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누이
무서운 옛이야기 그림책, [여우누이]
어린이들은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면 이불을 뒤집어쓰면서도 계속하라 재촉하며 귀를 기울입니다. 정신의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공포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방어기제’로 설명합니다. 현실에서 겪게 될지 모르는 공포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이야기라는 안전한 공포체험을 즐기려 한다는 것이지요. ‘여우누이’는 그러한 ‘안전한 공포체험’으로서의 이야기들 가운데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대표적인 옛이야기이며, 이 책은 그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무서운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재화할 때에는 그 무서움의 근원이 어떤 것인가를 해석해 내고 그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여우누이’의 무서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림책 [여우누이]는 그것을 ‘소외’의 공포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아들을 셋이나 둔 부자가 딸 두기를 소원하여 날마다 서낭에서 비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바라던 딸을 낳았으나 그 뒤로 괴이한 일이 일어나지요. 자고 나면 소와 말이 하나씩 죽어 있는 것입니다. 공포는 이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가축들이 하나씩 죽어 가는 괴기스러운 현상, 그러나 까닭을 알 수 없음, 그것은 사건이 일어나는 때가 인간이 개입할 수 없는 시간인 ‘밤’이라는 점과 어울려, 알 수 없는 어떤 힘으로 인하여 현실로부터 소외되는 공포감을 자아냅니다. 까닭을 알기 위해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밤을 지킬 것을 명령합니다. 그런데 범상한 두 아들은 잠을 이기지 못해 사실 규명에 실패하고, 주인공인 셋째아들만이 가축들을 잡아먹는 괴물이 바로 누이동생이라는 진실을 목격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셋째가 목격한 진실을 부정합니다. 이 때 또 한 번 공포가 엄습합니다. 나만이 알고 있는 진실을 부정당할 때, 세계로부터 철저히 소외되는 두려움이 닥쳐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여우누이’의 공포는 괴기스러운 캐릭터나 무서운 감정의 표출, 피비린내 나는 현장감 따위에서 연출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그림책 [여우누이]는 감정이 모두 증발된 무표정한 캐릭터들, 진실이 부정되는 막막한 분위기, 폐쇄된 그림틀로써 나누어 놓은,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지배하는 공간의 표현 등으로 공포의 분위기를 설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진실을 알고 있는, 그래서 소외된 셋째아들을 독자의 대리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서움을 극복하는 옛이야기 그림책, [여우누이]
그런데 ‘여우누이’는 단순히 무서운 이야기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옛이야기는 어떤 문제를 던진 뒤에는 반드시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어린 독자들을 다독입니다. 그래서 옛이야기는 훌륭한 어린이문학이며, 그것은 무서운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야기의 공포가 어린이가 스스로 즐기는 안전한 공포라 해도, 거기에는 반드시 안심할만한 결말이 제시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어린이는 공포를 극복할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인공인 셋째가 쫓겨나는 순간부터 ‘여우누이’는 공포를 극복하고 괴물을 퇴치하는 모험담으로 전화합니다. 쫓겨난 셋째는 길을 떠납니다. 그것은 힘을 얻기 위한 여행입니다. 셋째는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구현하고 여우누이를 퇴치하기엔 아직 힘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힘은 어디에서 주어지는 것일까요? 이미 질서가 훼손된 인간 세계에서는 힘을 구할 수 없습니다. 초자연의 세계, 어느 유토피아가 있어 그 세계와 접촉해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때, 그 세계와 접촉하는 통로가 바로 셋째의 착한 마음입니다. 셋째는 아이들에게 학대당하는 거북을 구해줍니다. 그런데 거북은 보통 거북이 아니라 용왕의 아들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시험이며, 셋째는 선행을 베풂으로써 시험을 통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원하는 것이 나오는 함을 받습니다. 셋째는 함 속에서 나온 색시와 혼인하고 함 속에서 나온 집에서 삽니다. 다른 세계에서 온 보호막 속에서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혼인은 그 자체로도 하나의 통과의례로서 거듭남을 뜻합니다. 더구나 다른 세계에서 온 각시와 혼인했으니 셋째는 이제 이전과는 완연히 다른 거듭난 사람입니다. 셋째는 이제 여우누이를 퇴치할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집으로 돌아가 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맨손으로 여우누이와 맞설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신물(神物)이 등장합니다. 이계(異界)의 각시가 내어준 병 세 개, 셋째는 그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온 식구들을 다 잡아먹은 뒤 셋째마저 잡아먹으려 달려드는 여우누이와 대결을 벌이고, 병 세 개의 힘으로 승리를 거둡니다. 여우누이는 죽어서야 완전한 본모습을 드러냅니다.
탐욕을 경계하는 옛이야기그림책, [여우누이]
여우누이의 정체는 바로 서낭나무 뒤에 숨어 부자 내외의 소원을 엿들은 늙은 여우였습니다. 내외는 부자인데다가 아들을 셋이나 둔 터였습니다. ‘셋’이라는 수는 완전함의 상징입니다. 게다가 ‘아들’이 셋입니다. 남성중심의 가부장 사회에서, 말하자면 이들 부부는 자식을 완전하게 갖춘 것입니다. 그런데 딸을 하나 더 원했습니다. 그것은 지나친 욕망입니다. 지나친 욕심을 부릴 때 질서에 균열이 생깁니다. 이 균열을 비집고 귀물(鬼物)이 개입합니다. 즉 아들이 셋이나 되는 내외가 딸을 하나 더 바라는 순간, 탐욕을 눈치 챈 여우가 그들 가족 속으로 끼어든 것입니다. ‘저 집에 들어가면 다 잡아먹을 수 있겠구나!’ 그로부터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여우누이]는 이 같은 ‘여우누이’ 이야기를 절제된 시각적 은유를 통해 전달하고 있습니다. 서낭나무 앞에서 치성을 드리는 내외의 반대편 화면 밖으로 슬쩍 빠져나가는 여우의 흰 꼬리, 내외가 여우 딸만을 예뻐라 싸고도는 장면 밖에 우두커니 서 있는 세 아들, 말을 타고 돌아온 셋째 앞에 펼쳐진 폐허가 된 집의 모습 ……, 지나친 욕망과 그것이 불러들인 비극을 말하는 장면들입니다.
여기까지 그림책 [여우누이]가 재화(再話)한 옛이야기 ‘여우누이’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여우누이]를 통하여 모쪼록 어린 독자들이 훌륭한 어린이문학으로서 옛이야기의 재미와 의미를 함께 느끼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인터파크 도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