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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 박은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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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최하은 | 등록일 | 14.11.18 | 조회수 | 761 |
겨울 박 은 솜 D는 약속 장소에 서 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인가? 그는 핸드폰을 귀에서 떨어뜨렸다. 그는 식사와 커피를 겸하는 노천 가게 앞에서 못 박힌 듯이 서 있었다. 통화는 끊겨 있었다. 다시 되돌아갈지를 고민해야 했지만, 입이 마를 뿐 모든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다. 화분이 놓인 파티션 안쪽 커플은 한 컵에 두 개의 플라스틱 빨대를 꽂고(심지어 입김을 음료에 불어 넣기도 했다.) 시시덕대다가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D는 그런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눈앞은 투시도에 따라 한 점으로 모여드는 긴 길이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번화가도, 공원도 아닌 그저 길이었다. 골목은 아니지만, 그가 밟은 곳은 번듯하고 넓지도 않은 도로 옆 보도블록이었고, 때가 탄 회색이었다. 그 덕분에 모든 배색이 어둡고 쓸쓸하게 보였다. 눈이 아플 정도로 하얗게 칠하고, 누가 볼 새라 창문은 그의 하체 크기만 한 옷집. 사방이 유리창인 마트. 그 곁에 경쟁적으로 문을 열어 놓은 편의점. 가늘고 마냥 낭창거리는 가로수. 그리고 눈앞의 모든 것은 그의 관심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는 이제 확실히 결정해야 했다. 그러나 떠오르는 것은 그저 반지 처리에 대한, 그의 기대에 못 미치는 시답잖은 문제였다. 그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연애 경험이 많은 것은 R였다. 그런 그에게 헤어진 후 가장 곤란한 것을 꼽아 보라고 하면 십중팔구 추잡한 미련과 남은 물건을 골랐다. ("여자도 남자도 남은 추억은 언제나 성가시니까요.") 그리고 코멘트를 덧붙이기도 했다. ("헤어지는 것까지 갔다면 더이상 남은 애정이 없다는 거죠. 사정이 어찌 되었든 다시 붙어도 곧 깨질 가능성이 크다는 거에요. 그렇게 간신히 정리해도 뒤늦게 눈물 터지고 붙잡는 케이스는 신물이 날 정도라니까요. 헤어진 그 당시에는 못 느끼는데, 일종의 도피인 거죠, 헤어졌을 리가 없다는 자기방어요. 딱히 그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버리기 아깝다는 이유로 계속 가지고 지내다 다시 정 붙는 사람도 있어요. 감정을 말끔하게 정리했다 해도 사귄지 꽤 되는 사람이면 일단 오고 가는 게 많았다는 뜻이라서, 기억 속에 묻어둔 추억에 잡아먹히는 건 한순간이에요. 뭐. 아닌 경우도 많지만요. 그렇다고는 해도 엄청나게 큰 곰 인형같은 건 태운다 하더라도 처리하기도 귀찮고 짜증 나잖아요?") 최근 K와 함께 지낸다고 제법 해학적인 표현을 섞어 말하던 기억이 났다. 그의 연애관을 가져오기에 R는 너무 가벼운 연애만 골라 했지만,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오늘도 약지에 100일 기념 은반지를 끼우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항상 그랬듯이 반지는 매우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그리고 D는 천천히 수를 헤아려 보았다. 버릇처럼 끝자리가 하나씩 올라갈 때마다 다섯 손끝이 차례로 움찔댔다(S가 지적한 버릇이기도 했는데, 그것을 깨닫자 관자놀이가 싸하게 울렸다.). 1...7...0. 170일. 그는 그 세 자리 수가 많은지 적은지 알 수 없었다. 적지 않고, 많지도 않았다. 10단위 수가 주는 안정감마저 없었다. 그곳에서 생각이 멈춘다. 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지만, 의식은 가위처럼 싹둑거리며 잘도 잘라냈다. 