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샘(문예창작)

글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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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꿈과 글이 샘솟는, 문예창작 동아리 입니다.

Antifreeze - 1232 최하은

이름 최하은 등록일 13.07.05 조회수 733

 

 

A N T I F R E E Z E



 



● REC 00 : 00 : 00 - 기록 이전의 기록

 

 

「이 지구라는 별 위에서 인간은 눈부신 발전을, 문화를, 사회를 이루어 살아감과 동시에 본디 살아가던 생명을 꺼뜨리고 묻힌 것을 파헤쳐 무성히 우거진 숲을 황량한 벌판으로 만들고 맑은 하늘을 뿌옇게 덮었으며 깨끗한 물을 오염시켰습니다. 이 푸른 별이 계속해서 보내는 위험신호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파헤치고, 파헤치고, 파헤쳐서…… 결국엔 이 별과 인류 모두, 끝을 맞이하게 되었죠.」

 

「지구가 멈추고 영화서도 볼 수 없던 눈이 내렸습니다. 우리는 지금 남극,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에 있으며 우리가 본디 살던 곳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저희로서도 알 길이 없군요. 애석하게도.」

 

흐릿한 화면 속에 남은 남자의 어렴풋한 형체가 웃었다. 덜걱덜걱 화면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바로 섰다. 남자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당신이 영어를 알아들었으면 좋겠는데, 장난스런 목소리가 말문을 트고, 조금 더 진지해진 목소리로 그는 저 먼 훗날 화면 너머에서 저를 마주할 누군가에게 말했다.

 

「먼 훗날에나마 이 기록을 보게 되실 당신께……」





● REC 02 : 59 : 37 - 렌즈 뒤에 나, 그리고





추위에 언 입에서 낮은 목소리를 타고 흐르는, 행성의 흔적들. 귓가에서 흔들거리는 60억년의 역사. 선사시대부터 존재해 온 것들의 모든 기록들을 읊는 네 모습, 네 목소리가 중세의 봉건제에 대한 내용을 읊을 때까지 소요된 시간은 약 세 시간. 그 가늠할 수조차 없는 시간 동안 우리가 이룩한 것의 양은, 비록 반쪽자리일지언정 고작 이 정도.



"……생각보다 빨리 끝나겠다."



나는 카메라 렌즈 뒤에서 바람처럼 속닥거렸다. 카메라를 든 캐시의 보들보들한 머리통은 고요히 앞만을 바라보다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의 텀을 두고, 내 것보다도 옅은 목소리가 낮게 답했다. 그럼, 다른 할 것을 찾아봐야겠네. 어느새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캐시와 눈을 마주치며 나는 살풋 웃으며 대꾸했다.



미치지 않도록, 죽지 않도록, 맞지?

아무런 답 없이, 캐시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다시 앞을 보았다.



 

● TAPE 01 : 1억 개의 별들이 운행을 멈춘 날

 

 

 하루도, 한 순간도 빠지지 않고 기계적인 운행을 일삼던 모든 천체가 멈추었음을 알리는 방송이 전파를 타고 지구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지직거리는 라디오에서 띄엄띄엄 새는 말들을 뒤로 하고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간은 분명 오후였음에도 끝없이 지속되는 까만 밤에 매여버린 풍경이 보였다. 다시는 흐르지 못할 하늘이었다. 저 검은 것이 다시 환한 햇빛을 머금어 빛나는 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오기는 하나, 올 수나 있을까.

 

