하였고, 이를 계기로 하여 전주에서 서양 음악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다 클락의 미국 친정 부모는 죽은 딸을 기념하기 위해 전주에 여성을 위한 성경학교인 한예정성경학교(한일장신대학교 전신)를 건립했다.
H묘는 헨리 엘 티몬스 주니어(Henry L. Timmons Jr, 1911~1913). 헨리 티몬스의 아들로 태어난 지 22개월 만에 발육정지 증세를 보이더니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사망했다.
헨리 티몬스는 1911년 북 캐롤라이나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페이에트빌에 있는 하이 스미스 병원에서 인턴 과정을 마쳤다. 1912년 한국에 온 그의 첫 번째 임무는 다니엘 원장을 돕는 일이었다. 1913년에 순천으로 임지를 옮겨 혼신의 힘을 다해 봉사하던 티몬스는 1916년에 자신의 풍토병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건강을 회복한 그는 1922년 6월에 예수병원 5대 원장으로 부임했다. 그해 1년 동안 진료 환자 수는 입원 연 인원 5,165명, 외래 8,715명, 수술 622건이었으며 기도회 365회, 예배 313회로 환자 진료와 선교 양면에 헌신적인 활동을 했다. 그는 예수병원 설립자 잉골드처럼 의료의 궁극적인 목적을 영적 구원으로 여기고 대부분의 환자를 무료로 치료하며 인술을 베풀었다. 1926년에 미국으로 귀국했다.
I묘는 마티 잉골드 자녀(Mattie Ingold Tate’s daughter, 1910~1910). 마티 잉골드(Mattie B. Ingold)는 예수병원 설립자이자 초대 병원장이다. 30세 처녀의 몸으로 1897년 9월 14일 홀로 한국에 도착하여 가난한 환자들을 28년 동안 돌보고 섬겼다. 1905년에 루이스 테이트(Lewis B. Tate) 선교사와 결혼했으며 5년 뒤인 1910년에 출산한 아기는 사산아였다. 잉골드는 그 당시의 비통한 심경을 일기에 표현했다. “9월 15일 우리 아기가 사산되었다. 그것은 깊은 슬픔이었고 우리에게 낙심천만한 일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데…… . 잃은 우리 아기가 너무 보고 싶다.” 2018년 예수병원에서 설립자인 잉골드를 기념하여 「마티 잉골드 일기」를 발간했다.
J묘는 로라 메이 피츠(Laura May Pitts, 1879~1911). 미국 북 캐롤라이나주 콩코드 출신 간호사로 1910년 8월 다니엘 의사와 함께 봉사하기 위해 전주 예수병원에 왔다. 미국에서 11년간 간호사 생활로 경험이 많은 그녀는 한국에서 아픈 선교사를 간호했다. 1911년 2월 13일 말을 타고 광주로 가던 중 하천다리가 무너져 말이 다리 아래로 떨어졌으나 다치지 않았는데, 정읍 인근 천원 마을에서 잠을 자다 사망했다. 당시 피츠의 나이는 32세로 간호선교사로 전주에 온지 6개월 만의 일이다. 묘비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는도다”라는 성구가 새겨져 있다.
K묘는 넬리 비 랭킨(Nellie Beckwith Rankin, 1879~1911). 1907년에 전주에 온 랭킨(한국명 나은희) 선교사는 기전학교 2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6명으로 시작한 학생을 41명으로 증가시켰다. 또한 고등과와 교목제도를 두는 등 여성 교육에 힘쓴 인물이다. 1911년 8월, 맹장염 수술 후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교장 취임 4년만의 일이며 32세의 젊은 나이였다. 묘비에는 “네가 죽었느냐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나니라”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L묘는 프랭크 고울딩 켈러(Frank Goulding Keller M.D., 1912~1967). 프랭크 켈러(한국명 케일락)는 전주 예수병원 8, 10대 병원장을 역임했다. 켈러는 소아과 의사로 선교부의 예수병원 의료진 보강요청에 따라 자원하여 1955년 5월 29일 전주에 도착했다. 이듬해 봄 예수병원 콘센트 예배당에서 간호사 자넷 탈마지와 결혼했다. 예수병원은 6.25전쟁 후 버려진 아이 40~50여 명을 탁아소에 수용해 돌보았다. 1957년 9월에 메리 실(Mary Batchelor Seel, 한국명 설메리) 부부가 안식년으로 미국을 떠나자 켈러가 병원장을 맡았다. 일시적 허혈성 뇌출혈이 발생한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고 예수병원으로 다시 와 부원장의 책임을 맡아 의료 선교에 헌신했다. 1960년 예수병원을 증축하여 160병상으로 확장했다. 1967년 1월 늦은 오후 켈러가 언덕길을 산책하던 중 갑자기 쓰러졌다. 데이비드 존 실(David John Seel, 한국명 설대위) 박사의 큰 딸 제니퍼가 발견해 예수병원으로 옮겨 폴 크레인(Paul Crane, 한국명 구바울) 박사와 설대위 박사가 심폐 소생술을 시도했지만 그는 끝내 소생하지 못하고 55세 나이로 사망했다.
M묘는 박영훈(Y. H. Park M.D, 1917~1972). 한국 전쟁 때 북한에서 피난 내려와 외과와 신경외과 의사로 봉사했다. 예수병원 신경외과 과장을 역임한 박영훈 장로의 묘비에는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는 말씀이 새겨져 있다.
N묘는 해진(Hae Jin). 존 폴타(John W. Folta, 한국명 보요한) 선교사가 돌본 한국인 고아이다. 존 폴타는 1955년 미국 남장로교의 파송을 받아 전쟁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은 한국에 왔다.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된 부인과 5개월 된 딸을 데리고 광주에서 6년, 전주에서 34년간 선교활동을 하고 1995년 은퇴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