그는 마트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 하얀 비닐봉지와 기네스 세 캔을 샀다. 안주는 없어도 될 것이다. 속이 끕끕하고 목은 거북했다. 그리고 그는 도요타 캠리에 타 시동을 걸었다. 부스럭대는 소리에 귀가 먹먹했다. 차는 출발했고, 엑셀러레이터를 밟을 기분은 나지 않았다. 그렇지 않은가? 사람들은 그러한 일들을 너무나도 멀리 생각한다. 당장 D만 해도 S와 헤어지는 것이 눈앞에 닥칠 가능성은 어디서나 존재했다. 그리고 그 날이 오늘이 될 확률도 그랬다. 그러나 그는 대개 그렇듯이 그런 위험에 무방비하게 자신을 방치했다. 왜냐하면 당장 어젯밤만 하더라도 그들은 손을 맞잡았고, 사랑을 속삭였고, 또 한 침대에서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을 속삭인 것도 그랬다. D는 지금껏 S와 만남을 가질 때마다 그녀에게 예쁘다는 말을 빼놓은 것이 없었다. 물론 사랑한다 역시 그랬다. 그러나 S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얼마 되지 않는 물건을 쌌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확신 없는 감정으로 섣불리 판단한 불안정한 관계'라는 말을 남겼다. 생각해 보면 그들이 속삭였던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부턴가 반쯤 딱딱하고 반쯤 굳어 있었다. 왜? 언제부터? 언제부터 그들의 사랑은 조금씩 변했을까? 그리고 그는 또 이렇게 생각했다. 이 세상에 확신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있을까? D나 S, 혹은 그들이 아는 사람(친척이나 그들의 가족도) 갑자기 슈퍼맨이 되는 터무니없는 가정마저 완전한 제로의 가능성을 가지지는 않는다. D는 그런 말도 떠올렸다. 0이 될 수 없어도 그에 한없이 가까워지는 극한. 리미트. 그리고 그는 늦지 않게 핸들을 꺾었다. 차가 조금 막힐 것 같았고, 곧장 붉은 불이 점열한 덕에 멈춰 섰다. 그리고 D는 핸들을 쥐고 있다가 라디오를 켰다. 이 지역에서 잡히는 채널은 열 개가 되지 않는다. 그마저도 두 개는 종교 방송이었다. 남은 다섯 개는 광고 중이었고 세 개는 클래식이 나왔다. D는 로시니의 도둑 까치 서곡이 흘러나오는 채널에 주파수를 맞추었다. 그는 그야말로 취향에 맞는 것이라면 장르를 가리지 않고 들었다. 도둑 까치 서곡은 D보다 S의 취향에 가까웠지만 D는 라디오를 끄지 않고 그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들었다. 습관은 그런 식으로 아직도 건재했다. 볼륨을 키우자 드럼 소리가 갈비뼈 안에서 뭉그적거렸다. D는 두어 번씩 숨을 골라 쉬었다. 창밖은 이제 완연한 노을이 흘렀다. 그러다 보면 S의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K 역시 붉은 머리카락이었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노을은 언제나 S였다. 그 뒤에 푸른 저녁이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S는 학창시절에 단 한 번도 겨룬 적이 없었다. 그래도 D는 언제나 자신이 S를 이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단지 그런 녀석이기 때문이었다. 그저 승리가 그 자체인 사람이었고, 그런 전제하에 S가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언제나 불안정하지만 가장 최상위 계층에 속해 있었다. 불안정하다는 D의 생각이고, S는 단 한 번도 학생 회장과 반장 등에 거론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살아왔고, 삶은 언제나 그래야 했기 때문이었다. S에게 시간은 그런 식으로 흘렀다. 그리고 D는 최저 커트라인을 맞춰 특례로 입학할 수 있었다. 프로 농구 선수로 뛸 준비를 마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나온 젊은이였고, 정말이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세상에 넘쳐나는 건 돈과 여자였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D를 오래 붙잡지 못했다. 그래서 D는 S에게 고백을 했고, 둘은 사귀기 시작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그는 되새긴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사방이 어두워졌다. 