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샘(문예창작)

글샘

*글이 끊이지 아니하고 솟아 나오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꿈과 글이 샘솟는, 문예창작 동아리 입니다.

검은, - 박연정

이름 최하은 등록일 14.11.18 조회수 760

검은,

박 연 정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아주 검었다. 수심을 가늠할 수 없는 눈동자의 깊이, 잘록한 허리 끝까지 제멋대로 날이 선 머리카락, 그리고 필히 가려야 할 곳을 제외하고는 깊게 파인 드레스, 새하얀 얼굴 중 유독 눈에 띠게 짙은 입술 색하며, 그 모든 것들이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극대화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누구도 먼저 나서는 이가 없었다. 일말의 죄책감도 떠오르지 않은 얼굴을 보면서 도리어 자신들이 죄수인 마냥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사이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혼자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그 흔한 안부조차-이 상황이 상대의 안부를 물을 상황이 아닐지라도- 오가지 않는 정적을 참지 못하고 신이 나 자문자답을 할 때엔, 이미 다들 사색이 되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전히 혼자만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나는 죄가 없어요, 단지 ‘아름다운 것’이 갖고 싶었을 뿐이죠, 하며 실실거렸다.

아무도 제 이야기를 궁금해 하지 않는 것 같아서 감히 제가 먼저 말을 꺼낼게요. 그렇게 긴 이야기는 아닐 테니 모쪼록 즐겁게 들어줬음 해요. 거기 잘 적고 있는 거 맞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음, 정말이지 그 여자는 아름다운 여자였어요. 제가 보기에도 눈이 부실 정도였죠. 첫 눈에 반했던 것도 같아요. 아니, 아니지. 처음엔 호기심이었어요. 분명 그 여자가 있는 자리는 밑바닥인데도 붉고 또 붉어서 괜히 탐이 나더라고요. 다들 알잖아요? 자신의 것이 아니면 갖고 싶어지는 심리 말이죠.

아, 그 여자를 처음 본 건 사창가였어요. 처음엔 같은 여자로서 자기 몸뚱이를 헤프게 굴리고 다니는 것이 딱하고 안쓰러웠죠.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더라고요. 그 여자에게 관심이 생기자 그냥 그 여자의 친구가 되고 싶었어요. 뭐, 그땐 다른 이유는 없었죠. 그런데 그 여자 참 재밌더라고요. 무엇보다 가까이서 보니 더 예뻤죠. 당신들도 잘 알다시피, 그 여자가 그 집에서 가장 잘나가는 얼굴 마담이었거든요.

전 그 여자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했어요. 처음엔 절 정신병자 취급하더니 차츰 시간이 지나자 그 여자는 저를 자기 인생의 유일한 친구라고 받아들였어요. 어떻게 알았냐고요? 그 여자가 어느 날 기댈 사람이 저 뿐이라는 말을 했거든요.

그렇게 설렌 적은 처음이었어요. 그때 제 심장이 얼마나 빨리 뛰었는지 당신들이 알 수 있다면, 제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쿵쾅쿵쾅, 하며 방망이질을 하는 게 신기해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 여자에게 다시 말해달라고 했어요. 그 여자, 술에 흠뻑 취해서 몇 번이고 다시 말해주더라고요. 기댈 사람은 너 뿐이야, 정말 너뿐이야, 네가 없으면 난 버틸 수 없을 거야. 아주 솔직한 고백이었어요. 그와 동시에 전 직감했죠. 아마 그건… 사랑이었을 거예요. 아뇨, 틀림없는 사랑이었어요.

제가 사랑에 빠지자, 그 후로는 괜히 그 여자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 괘씸해지더라고요. 질투에 눈이 먼 남자의 마음이 이러했을까요? 물론, 전 여자지만 말이에요. 오래 전 일이라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어요. 우연찮게 그 여자가 젊은 남자를 만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 남자, 그 여자를 밑바닥에서 구원해줄 수 있을 만큼 능력도 좋은 남자였어요. 아주 홀랑 빠져있더라고요. 그 여자도 마찬가지였어요. 제게 말도 없이 식을 올릴 날짜까지 잡아놨더라고요.