 밖은 점점 추워지고 있었다. 시설 안으로 옹기종기 들어앉은 우리는 세상에서 완전히 잊힌 듯 보였다. 덕분에 전 세계를 덮은 혼란에 휘말려드는 일은 없었으나, 나날이 조금씩 착실하게도 떨어지는 기온과 한정된 에너지, 언젠가 떨어질 음식들 등으로부터 우리는 그것들을 알기 전보다 한층 더 성큼 다가온 끝을 느낄 수 있었고, 상상할 수 있었다. 살아날 가능성은 극도로 낮았다. 우리는 지구 끝자락에 걸쳐진 얼음덩어리 위의 사람들이었고 한 시간도 못 되어 산 얼음상이 되는 이 매서운 추위와 거센 눈보라에 감히 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갈 수도 없었다. 우리는 그저 죽지 못해 사는 하루를 보내며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을 이어갈 뿐이었다. 관측하고, 기록하고, 실험하고, 토론하는 것들을.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얇은 박 같은 평온 위에서 보내는 나날은 평소보다도 더 평소와 같아 기묘한 위화감을 주었다. 우리는 미쳐버리지 않기 위해 미친 척 태연하게 농을 던지고 잡담을 나눴다. 그 모습을 보고 있다 보면 점점 현실감각이 무디어지는 것 같았으나 언제부턴가 치직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않는 라디오와 어느새 확 줄어버린 음식들은 어김없이 평화에 젖어가는 우리를 일깨웠다. 언젠가 돌아갈 수 있겠지, 하는 낙관적인 희망도 창밖을 두드리는 눈보라와 까만 하늘에 소리 없이 닳고 깎여 마른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몇몇 사람들은 시설을 뛰쳐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몇몇은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돌아올 수 없었고 나올 수 없었다.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남은 사람은 셋으로 줄었다. 나와, 캐시와, 너 셋만이. 입이 줄어 살 수 있는 시간은 더 늘어났으나 연달아 비워지는 자리들에 메말라 쩍쩍 갈라진 속내가 어지럽고 메스꺼웠다. 이렇게까지 해서 살 이유가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 때 즈음 나는 어디선가 읽었던 말 몇 마디를 떠올렸고, 공책과 연필을 집어 들었다. 사각사각 움직이는 연필의 소리 아래 쓰이는 단어들은 얄팍하고 보잘것없었지만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훌륭한 탈출구이자 소일거리가 되어주었다.

 

 시간은 천천히, 고요하게 흘러갔다. 사실 실제로 지난 시간은 대략 일주일 정도 되는 듯 했지만 – 사실 이것 역시 확실하지는 않았다 – 어느새 시간감각이 사라진 우리에게는 한없이 긴 시간이었다. 어느새 일기를 쓰는 것은 다른 둘에게도 번져나갔고 우리는 저들만의 기록을 남겨두는 것 이상을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 셋 개개인의, 합쳐도 100년이 될까 말까한 시간들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디디고 선 이 땅의, 별의, 60억년의 시간들을.

 

“종이가 모자랄 것 같긴 한데.”

 

 캐시가 보들보들한 금발머리를 손으로 꼬며 새초롬하게 뜬 눈으로 톡 내뱉었다. 너는 그 말에 사람 좋게 웃으며 답했다. 이 암울하기 그지없는 상황에서도 한없이 맑은 웃음이었다. 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우리는 비디오를 쓸 거야, 동영상으로. 캐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푸스스 웃었다. 그래? 남는 건 시간이니까. 해 보지, 뭐.

 

 

● TAPE 02 : 썩은 동아줄

 

 

“우리 지금까지 얼마나 찍었지?”

 

 캐시가 차가운 커피를 홀짝이며 손가락 다섯 개를 들어 보였다. 나는 아릿한 손목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참지 못하고 신경질적인 필체로 문화의 변동에 대해 쓴 글을 끝맺었다. 전력이 부족한 탓에 컴퓨터를 쓰지 못해 생기는 불상사였다. 나는 비단 역사나 사회 문제들뿐만 아니라 이런 르네상스니 로코코니 바로크니 하는 것들까지도 동영상으로 찍기를 원했지만, 종이가 부족할 것이라는 캐시의 말과 달리 종이는 충분했고 부족한 건 동영상을 담을 테이프들이었기에 자연히 내 말은 너의 웃음과 함께 정중히 거절되었다.

 

“테이프는 몇 개나 남았어?”

“어…… 한 개 정도.”

“충분할까? 모자라면 안 되는데.”

“모자랄 것 같지는 않아. 아니, 사실 이제 다 끝났어.”

