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해서 지도 그리는 장소세포 존 오키프 교수는 캐나다 맥길대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UCL로 자리를 옮겨 196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먼저 살아 있는 쥐의 해마에 전극을 삽입했다. 그리고는 쥐가 길을 탐색하고 움직일 때 해마의 뇌세포에서 발생하는 전기신호를 측정했다. 쥐가 특정 위치에 도달하자 조용히 있던 해마 신경세포가 갑자기 전기신호를 냈다. 공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신경세포의 존재를 처음으로 확인한 것이다. 그는 이 세포를 ‘장소세포’라고 불렀다. 장소세포는 주위의 장소세포와 협력한다. 광화문에 처음 갔다고 생각해보자. 길을 잃지 않으려면 이순신 동상, 세종문화회관, 경복궁 등의 위치를 수집해 머릿속 지도를 만드는 게 우선이다. 이때 각 장소마다 다른 장소세포가 전기신호를 만들어 위치를 기록한다. 이 세포들이 모여 머릿속 지도가 된다고 오키프 교수는 생각했다. 그는 1971년 학술지 ‘브레인 리서치’에이런 이론을 발표했지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실험에 오류가 있다, 쥐의 후각이 위치 파악에 얼마나 중요한지 간과했다고 비아냥거리는 이도 있었다. 당시에는 뇌세포의 전기신호로 동물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이 무척 생소했다. 그러나 후속 연구가 꾸준히 이뤄지면서 해마가 장소정보를 처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점차 인정받았다. 런던의 택시 운전기사는 시내의 작은 골목을 비롯해 수천 개의 길 이름을 지도 없이 외우는 시험을 통과해야한다. 시험에 합격한 운전기사의 해마를 시험 전후로 비교했더니 시험 후 커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뇌는 어떻게 지도를 그릴까? 격자세포와 장소세포는 인간과 쥐의 머릿속에서 협동해 지도를 만든다. 해마의 장소세포는 공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내비피질의 격자세포는 육각형 모양을 띠며 효과적으로 정보를 수집한다. 혼자서 정보를 처리하는 격자세포 모세르 부부는 오키프 교수의 연구를 한 단계 발전시켰다. 장소세포의 정보처리를 돕는 ‘격자세포’를 발견한 것이다. 과학자들은 1990년대까지 위치 정보처리는 해마에서만 이뤄진다고 생각했다. 모세르 부부는 해마가 아닌 다른 곳에도 길 찾기에 관여하는 세포가 있다고 생각했다. 오키프 교수가 발견한 장소세포가 정보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주변 환경에서 시각, 청각, 촉각 등의 감각 정보를 받아야 하는데 장소세포 혼자서는 이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키프 교수에게 전기신호 측정 기술을 직접 배운 모세르 부부는 해마에 정보를 전달하는 기관이 내비피질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2004년에는 내비피질에도 해마의 장소세포처럼 특정 장소에 가면 반응하는 신경세포가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 이 신경세포는 장소세포와 달리 하나의 넓은 공간을 혼자서 처리했다. 넓은 원형 박스 안에서 쥐를 돌아다니게 하고 전기신호를 측정했더니 하나의 내비피질 세포가 여러 장소에서 전기신호를 나타냈다. 각각의 장소세포가 이순신 동상, 경복궁 등을 하나씩만 맡았던 반면 내비피질 세포는 광화문 전체를 혼자 책임진 것이다. 모세르 부부는 2005년 하나의 내비피질 신경세포가 전기신호를 만드는 지점들이 일정한 간격과 각도를 두고 떨어져 있다는 사실도 밝혔다. 이 지점들을 이어보니 각 선이 60˚를 유지하며 6개의 정삼각형들로 이뤄진 매우 정교한 정육각형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장소세포에서는 볼 수 없던 격자무늬다. 모세르 부부는 이 세포를 격자세포라고 이름 지었다. 정육각형 모양의 격자세포 신호패턴은 수학적으로 매우 흥미롭다. 실제로 벌집은 정육각형이 붙여진 모양인데, 이는 최소한의 재료로 최대한의 공간을 만들어 가장 많은 꿀을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격자세포도 최소의 격자세포 지점으로 최대한 많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계산하기 위해 정육각형의 배열을 이용한다. 격자세포는 공간에 민감해 만약 전체 공간이 조금이라도 바뀌면 격자세포가 신호를 만드는 패턴도 미세하게 바뀐다. 격자세포(아래)의 방향이 바뀐 걸 확인할 수 있다. 장소세포와 격자세포의 발견은 뇌가 전기신호를 이용해 어떻게 정보를 처리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연구 분야를 열었다. 현재는 컴퓨터와 수학을 이용해 뇌의 인지능력과 위치 정보처리 과정을 활발하게 연구하고 있다. 임상에서는 치매 치료법을 개발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알츠하이머 환자의 뇌에서 가장 먼저 손상이 오는 영역이 내비피질이다. 알츠하이머의 대표적인 초기 증상이 바로 길을 헤매는 것이다. 노벨상을 받은 부부 모세르 부부는 1983년 노르웨이 오슬로대에서 처음 만나 2년의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부부는 학부시절부터 뇌에 관심이 많아 대학의 유명한 교수에게 직접 찾아가 연구 프로젝트를 따올 정도로 궁합이 잘 맞았다. 모세르 부부는 이번에 노벨상을 함께 수상한 오키프 교수의 실험실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다가 이내 노르웨이의 신생 대학인 노르웨이 과학기술대에 함께 교수로 부임해 격자세포를 발견하게 된다. 모세르 부부는 네 번째 부부 공동 수상이다. 부부가 동시에 노벨상을 최초로 받은 것은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피에르 퀴리와 마리 퀴리 부부다. 마리 퀴리는 1935년 딸 이렌 퀴리와 사위와 함께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다. 두번째 공동 수상은 당연히 퀴리 부인의 딸과 사위다. 세번째 공동 수상은 포도당이 글리코겐으로 바뀌는 과정을 발견한 미국의 생화학자 칼 코리와 거티 코리 부부다. 역시 사랑의 힘은 노벨상도 함께 받을 만큼 위대하다. 1974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한 칼 코리(왼쪽)와 거티 코리 부부 <출처: By Smithsonian Institution from United States@Wikimedia Commons> 정보가 어떻게 쓰이는지는 아직 미지수 나는 현재 고려대 신경계산연구실에서 장소세포와 격자세포를 활용한 전기 생리학실험을 하며 세포들이 어떻게 장소 정보가 담긴 신경신호를 만드는지, 어떻게 장소 기억이 해마의 시냅스에 저장되는지 확인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또 알츠하이머에 걸린 장소세포와 격자세포의 전기신호가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연구해 알츠하이머의 원인도 찾고 있다. 세포의 모양과 반응을 수리적으로 모사하는 컴퓨터 모델도 개발하고 있는데, 이런 연구는 향후 길을 찾는 인공지능 로봇 개발에도 응용될 수 있다. 쥐와 사람 뇌에서 장소와 격자세포가 발견됐지만, 이는 단지 현상을 관찰한 것이다. 장소 정보처리를 위한 신경신호가 어떻게 생성되고, 장소와 격자세포가 장소 정보처리에 실제로 어떻게 쓰이는지는 아직 잘 모른다. 뇌 과학자뿐만 아니라 해부학자, 생리학자, 공학자, 컴퓨터 과학자들의 공동 연구가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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