하, 처음 사실을 접했을 땐 당연히 화가 났죠.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왜 그녀가 나한테 이런 시련을 줄까, 하고. 굳이 그 여자의 식을 망치진 않았어요. 다만 몇날 며칠을 생각하다보니 어느 순간 궁금증이 일었어요. 미치도록 말이에요, 미치도록.

그 남자, 그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 대체 그 남자가 어떤 남자여서 좋아하는 걸까, 문득 알고 싶어진 거죠.

아아, 그 남자에 관한 건 묻지 말아요. 아무리 방해를 하지 않았다지만 결국 그 여자랑 결혼까지 성공했거든요. 결혼 이야기는 생략하도록 해요. 듣고 싶다고 해도 말해주지 않을 테니 헛수고 말아요. 전 그 생각만하면 온몸이 서늘해지거든요. 오만정이 떨어진다고요, 오만정이. 그 남잔 제 취향이 아니었거든요. 전 역시 그 여자가 마음에 들어요. 지금도 말이죠, 후후.

얼마안가 그 여자의 집에 초대를 받았어요. 그 여자도 뭔가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던 거겠죠. 결혼을 하고나서도 돼지우리 같은 집을 치울 생각도 없이 멍청히 앉아 있는 게 마음이 아팠는데, 웬 일로 나와 같은 검정 옷을 입고 있었어요. 저를 닮고 싶어 하는 티가 나서 웃을 수 밖에 없었죠. 정말 볼품없었어요. 이제와 아쉬움이 남는 건 당시 그 여자가 너무 검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 여잔 검정이 안 어울린다고요. 속내가 빤히 보이는 그 여자에게 검정은 이질적인 색일 뿐인걸요. 그래서 난 짜증이 난 상태였죠.

그런데 그 여자, 내가 들어서자마자 하는 말이 뭐였는지 알아요? “네가 뭔데 내 남편을 꼬드겨?” 허, 나 참. 그 여자의 말은 하나도 맞는 게 없었어요. 그 남자가 그 여자를 데려간 거라고요, 내 여자였는데. 그 여자는 내 것이었다고요!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정말 모순되게도 그 여자는 화내는 것마저 붉어보였어요. 제 말은, 아름다웠다는 소리예요. 마음 같아선 그대로 끌어안고 그 여자의 모든 붉음을 사랑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전 조용히 그 여자의 말을 경청했어요. 정확히는 그 여자의 모습을 마음껏 감상했어요. 초조한 듯 꽉 쥔 두 주먹, 씩씩대는 숨소리, 나를 질타하는 그 가느다란 손가락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말이에요. 황홀할 지경이었죠. 그런데 웬 걸, 그 여자의 한 마디에 제 모든 감상이 부서져버렸어요.

“내 배에 그 이의 아이가 있어, 제발 그 이를 내게 돌려줘.” 그 여자가 말했어요. 상당한 충격이었죠. 심장이 쿵쾅거렸어요. 이대로 죽어버리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단번에 문을 박차고 나왔어요. 차마 그 여자에게 화풀이를 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분노는 밤까지 가시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 남자를 찾아가, 그 남자에게 그 여자와 헤어지라고 말했어요. 하하, 그 남자 무식하더군요. 이토록 쉽게 나에게 빠져서는 그 여자한테 당장 이별을 고할 줄은 몰랐거든요. 당연히 그 남자가 그 여자와 헤어진 뒤에는 제가 그 남자를 차버렸어요. 글쎄, 그 남잔 제 취향이 아니었다니까요. 아마 그 여자도 제가 느꼈던 배신감을 똑같이 느꼈을 거예요. 어쩌면 자신의 아이와 함께 증오심도 키웠을지도 모르죠.