 

 그래? 나는 웃었다. 마침 남아 있는 음식들도 거의 다 떨어져가던 참인데. 절묘하게도 맞아떨어진다 싶었다. 사실 이제 다 끝났어, 하는 캐시의 말이 그런 뜻이 아님을 아는데도 같은 처지의 사람으로부터 모든 것의 끝을 선고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머리가 뒤숭숭했다. 나는 두터운 종이뭉치들을 탁탁 두드려 가지런히 한 후 두꺼운 집게로 집고 비닐 팩에 넣어 단단히 밀봉한 뒤 방 한 구석에 자리한 금고의 문을 열고 그것을 집어넣었다. 상자에 넣어져 테이프를 붙이고 두꺼운 방수 천으로 둘둘 감싸여 있는 테이프 묶음이 총 다섯 개, 내가 뼈 빠지도록 정리한 문서뭉치가 내 손에 들린 것까지 총 두 개. 우리가 최대한 간략하고 자세하게 기록한, 60억년의 기억. 나는 한동안 그것을 들여다보다 다시 금고 문을 쾅 닫았다. 금고 옆에 칼로 새겨진 비밀번호가 보였다. 저걸 보고 이 금고를 열어 이 안에 든 것을 볼 사람이 남아 있을까? 문득 드는 의문을 머리를 이리저리 흔드는 것으로 흩어버렸다.

 

 내가 다시 자리로 돌아왔을 때 캐시는 라디오의 안테나를 뽑고 창가에 앉아 주파수를 맞추고 있었다. 이렇게 심한 눈보라 속에서 전파가 잡힐 리도 없거니와 이 상황에 한가하게 라디오 방송이나 하고 있을 위인이 있을 리 없었다. 나는 약 3초 정도, 그걸 말해줘야 하나 고민하다가 이내 그만뒀다. 캐시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그저 지난 한 달간의 우리가 그래왔던 것처럼, 습관적으로 모든 게 괜찮은 듯이 행동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이 절망적이기 그지없는 환경에서 자신을 놓지 않기 위해서는 모두 적어도 한 가닥 정도의 동아줄은 있어야 했다. 그 예로 나에게는 일기와 이 열불나는 문서 작성이었고, 너에게는 그 비디오 촬영이었다. 하지만 캐시는 우리에게 동조할 뿐 그것들에 우리만큼 매달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치직대는 소리만 새어나오는 라디오에 시선을 돌렸다. 그것이 그녀의 한 가닥 끈이 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캐시는 그 낡은 라디오에 제 모든 희망과 바람을 구겨 넣고 매일 뉴스가 방송되었던 시각에 창가에 앉아 주파수를 맞췄다. 아무 의미 없는 회색 소음이 깔렸다.

 

 사실 캐시는 이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자신이 썩은 동아줄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터였다. 필사적으로 매달린 밧줄이 툭툭 한 줄기씩 끊어지는 것을 가장 잘 볼 수 있었던 이는 그걸 바로 눈앞에서 들여다보았던 캐시, 본인일 터였으므로. 캐시는 마지막 비디오를 찍던 그 날, 평소보다 빠르게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른 모든 이들이 그랬듯이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 TAPE 03 : 두려움에 잡아먹히지 말어라





눈보라가 멈춰 우리는 캐시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그 몸을 눈 사이에 누였다. 캐시의 얼굴 위에는 작은 손수건이 덮여 있었다. 작은 성냥불이 캐시의 몸 위로 떨어졌다.

 

 두려움에 잡아먹혔다, 고 너는 캐시의 죽음,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그렇게 표현했지. 두려움에 잡아먹혔다…… 그럼 있잖아, 우리는 어떻게 될까?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거란 말은 하지 마. 돌아갈 집도 남아 있지 않다는 거 알고 있어. 우리도 캐시처럼, 다른 사람들처럼 두려움에 잡아먹힐까? 아니면 이 눈보라 몰아치는 땅을 벗어나기 위해 몰래 떠난 사람들같이 얼까, 얼어붙을까. 우리에게 남은 불이 꺼지면, 남은 음식이 떨어지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타오르는 불꽃이 캐시를 감싸올렸다. 우리는 우리의 무심함에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고 까맣게 흐드러지는 캐시를 보았다. 보들보들한 머리가 가장 먼저 타올랐고 차갑게 굳은 피부를 뜨거운 불이 낼름낼름 핥아 하얗던 것을 온통 검게 만들어버렸다. 곧이어 주홍빛 불길이 캐시를 감싸 우리는 점점 사라져가는 그림자밖에 볼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고개를 떨궜다. 이 상황에서조차, 젠장맞게도, 불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몸을 덥혔다. 몸을 덥히고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우리는 불이 사그라들자 문을 닫고 다시 들어갔다.