이미 노을의 향연은 끝나 버린 것이다. 그는 주차장에 멋대로 차를 세우고, 그럼에도 페인트칠 된 흰 선 안에서만 비틀어진 타이어를 보았다. 어떻게 세우든 정해진 구역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 삶이었다. S의 삶에 패배의 한 줄이 그어졌다 해서 그가 S가 아닌 다른 물건으로 변형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는 그 뒤로도 여전히 S였다. 모범적이고 완벽한 학생. 그런 틀 안에 S가 있었다. 그리고 그 어절은 페인트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하고 견고했다. 오롯이 S가 쌓아 올린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무던히 노력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끝내 돌아서지 않았다. 아마 영영 그럴 것이다. D는 뒤늦게 재채기를 하고 몸을 떨었다. 차 안은 분명 추웠는데(손은 감각이 없었다.), 그는 그마저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입김이 뿌옇게 흐려지다가 허공에 스몄다. 모든 것이 평소와 같았다. S와 데이트를 끝내고(사실 그건 데이트라기보다 같은 식당에서 한 테이블에 앉아 식사했다는 쪽이 더 정확했다.) 그의 원룸에 돌아올 때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석 달 전은 여름이었으므로, 그가 습습한 살갗에 라운드 티의 목 부분을 펄럭이며 차가 잘 주차되었는지 살폈던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같았다. 심지어 소리마저도 그랬다. 이럴 때면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 사이로 텅. 소리가 났다. 이렇게 평온해도 되는 걸까? 사실 그는 겁을 먹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너무나도 부드럽고 평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헤어졌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약지를 내려다보았다. 반짝이는 은반지는 무늬랄 것이 없었다. 사실 반지 자체도 100일이 되자 어영부영 맞춘 것이었다. 딱히 챙긴 것도, 무관심한 것도 아닌 어정쩡한 날이 그들의 100일이었다. S는 반지를 맞추자고 했고, 그래서 그들은 반지를 샀다. 직원이 보여준 카다로그 중 가장 무난하고 심플한 걸 두 개 구매했는데, 심지어 커플용도 아니었다. D는 자신이 반지를 잘 끼고 다닐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연습과 시합을 제외하고 언제나 반지를 꼈다. 의무처럼 단호한 얼굴로, 항상 약간씩 올라간 반지를 약지에 걸고 다녔다. 반지는 갑갑하지 않도록 넉넉하게 맞추려다 너무 큰 것으로 고르는 바람에 항상 제 위치를 벗어나 있었다. 그래도 두 번째 마디를 벗어나지 않았다. D는 자주 반지를 확인하며 안쪽으로 끌어올렸다. 때로는 옷자락(혹은 수건)으로 닦아 주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S의 반지는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둘은 만날 때마다 서로의 약지에 반지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마저도 시야에 들어올 때였고 대개 침묵했다. 그는 아직도 그 이유를 몰랐다. 마치 입에 올리면 터지는 시한폭탄처럼 반지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S의 반지는 항상 깨끗할 것이다. 그녀가 그렇듯이 그녀의 물건들은 제자리에, 언제나 그 위치에 완벽한 상태로 존재했다. 그러나 D는 문득 S의 반지가 더러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S가 마지막 통화에서 '애정이 없음에도 붙잡고 있는 것은 네가 가장 싫어하는 혐오스럽고 구질구질한 행위'라고 했기 때문이다. 애정이 식은 것은 S였고, 이별을 통보한 것도 S였다. 합리적이고 깔끔한 끝이었다. 그러나 D는 혐오스럽고 구질구질한 행위라 칭한 적이 없었다. S는 왜 그것이 D가 한 말이라고 생각했을까? 