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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갈등에 무지한 사회

이름 김혜진 등록일 15.10.23 조회수 10776
서울대 사회과학대는 2013년 어느 심포지엄에서 한국을 ‘저문화·고갈등 사회’로 규정하고 이런 특성이 기업과 사회의 경쟁력을 저하시킨다고 주장했다. ‘저문화·고갈등 사회’는 문화 수준은 낮고 갈등 수준은 높은 사회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번역하면 한마디로 “미개한” 사회일 테다. 이 진단은 많은 한국인의 통념에도 부합한다. 쏟아지는 뉴스만 보면 한국은 거의 내전 상태를 연상할 정도로 격렬하게 갈등하는 것처럼 보인다.

조금 더 깊숙이 질문을 던져보자. 갈등이 많은 사회는 후진사회이고 갈등이 적거나 없는 사회는 선진사회인가? 갈등은 나쁜가? 언론을 통해 드러나는 갈등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가? 한국에서 “노사갈등” “이념갈등” “지역갈등” 같은 말은 늘 부정적인 맥락에서 사용된다. 이런 말들은 이미 갈등 자체를 나쁜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게다가 많은 경우 일방적 폭력이거나 비대칭적 갈등임에도 마치 대등한 쌍방의 다툼인 양 호도된다. 기업의 일방적 해고, 용역의 린치는 폭력일 뿐이다. 다른 생각을 ‘빨갱이’로 몰아 공권력으로 탄압하는 짓이 “이념갈등”일 수는 없다. 전라도 출신을 향한 차별과 혐오를 “지역갈등”으로 부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강자와 약자가 존재하고, 다양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사회에서 크고 작은 갈등이 파생하는 것은 필연이다. 문제는 갈등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갈등이 왜곡되고, 은폐되고, 억압되는 것이 진짜 문제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은 단순히 갈등이 많은 나라가 아니라 ‘갈등에 무지한 사회’다. 대칭적 갈등, 비대칭적 갈등, 일방적 폭력 따위를 구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갈등 인식’에 무지하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갈등 해결’에도 무지하다.

‘갈등 인식’의 측면에서 무지해진 데에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정당정치가 현실의 계급분포와 괴리하면서 대표성 문제가 발생했다. 즉, 실제 먹고사는 문제를 둘러싼 계급적 갈등을 현실정치가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여당이나 제1야당이나 “중산층과 서민” 타령만 반복 재생한다. 둘째, 극우·친재벌 성향의 대형언론, 행정부, 국가정보기관 등에 의해 여론이 체계적으로 왜곡되거나 은폐된다. 예를 들어 국정 교과서 문제가 크게 불거지자 저들은 갈등의 구도를 ‘다양성’ 대 ‘획일성’이 아니라 ‘종북’ 대 ‘친일’ 내지 ‘종북’ 대 ‘비종북’ 구도로 계속 뒤틀고 있다.

‘갈등 해결’의 측면에서도 이유가 있다. ‘무책임의 구조’ 때문이다. 일상에서 어떤 심각한 갈등이 발생했을 때를 떠올려보자. 보통 현장 책임자 선에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다. 대신 “사장 나와!”가 문제 해결의 시작이 된다. 그게 아니면 혈연·지연·학연을 동원해 ‘뒷문 해결’이 시도된다. 소용돌이처럼 권력이 중심으로 집중되는 ‘한국적 전통’에 더해, 아웃소싱이 일반화하면서 책임을 끝없이 전가할 수밖에 없는 무책임의 구조는 더욱 견고해졌다. 그러므로 사안의 경중완급과 무관하게 늘 ‘끝판왕’이 소환될 수밖에 없다. 최종심급의 권위를 호출하지 않으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한국인들은 직간접으로 체득하고 있다. ‘끝판왕’은 상황에 따라 검찰, 헌법재판소, 대통령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된다.

     
선진사회는 거의 예외 없이 ‘갈등의 제도화’ 수준이 높다. 그들은 그게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첩경임을 안다. 반면 한국 사회는 물적 수준에 비해 갈등의 제도화 수준이 현저히 낮다. 그래서 잘못된 시간에 부적절한 장소에서 엉뚱한 사람과 갈등하는 경우가 지나치게 많아진다. 한국인의 ‘민도’가 별나게 낮거나 문화가 저열해서가 아니다. 기득권 세력이 자신의 사익을 위해 사회를 그렇게 ‘세팅’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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