이제, 둘.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 TAPE 04 : Remember us, Antifreezing

 



“지금 몇 시야?”

 

 네가 묻는 말에 몸을 감싼 모포를 헤치고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세 시, 아날로그 시계의 짧은 바늘을 들여다보며 내가 간단히 답했다. 다시 한 번 물음이 돌아왔다. 새벽, 낮?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 답했다. ……모르겠어. 조용히 돌아간 답이 시린 한기에 뿌연 숨으로 얼어 흩어졌다. 하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나, 무슨 의미가 있나. 몸을 움직이자 얼음 알갱이들이 바스락거리며 떨어졌다. 네가 그걸 보고 말했다. 불 피워야겠다. 응.

 

 기록은 오래 전에 끝난 후였으므로 남은 종이들을 모아 어렵사리 불을 붙였다. 까맣게 타들어가는 종이 소리가 감은 눈 너머로 들리는 것 같았다. 미약한 불빛이 얼어가는 몸을 희미하게 비췄다. ……좀 낫다, 그치? 작은 웃음이 담긴 말에 너는 식은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문득 인상을 찌푸렸다. 얼었네? 추우니까. ……하긴. 나는 식다 못해 살얼음이 동동 뜬 커피를 홀짝였다. 커피 그 자체의 성분 탓이라기보다 아이스크림 수준으로 내려간 온도 덕분에 졸음이 확 가시는 것 같았다. 그래, 잘 걱정은 없겠구나. 내가 중얼거리자 네가 툭 던지듯 답했다. 자면 안 돼.

 

“응, 자면 안 되지… 자면.”

 

 나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비볐다. 꽤나 긴 정적이 텅텅 빈 공간을 채웠다. 먼저 입을 연 쪽은 나였다.

 

“산 사람이 있을까?”

 

 우리 말고도, 산 사람이 있을까? 이렇게 악착같이 버티고 버텨서 남을 게 뭐 있을까? 아스팔트 덮인 도시 위도 푸른 들이나 바다 위도 아닌 이 별의 끄트머리에 매달려 끈질기게 살아남아 본들 남는 것이 있을까, 기억해줄 이가 있을까. 저 밑에 산 사람이 있든 없든 간에 우리는 이미 잊혀진 사람들일 텐데. 누구도 우리를 데리러 오지 않을 텐데.

 

“그래서 한 거잖아.”

 

 너는 툭, 하고 네 뒤에 자리한 금고에 머리를 기댔다. ……그래. 나는 힘없이 답하며 너와 같은 자세로 머리를 댔다. 단단한 금속의 한기가 뒤통수를 타고 넘어왔으나 어째서인지 춥지는 않았다.

 

 

● TAPE 05 : 불씨

 



 몇 장 남지 않은 종이 위로 얹힌 불이 작아짐과 동시에 추위가 뼈 사이를 파고들었다. 너는 내 몸을 끌어안고 나는 네게 몸을 붙이고 서로의 온기를 뺏어먹으며 까만 밤 아래 기대어 앉았다. 우리들은 얼어붙지 않아, 않을 거야, 네가 웅얼거렸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남은 불씨잖아. 원래 마지막 불씨는 잘 안 꺼지는 법이거든. 되게 끈질겨. 우리는 맨 끝에 남은 한 줌의 온기가 되어서 이 별의 끝에서부터 시작할 거야. 얼음을, 땅을 녹이고 바다를 덥히고 수천, 어쩌면 수만 마일 아래의 바다에까지 따스한 숨을 불어넣고 저 아래 바닥에 깔린 모래들까지 따끈따끈하게, 우리는 그럴 거야. 우리가 여기서 꺼지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옅게 타오르던 붉은 빛이 서서히 옅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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