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나온 편지140(20241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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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송창우 | 등록일 | 24.10.21 | 조회수 |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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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온 백마흔 번째 편지, 2024년 10월 21일 월요일에
기적 / 조향미
햇살 좋은 창가 통통한 고구마 하나 물그릇에 담갔다 고구마는 밋밋한 온몸이 씨눈이었던지 여기저기 빨긋한 싹이 돋아 며칠 새 푸른 넝쿨 넘실넘실 피어오른다 누가 자아내실까 이 무성한 넝쿨을 저 둥글 길쭉한 탄수화물 덩어리 혼자서 이런 엄청난 조화를 부릴 리야 햇빛과 물과 공기의 부조도 있겠지만 그들은 또 어디로부터 솟아났을까
나무들은 한자리서 꼼짝 않고도 싹 틔우고 꽃 피우고 열매 맺는다 아무 데도 작동 버튼 안 보이는데 개미도 강아지도 사람도 밥 먹고 똥 싸고 잠자고 새끼 낳는다 냄새 맡고 소리 듣고 울고 웃는다 무엇으로 이 만법이 돌아가는지 놀랍고 신비한 일
우주선보다 컴퓨터보다 복제양보다 신기하고 경이로운 일은 점심시간 축구공처럼 운동장에서 튀어 오르는 우리 학교 머슴애들이다 십몇 년 전 뒤뚱거리던 그 돌잡이 아가들 쑥쑥 자라는 고구마 넌출들이다
『처음엔 삐딱하게, 김낙극 외, 창비교육, 2015』에서
▷ 기적을 파는 할머니가 있었어요. 눈물이 다 마른 사람만이 기적을 살 수 있었답니다. 마지막 눈물 한 방울이 할머니한테 기적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가격이었고요. 그러니 아무나 기적을 사러 올 수는 없었지요. 깊은 산비탈 오두막에 사는 할머니 집에는 사람들 발걸음이 끝없이 이어졌어요. 오는 사람마다 마지막 남은 눈물을 흘리며 과거의 절망을, 어제의 끔찍함을, 아니 방금 여기 오기 전의 죽음을 하소연했어요. 잔디 씨는 연인의 죽음을 한탄했습니다. 나리씨는 동생의 끔찍한 죽음을 쏟아놨어요. 천리향 씨는 절친한 친구의 마지막 투병을 이야기했어요. 달래 씨는 아찔한 사고로 죽음에 이른 망가진 몸을 보여줬습니다. 이팝나무 씨는 무서웠던 어린 시절로 어둠 속을 살아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낱낱이 늘어놨어요. 국화 씨는 젊은 자식의 죽음을 갈라진 목소리로 얘기하며 할머니께 기적을 보여주기를 간구했답니다. 할머니는 작은 오두막에 달려온 사람들을 앉히고 이야기를 하나하나 들었습니다. 잔디 씨 이야기를 나리씨, 천리향 씨, 달래 씨, 이팝나무 씨, 국화 씨와 잔디 씨 손을 꼭잡고 들었습니다. 나리씨 아픔을 잔디 씨, 천리향 씨, 달래 씨, 이팝나무 씨, 국화 씨와 같이 나리 씨 등을 토닥이며 들었습니다. 천리향 씨 이야기를 잔디 씨, 나리씨, 달래 씨, 이팝나무 씨, 국화 씨와 함께 천리향 씨를 할머니 품에 안고서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달래 씨, 이팝나무 씨, 국화 씨 이야기도 그렇게 서로서로 듣게 되었지요. 그때 어디선가 꽃잔디 향기가 나는 듯했습니다. 나리꽃 향기가 스멀스멀 떠돌았습니다. 천리향 내음이 머리를 맑게 했습니다. 달래향이, 이팝나무꽃 향기가, 알싸한 산국화향이 코를 찔렀습니다. 그리고 모여 있던 잔디 씨, 나리씨, 천리향 씨, 달래 씨, 이팝나무 씨, 국화 씨의 말랐던 마지막 눈물에 꽃이 피었습니다. 꽃향기는 어느새 그들이 살던 곳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꽃향기를 따라 다시 돌아가는 꽃씨들 발걸음이 닿는 곳에는 온갖 꽃들이 그들을 배웅하고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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