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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신흥학교 폐교기념일 지정에 관하여
작성자 김용언 등록일 25.10.14 조회수 24

전주신흥학교 폐교기념일 지정에 관하여...

 

 

한강이남 최초의 근대식 학교, 전주신흥학교.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서원로 399(중화산동1188) 소재.

 

 

전주신흥학교 신사참배 거부 및 자진폐교의 배경

 

  신사참배는 당시 모든 학교 학생들에게 일본에 대한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실시한 것인데, 신사참배 의식은 한 집단의 지도자가 신사 앞에서 박수를 세 번 치면 학생들이 위폐를 모셔 놓은 사당 앞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것으로 치러진다. 그리고 박수를 친다는 것은 사당 안에 있는 영혼들을 깨워 인사를 하겠다는 것을 알리는 뜻이고, 인사를 한다는 것은 그 영혼들에게 절대 복종을 하겠다는 표식이었다. 일반학교 학생들에게는 신사참배 의식 자체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미션스쿨 학생들에게는 신사참배 의식이 우상에게 절을 한다는 점에서 큰 문제였고, 이로 인해 갈등이 깊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렇듯 1930년대 있었던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는 선교사들이 세운 미션스쿨과 한국교회에 큰 시련이었고, 신앙을 지켜내는데 큰 걸림돌이었다. 당시 천주교와 감리교에서는 신사참배가 종교적 의식과는 다르게 애국적인 행사로 여기고, 신사참배에 참여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지만 장로교회에서는 신사참배가 일본고유의 종교에 근거한 행위로 여겼기 때문에 신사에 참배를 한다는 것은 우상에게 절을 하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고 여기면서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았다.

 

  더욱이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은 신사참배는 분명히 종교적 의식임을 천명하면서 우상을 숭배할 수 없었기에 강력하게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레이놀즈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가 세운 우리 신흥학교도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지만 조선총독부는 신흥학교에 신사참배를 계속적으로 강요했고, 그로인해 우리학교는 신사참배 압력이 계속되면서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결국 신사참배를 수용하고 학교를 계속 유지하느냐, 아니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학교 문을 닫느냐 하는 문제로 미국 남장로교회 해외선교위원회 총무였던 풀톤(D.Fulton) 목사가 내한하면서, 신사참배를 하고서는 학교를 계속할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신흥학교는 폐교를 목전에 두게 되었다.

 

  193777일 만주에서 중일전쟁(대동아전쟁)이 일어나게 되고, 그 후에 일본은 매월 6일을 애국일로 정하고, 이 날에 모든 학교들이 신사참배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즉 조선총독부는 이날 각 학교의 교사들과 학생들로 하여금 중국에서의 일본군의 승리를 기원하도록 한 조치였다. 전라남북도 지사들은 94일 관내에 있는 학교장들을 소집하여 애국일(6) 행사에 대한 사전 협의를 하는 가운데, 미션스쿨 교장들은 선교회의 결정에 따라 신사참배와 관련한 그 어떤 행사도 참여하지 않을 것을 천명하고, 선교회에서는 학교 교직원들과 학생들에게 이같은 학교의 방침을 전하고, 어느 누구도 학교를 대표하여 신사참배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공포하였다.

 

  하지만 애국일이었던 96일 아침, 일본 경찰은 린튼 교장을 위협하면서 신흥학교 학생들을 강제로 집합시켜 다가공원에 있는 신사(현재 충혼탑 자리)로 강제로 인솔하여 갔다. 강제로 끌려가는 학생들을 보면서 시민들은 착잡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는데, 신흥학교 학생들은 신사 앞에서 참배를 거부하였다. 신사에 대한 경례 구령이 떨어지자 일본경찰들과 관리들만 허리를 굽히고, 학생들은 뻣뻣이 서 있었던 것이다. 일본 경찰이 다시 절을 강요하자 신흥학교 학생들은 이를 거부하고 퇴장함으로써 많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일제의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절개를 지켜낸 신흥인의 기개를 보여준 것이다. 특히 신사참배 거부에 앞장섰던 학생 중에 전영창(거창고 교장) 학생이 있었다. 이렇게 학생들에 의해 신사참배가 거부되자 조선총독부는 신흥학교를 폐교하려고 했지만 이에 앞서 우리 신흥학교는 스스로 자진폐교 청원을 내고, 1937922일 학교의 문을 닫았다.

 

  신흥학교가 개교(1900.9,9)하면서 만37년의 역사를 가지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신앙의 인재를 양성하는 신흥학교로 기틀이 마련될 즈음에, 일제 식민통치의 강압에도 끝내 굴복하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지켜낸 학생들과 교직원들은 1937922일에 눈물겨운 석별의 정을 나누며 비장한 폐교식을 거행하였다. 학교가 폐교됨으로써 전체 학생 246명 중에 197명은 고창보고로 전학을 갔고, 나머지 49명은 학자금(學資金, 학교에 내는 일시금) 150원이 없어서 중도에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는데,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던 학생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일제의 군국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강요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우리 신흥학교는 38년의 장구한 신흥의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는데, 신사참배가 우상숭배라는 차원에서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의 결정에 따라 우리 학교도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이며 당시 학생들과 교사들, 그리고 많은 학부모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학교가 계속되기를 원했지만 최종적으로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써 우상 앞에 절을 할 수 없다는 신흥인의 기개와 기독교 신앙의 정신은 복교(1946.11.26.) 이후에도 지금까지 신흥인의 얼속에 더 큰 신앙의 생명력으로 이어져 가고 있다.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목숨 걸고 일제와 맞서 싸웠던 독립운동으로 인해 고난의 세월이 지나고, 빛을 되찾았을 때, 우리 신흥학교는 다시 문을 열고, 미션스쿨의 사명을 이어감으로 끝까지 우상에게 절을 하지 않고 자진폐교를 했던 우리 신흥인의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고귀하고, 의미가 큰지를 여실히 웅변적으로 증언해 주고 있다.

 

 

전주신흥학교 폐교기념일지정의 의미

 

  전주신흥학교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사람을 기른다.”는 건학이념과 같이, 과거의 선배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목숨 걸고 지켜내며 하나님을 경외했듯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흥인들 역시도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두라 평지에 금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 금신상에게 절을 하도록 명령을 했지만 목숨 걸고 왕의 명령에 반기를 들며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며 신앙의 절개를 지켜낸 성경의 다니엘처럼 세상과 결코 타협하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지켜낸 선배들의 용기와 뜻을 기리기 위해서, 922일을 [폐교기념일]로 정하여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신흥인들이 다니엘처럼 하나님 앞에서 뜻을 정하고, 신앙의 지조를 지켜나가도록 교육하고, 과거 신흥학교의 위대했던 역사를 통해 기독교학교로서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바르게 세워나가는 계기로 삼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우리나라에 폐교기념일로 지정하여 지키는 유일한 학교가 있는데,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교라고 할 수 있는 숭실대학교이다. 숭실대학교 역시도 1938년 당시 조선총독부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고 그 당시에 우리나라에 있던 대학교들 중에서 유일하게 자진폐교를 했던 대학교인데,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았던 숭실대학교 선배들의 용기와 뜻을 기리기 위해 숭실대학교에서는 자진 폐교했던 318일을 폐교기념일로 지정한바 있다. 하지만 우리 신흥학교는 숭실대학교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진폐교(1938.3.18.)한 날보다 훨씬 앞선 1937922일에 자진 폐교했다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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