…그렇게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갔어요. 저는 오랜 시간을 방황했어요. 지금에서야 말짱해 보이지만 사랑을 잃은 그 때의 심정은 그야말로…. 이 얘기도 여기까지만 하죠.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더 길어질 것 같이니 말이죠. 어쨌든, 그 여자의 배에서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와 제 발로 사회에 걸어 나갈 때까지 오랜 시간은 인내했어요. 거의 일에 미치다시피 살았죠. 어쩌다보니 제가 잘 나가는 CEO가 되어있는 거 아니겠어요? 놀랄 일이죠. 그러다가 젊고 유능한 신입 사원 중 그 여자의 붉음을 닮은 여성을 발견했어요. 하지만 진짜는 아니었어요. 그것은 똑같이 붉었지만 분명히 다른 붉음이었거든요. 전 우중충하고 다른 것과 뒤섞인 붉음은 취급하지 않아요. 하지만 불현듯 그 여자의 생각이 나게 했죠.

그즈음 그 여자의 소식을 들었어요. 여전히 제 몸을 함부로 하는 법밖엔 모르더군요. 왜 나를 먼저 찾지 않았을까. 내게 미안하다고 먼저 빌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심지어 자신의 배로 낳은 딸도 내팽겨 쳐 놓고 일을 했다고 하는데 순간 부아가 치밀어 올랐죠.

난 정말 그 여자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부숴버리고 싶었거든요? 내 것이기만 을 원했지 다른 것에 속하는 것이 싫었으니까 말이죠. 내가 어떻게 배려를 해서 딸자식을 가만 뒀는데 그 여자, 전혀 감사할 줄을 모르더군요.

눈에 보이는 게 없었어요. 내가 이렇게 일에 미쳐 살 동안 얼마나 그 여자가 보고 싶었는지 당신들이 알까요? 한번이라도 그 아름다움에 심취해 본 사람은 빠져나올 수 없을 거예요. 내가 사회의 최상층에 설 동안 그 여자는 단 한 번도 그 늪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게 그렇게 화가 났어요. 대체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남자가 그 여자를 가졌을까요? 내가 사랑했던 것들인데 어느 누가 제정신이겠냔 말이에요.

당장에 그 여자를 불러냈죠. 아닌가, 그 여자가 막 다른 남자와 침대에서 한참을 뒹굴고 난 후였나. 무작정 문을 열고 들어갔어요. 그 여자, 나를 금세 알아보고 핏발 선 눈으로 나를 흘겨보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여전히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는 나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났고 그 여자가 발가벗은 채로 침대 위에서 나를 원망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처음으로 그 여자가 하얗다고 느꼈어요. 하얗기도 할 줄 알았구나, 하고 느끼다가….

…맞아요, 제가 그랬죠. 어쩔 수 없었는걸요. 순간적인 충동이었어요. 그 여자가 갖고 싶어서, 그 여자가 자신의 붉음을 상품화해서 남에게 나눠주는 꼴을 보느니 혼자 갖고 싶었어요. 더 이상은 제 사랑에 흠집이 나는 걸 바라지 않았죠. 어쩜 그렇게 붉을 수 있는 지 마지막까지 혼자서 붉더군요. 그래요, 그 여잔 죽었어요. 마지막이 되서야 제가 그 여자에게서 가질 수 있던 게 없다는 걸 알았어요. 그 여잔 아름다웠지만 그 아름다움의 만족감을 제게 주진 못했어요. 나는 죄가 없어요, 단지…….

여전히 그녀는 혼자만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나는 죄가 없어요, 단지 ‘아름다운 것’이 갖고 싶었을 뿐이죠, 하며 조금쯤은 목이 멘 듯 울상을 지은 채 실실거렸다.

이전글 The Last Illusion - 최하은
다음글 별 아래, 너의 속삭임 - 최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