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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지킴이 ,안용복

이름 강현지 등록일 12.11.19 조회수 788

민간인으로서 일본과 외교를 한 조선시대의 어부. 동래군에서 태어났다. 동래에는 대마도와 무역을 할 수 있는 상인이 있었는데, 그들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일본어를 배웠으리라고 여겨진다. 조선 태종은 1417년(태종 17년) 공도 정책을 실시해서 울릉도를 비롯한 많은 섬에 있는 백성을 모두 한반도로 이주시켰다. 1614년(광해군 6년) 조정은 빈 섬에 일본인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17세기 후반 60년 동안 일본 어민들이 울릉도와 일본을 왔다갔다 하며 울릉도 바다에서 조업을 했다.

 

안용복은 1693년(숙종 19년) 동래 어민과 함께 울릉도에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3월 박어출과 함께 일본인 어부들에게 납치되어 인슈(因州)로 끌려갔다. 호키슈(百耆州) 번주(藩主)가 막부에 보고하자 막부는 그들을 설득하여 돌려보내라고 명령했다. 6월 30일 안용복 일행은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안용복은 그가 호키슈 태수와 담판을 벌여서 막부로부터 울릉도, 자산도가 조선령 이라는 서계를 받아냈는데, 나가사키에서 대마도 영주에게 빼앗겼다고 주장했다.

 

대마도주는 안용복 일행 편에 다케시마(竹島) 출어를 금지해 달라는 서찰을 보냈다. 조정은 대마도로 보낸 답변에서 울릉도와 죽도를 서로 다른 섬으로 표현했다. 대마도 영주는 '울릉도'라는 말을 싫어해서 그 표현을 지울 것을 조선측에 주장했다. 한편 안용복의 심문에서 조정은 호키슈에서는 안용복을 잘 대해줬지만 대마도에서 책망한 점을 알아내고 대마도 영주의 행동이 막부의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대마도측 사절에게 막부에게 대마도 영주의 행동을 밝히는 서계를 보내겠다고 말해 사절을 승복시켰다. 영의정 남구만은 화답문을 고쳐서 울릉도와 죽도가 서로 같은 섬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일본인들이 조선 영토에 들어와 안용복 일행을 데려간 것은 실책"이라고 했다.

 

1695년 3월에 대마도 번주 소 요시쓰구(宗義倫)이 죽고 그 아우인 소 요시미치(宗義倫)이 대마도주에 올랐다. 그는 막부와 만난 자리에서 죽도에 관한 질문을 받고 사실대로 답하였다. 1696년 1월 28일 막부는 일본인들에게 울릉도 도해를 금지했다. 그해 봄 안용복은 울릉도로 다시 가서 어부들을 쫓아내 오키 섬으로 갔다. 그는 스스로를 울릉우산양도감세관(鬱陵于山兩道監稅官)이라 사칭하고 호키슈 번주와 만나 막부에게 대마도주의 죄에 관해서 상소할 것을 청하였다.

 

신용하 교수에 따르면 그 이후 막부는 울릉도로 도해했던 15명을 적발해 처벌했다고 한다. 막부는 이듬해 울릉도 근처 출어를 금지하겠다는 사실을 대마도 도주를 통해서 공식으로 조선측에 통보했다. 그 후 철종 때까지 울릉도에 대한 분쟁이 없었다. 울릉도에는 안용복을 기리는 안용복장군 충혼비가 있다. 현재의 독도영유권 문제와 관련해, 안용복이 울릉도를 언급하면서 독도를 포함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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