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석마을에서 기묘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이 책의 두 주인공, 바로 할아버지와 귀신의 만남이지요. 비 내리던 어느 밤, 천둥번개 번쩍 치던 순간 일본 옷을 입은 귀신이 홀연히 나타납니다. 다음 날 귀신은 무언가 결심한 듯 할아버지 다리를 힘껏 걸어 넘어뜨립니다. 넘어진 충격 때문일까요. 할아버지 눈에 귀신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무슨 까닭으로 귀신이 할아버지 앞에 나타났을까요? 갑자기 귀신이 눈앞에 나타난 것도 놀랄 일인데, 귀신은 뻔뻔하게 '여긴 원래 내 무덤이었다'면서 화장실까지 할아버지를 쫓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합니다. 자기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후손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 수 있도록 '비석'을 찾아 달라고요. 가만 보면 마을 곳곳에 비석이 보입니다. 계단과 돌담 사이, 심지어 현관문 앞 댓돌까지도.......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비석을 이용해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던 '비석마을'의 모습이 펼쳐집니다.
출판사 서평
실향의 아픔을 간직한 부산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할아버지 집에는 귀신이 산다]의 배경인 부산 아미동에는 '비석마을'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습니다. 아미동이 일본인들의 공동묘지였다는 데서 붙어 굳어진 이름입니다. 지금은 모습이 많이 달라져, 비탈진 산등성이에 무덤 대신에 작은 집이 빼곡히 들어서 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이곳 묘지 위에 터전을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 책의 귀신처럼, 조선 시대 부산 초량 왜관에서 일했던 이들의 무덤까지도 이곳에 있었다지요. 국제도시라 일컬어지는 부산의 한 작은 마을, 아미동 비석마을에는 이처럼 실향의 그리움들이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들이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디아스포라의 공간인 셈입니다.
공감이 지니는 치유의 힘 비석을 찾으며 둘은 서로에 대해 알아갑니다. 조선시대 부산 초량 왜관으로 돈을 벌러 왔다가 병이 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귀신의 사연을. 그리고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왔다가, 북한 땅이 되어 버린 연백으로 돌아가지 못한 까닭에 무덤 위에 집을 짓고 살아온 할아버지의 이야기를요. 서로가 마음을 나눈 걸까요. 이제 보니 집으로 돌아가는 둘의 뒷모습이 달라 보입니다. 할아버지가 "내일은 더 구석구석 비석을 찾아보자."며 적극적으로 나서고 귀신이 폴짝 뛰며 좋아하는 모습이 마치 오래된 친구 사이 같기도 합니다. 실제로 비석마을에서 오랫동안 살아오신 주민 분들은 어떤 이유로든 공동묘지의 비석과 상석을 이용해 집을 짓고 살아가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말합니다. 남의 나라에 묻혀, 죽어서도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안타깝다고요. 그래서일까요. 할아버지는 겉으로 툴툴대면서도 귀신의 부탁을 들어주고 나아가 위로합니다. 할아버지는 사실, 누구보다 귀신의 마음에 공감했을 듯합니다. 시대가 아무리 달라도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같을 테니까요. 귀신에게 전한 따뜻한 마음은 본인이 그토록 바랐던 위안이었겠지요.
비석마을을 품어내는 작가 공동체 한 사람이 이동하기에도 비좁고 가파른 비석마을 계단을 수십 차례 오르며 이 책을 구상했다던 작가 이영아는 이 마을에 실향의 아픔이 묻어나듯, 장면마다 애잔한 그리움을 담아냈습니다. 실제로는 알록달록한 벽화가 칠해진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할아버지와 귀신의 자취를 따라 가볍게 채색한 것도 그런 까닭이겠지요. 그러면서도 자칫 아이들에게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처음부터 끝까지 유머 있게 담아냈습니다. 철없는 귀신과 툴툴이 할아버지와의 조합이 묘하게 균형을 이루어, 독자들이 웃음 짓게 만듭니다. '귀신'이라는 소재를 쓴 덕에 아이들도 호기심을 가지고 이 책을 펼쳐볼 법합니다. [할아버지 집에는 귀신이 산다]는 이영아 작가의 첫 그림책입니다. 경남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창작 공동체 A' 작가들과 내가 살아온 지역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만들고자 한 것이 시작이었지요. 그림책 공동체에서 부산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창작 공동체 A'의 첫 번째 작품이 비석마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은, 이런 아픔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고자 했던 지역 작가들이 지닌 공동성의 발현이 아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