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9년에 이종무가 이끄는 조선군이 쓰시마섬을 정벌한 전투.
왜구는 쓰시마섬에 흉년이 들어 식량이 부족하게 되자 조선의 남해안과 서해안을 거쳐 명나라 해안까지 침범하면서 항해 도중 충청도 서천지방과 황해도 해주 해안에 상륙하여 약탈을 자행하였다. 조선은 이 왜구들이 치성하는 것은 새로운 쓰시마섬의 도주(島主) 소우 사다모리(宗貞盛)의 선동에 의한 것으로 보고 쓰시마 정벌을 계획하고 이종무를 삼군도체찰사로 삼고 경상·전라·충청도에서 징발한 병선 227척과 병사 17,285명으로 정벌군을 편성하여 거제도에 집결하여 출발하였다.
조선군 선단이 쓰시마의 두지포(豆知浦)에 이르자 일인들은 자기 패거리가 약탈물을 가지고 돌아오는 줄 알고 환영 나왔다가 격퇴당하고 모두 산 속으로 달아나 숨었다. 조선군은 우선 일인들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응답이 없자 초토화 작전을 전개하였다. 먼저 해안에 정박 중이던 선박 129척을 빼앗아 쓸만한 것 20여 척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불태워버렸으며 가옥 1,939호를 소각하고 밭의 곡물도 모두 베어버렸다.
이러한 압박작전에도 불구하고 왜구들이 항복하지 않자 이종무는 본거지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이로군(尼老郡)에 이르러 군사들을 상륙시켰다. 좌군절제사 박실(朴實)은 먼저 상륙하여 진군하였는데 복병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군사 다수가 살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박실은 급히 후퇴하여 배에 올랐으나 일본군의 추격을 뿌리치지 못하여 백 수십 명의 군사들이 전사하고 말았다. 뒤늦게 상륙한 우군절제사 이순몽(李順蒙)과 병마사 김효성(金孝誠) 등이 이끄는 군대가 일본군을 막아 싸워 겨우 방어에 성공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규슈의 제후들을 총동원하여 쓰시마를 방어하게 하였으므로 일본군은 병력이 부족하지 않았고 익숙한 지형을 이용하여 효과적인 기습작전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쓰시마의 도주는 조선군에게 한 차례 타격을 가하였으나 원정군이 장기간 머물면서 고사작전을 펴는 것을 두려워하여 강화를 청하면서 철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쓰시마를 직접 공략하여 왜구의 선박과 가옥을 소각하고 근거지를 초토화시킨 조선군은 도주의 강화 제안을 수용하여 귀환하였다. 이 원정으로 왜구들에게 조선군의 위력을 보임으로써 그들의 활동을 위축시키는 성과를 거둔 전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