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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관련 시사칼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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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예지 | 등록일 | 12.11.19 | 조회수 | 807 |
獨島 피탈 백년, 특별 기고 독도는 익히 알고 있다 新毫 (본명 신규호 문학평론가 · 러시아문학가) 침략의 역사를 왜곡한 일본정부가, 엄연한 우리의 영토인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허구를 보다못해, 그들이 독도를 강점한 계기가 된 꼭 100년 전 ‘러 · 일해전’부터 말을 시작한다. 우리의 독도는 당시의 참상을 온몸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사건의 속셈도 속속들이 꿰뚫었기 때문이다. 1905년 5월 27일, 대마해협에서 맞붙은 러 · 일 해군들은 이튿날(28일)엔 이미 대세가 판가름나, 러시아 제독 로젯뜨벤스끼는 부상을 입어 수보로프 전함을 버리고 어뢰정 베드븨호로 날라져 일본 어뢰정에 나포되었는가 하면, 破竹之勢로 잔군을 소탕한 일본군은 북위 37도 12분, 동경 131도 55분에 위치한 독도의 근해(37도, 133도 30분)에서, 용맹을 떨쳐온 ‘우샤꼬프제독호’를 ‘竹刀(시나이)’와 ‘竹槍’으로 마구 치고 찌르듯이 요절내버렸고, 침몰한 뒤 에도 물 위에 뜬 수병들을 마구 쏘아 100명 이상의 전사자를 내어, 그들의 호전성을 유감없이 과시하였음을 목도한 독도는, 일본이 왜 대나무 한 포기 나지 않는 섬을 ‘다케시마(竹島)’라 불렀는지를 알아차린다(일본은 그 뒤 ‘松島’라 고쳤다가 다시 竹島로 되돌아간다). 실은 이보다 약 석달 전(2월 22일), 일본은 독도를 ‘다케시마’라 아름지어 ‘시마네현 고시 40호’로 제들에게 편입시켰으니, 전쟁에 이겨 우리의 것을 빼앗을 계획임을 드러낸 것이다. 전쟁에 이기자 그 여세를 몰아 일본은 우리에게 ‘보호’를 핑계삼아 ‘을사늑약(勒約)’을 강요하였으니, ‘늑약’이란 뜻은 김종해 시인의 <독도여 함께 가자>에서 표현한 바와 같이, 우리의 의사에 반해 강요를 했기 때문이다(이 시를 포함한 독도 관련시 평설은 월간 <모던 포엠 6월호에 실을 예정임). 이렇게 실질적으로 독도로 대표되는 조선을 죽도와 죽창으로 지배하고서도, 한일합방전부터 저희들 영토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상대방의 양 팔을 등 뒤에서 묶어놓고 남의 물건을 강탈하고서도, 스스로 주었기에 받았노라고 강변하는 술책과 같다. 독도를 손에 넣자, 한국 · 대만 · 동남아 · 대양주 · 심지어는 미국 하외이만까지 급습하여 온 세계를 전쟁터로 휘몰아넣은 그들의 행적을 독도는 환히 알고 있었으며, 그들 국민들 중에도 양심적인 문인들은 이를 경고하였음도 독도는 잘 알고 있으니, 한 예를 들면 자신의 침략상을 ‘말[馬]’의 표상을 빌려 “軍港을 內臟하고 있다”고 읊은 기따가와 후유히꼬(北川冬彦)이다. 그 경고에도 아랑곳없이 죽도와 죽창을 마구 휘두른 끝에 패전의 비극에 봉착했으면, 마땅히 독도의 영유권 주장이 자업자득임을 알아야 했을 텐데도, 8 · 15 광복으로 이를 되찾은 우리 정부가 내린 1952년 1월 18일 ‘인접 해양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에 대해, 한 달 뒤(2월 18일) 항의를 제기했으니, 이는 인두겁을 쓰지 않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뻔뻔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음도 독도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독도가 알고 있는 것이 어찌 이뿐이겠는가. 일본의 한국 침략은 1905년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400여년 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였고, 그래서 “임진란 원수”라는 속담까지 생겨난 것도 익히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독도가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자세히 진상을 알고 보면 실은 그보다도 훨씬 옛날 곧 1500년이나 거슬러 올라가는 신라 智證王(재위 500~513년) 때라는 사실이다. 그래도 일본 위정자들은 이를 부정하려고 혈안이 될지 모르나, 이는 어째서 하고많은 이름 중에서 시호를 ‘智證’이라 했느냐를 깨달으면 입을 다물지 않을 수 없을 것인즉, 그 이유는 바로 후세에 예상되는 외적의 침략에 대비해서 지혜로 정당하게 증명해 보이는 분이었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이런 국토애와 지적 증명의 솜씨로 지어준 이름이 바로 ‘于山國’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于山國’이란 말인가? 이 수수께기를 풀 열쇠는 한국은 물론 중국의 고사까지 알아야 하는 바, 이는 일본의 문헌에도 나와있는 ‘于公과 ’于定國‘ 父子에 관한 교육적 의의가 큰 일화이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중국 漢나라 때 于公이란 아비가 있었으니, 그는 자비로운 재판관이었고, 뒤를 이은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더욱 공정한 사법인 ‘廷尉’를 거쳐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丞相’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것이 독도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아직도 눈치를 채지 못하는 일본 위정자가 있을 것 같아,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마저 알려 준다. 그들 부자는 바로 ‘東海人’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국의 동쪽 바다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한반도의 동쪽은 어디란 말인가! 우공 부자와 인연을 맺은 곳이 그들의 ‘동해’인 것처럼, 한국의 ‘우산국’도 바로 한반도와 연한 ‘동해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독도 우산국은 어김없는 한국의 섬임에 틀림이 없다. 독도는 실은 우리의 앞마당에 있던 연못이었던 것이다. 일본의 학자들도 부정하지 않는 것처럼, 동해는 옛날에는 지금처럼 크지 않은 작은 연못이어서 금수강산 한반도의 동쪽 멧부리였던 것이다, 지금은 물이 많아져 섬이 되었지만 말이다. 이제 일본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동해’는 ‘東京’ 너머에 펼쳐진 태평양임을 깨달아, 부질없는 독도 영유권을 철회할 때가 아닌가. 만약 그렇지 않을진댄 지금 또 다른 영유권 분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생카쿠도’ 역시 스스로 생떼를 쓰고 있다는 인식을 온 세상에 퍼트릴 =것이다. 이는 공연히 하는 말이 아니라 여러 근거 위에서 하는 말이다. 영유권 분쟁이 천황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우경화 군사대국화와 맞물려 있는 이상, 이를테면 유엔상임이사국 진출 등을 통한 군사대국화가 더 이상 진척되다 보면, 미국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자탄을 투하해서까지 막아 꺾어버린 제2차 세계대전이 무슨 의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원자탄의 비극을 잊지말고 패전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는 필자 개인만의 우려가 아니니, 한일 양국의 우의를 다져온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히로시마’에 관한 일련의 기록이나, 방한중에 밝힌 천황제와 관련된 발언 등이 뒷받침해 주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것을 독도가 익히 알고 있으니, 일본 당국자는 더 이상 불장난을 치지말고, 우리나라 노무현 대통령이 한 말처럼, 사과보다 책임을 지는 행동을 하라는 취지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독도에 대한 생각은 많은데 글로 적기는 참 힘든 것 같아요,, 이런 칼럼을 읽어본다면 읽을 땐 어렵겠지만 여러모로 도움이 될것 같습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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