어쩌면 그것은 색칠된 S의 생각일 지도 몰랐다. 그녀는 불확실하고 모호한 것을 싫어했다. 사랑을 어떻게 확신하겠는가? 하물며 그녀의 이론 대로라면 그녀의 불리가 는 마침내 걸음을 옮겼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머리가 다시 싸했다. 원치 않는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것처럼. 온몸이 텅 빈 듯이 팔다리가 이상하게 흔들렸다. 정신을 차려 보면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기계음을 듣고 있었다. 그는 부스럭대는 비닐봉지를 추슬러 올리고 도어락을 해제했다. 절대 잊어버리지 않도록 S의 생일 네 자리 수로 지정한 것이 170일째였다. 들어선 집 안은 차갑고 무뚝뚝했다. D는 제집이 아닌 것처럼 두리번.대고 스위치를 올리지 않은 채 어둠 속을 헤집었다. 창밖은 어두웠고, 소파 팔걸이 위에 놓인 리모콘을 찾아 텔레비전을 켰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쏟아져 나오며 열심히 귀를 때렸다. 그러나 D는 감흥 없이 기네스를 땄다. S는 술(그녀는 기호식품 카테고리에 속한 모든 것들을 좋아하지 않았다.)을 멀리하는 사람이었고, D는 시간이 나면 가볍게 취하거나 맥주를 마시며 보냈다. 그의 집에 기네스 전용 잔이 단 하나뿐인 것도 그랬다. 그러나 그 잔은 이미 어젯밤 싱크대에 넣어 버렸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었다. 그는 캔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리모콘을 내려놓은 채 가죽 소파에 등을 기댔다. 생각해 보면 이 소파도 S와 함께 산 것이었다. 예전 것은 쿠션이 다 내려앉고 흠도 많았다. 속살이 드러난 팔걸이를 보던 S는 D와 함께 가구점에 들렸다. 그들은 함께 디자인을 고르고 D가 정한 돈 내에서 가장 실용적인 것을 선택했다. D는 어떠한 물건을 소중하게 다루는 성정이 아니었지만, 이 소파는 100일이 넘었는데도 흠 하나 없었다. 그녀는 소파를 주의깊게 살피거나 각별한 노력을 하지는 않았지만, 가끔 마른 걸레로 먼지 쌓인 인 부분을 닦어 주곤 했다. S는 D의 집에 올 때면 식사 준비를 하거나 현관에서 그를 기다렸다. 언젠가 이런 질문을 했던 것도 같다. "왜 나야?" "왜 내가 좋아?" D가 질문을 하는 순간 S 역시 그래야 했다. 어딜 사든 손가락만 터치 할 수 있다. 반지도, 소파도. S도 그랬다. 그녀가 답변으로 뭐라고 했더라? D는 불현듯 뒤통수를 때리는 이질감을 느낀다. 정말로 S와 헤어졌다면, 그는 이제 아침마다 S에게 전화할 수 없었다. 시합 결과를 알려 주지 않아도 누구보다 가장 먼저 알아내어 축하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건 D에게, 맥주를 마실 때 이야기가 끊기지 않도록 말을 던지는 S, 가끔 무리하게라도 일정을 몰아넣은 채 밤낮으로 일을 해서 충혈된 눈으로 문을 두드리는 자신의 연인, 그리고 그런 그에게 입을 맞추는 그가 더는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D가 S를 떠올리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모든 것에 그가 있기 때문이었다. D는 흑맥주를 반쯤 비우고, 리프트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캔이 절반 정도 차 있고 나머지는 비어 있는 소리를 냈다. 좁고 둥그런 입구 밖으로 몇 방울이 튀었다. 그마저도 생소했다. 자국을 닦는 창백한 손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볐다. 무엇을 버려야 할지 몰라 마른세수를 했다. 태울 수도, 버릴 수도 없는 것이 그의 주변에 너무나 많았다. 모두 S가 있기 때문이었다. 목구멍은 여전히 텁텁하고 썼다. 보일러를 돌리지 않은 바닥과 가죽 소파가 체온을 앗아갔다. 온통 시커먼 집에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네가 없고, 온기가 없고, 빛이 없었다. 그는 마침내 비명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무슨 소용인가? 그는 S와 이별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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