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학년 1반

서로 다른 스물 네명 학생이 모였습니다. 일 년 동안 많은 일을 함께 겪을 예정입니다.

함께 도와가며 같이 성장하고 좋은 기억을 남기며 올 한 해를 멋진 추억으로 만들어 갑시다.

나를 사랑하고 남을 배려하자
  • 선생님 : 김재욱
  • 학생수 : 남 11명 / 여 13명

5.16 군사정변의 원인 전개 결과

이름 마술천재 홍태윤^^ 등록일 23.04.07 조회수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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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정변의 원인

5.16의 원인은 장면 정권을 퇴출코자 계획된 운동이었다. 김종필, 오치성, 김형욱 등 5.16 주체세력의 핵심 멤버 육사 8기생 9명이 민주당 세력을 제거해 군정을 수립키 위해 1960년 9월 10일 이른바 충무장 결의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군 장성과 6관구 참모장 김재춘 등을 거사에 끌어들였고 김형욱 등이 육본에서 동지들을 작전참모로 추천하며 부관감실에서 인사발령을 내는 방식과 포섭한 동지의 인맥을 이용해 2차·3차 포섭하는 방식으로 제30사단, 제33사단장, 문재준과 6군단 포병단, 공수특전단 등을 포섭해 나갔다.[2] 이 과정에서 제1201야전공병대 포섭은 실패하였다.[3] 따라서 조직은 포섭될 만한 이들을 중심으로 비밀스럽게 조직되었다.[4] 심지어는 2군 부사령관 박정희와 육본과 후방 부대들을 동원해 거사하는데 육군참모총장이 그들과 결탁했다는 소문까지 공공연히 유포되어 장도영과 장면에게 각각 보고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5.16 정변세력은 전화, 모임에서 사장, 전무, 공사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사업으로 위장함으로써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 그 결과 막연한 정변설만으로 장성들을 체포하지 못하였다.[5] 오히려 그러려면 장도영이 장도영 스스로를 체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장면과 장도영은 각각 검찰과 군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근거를 잡는 데에 주력했다. 그러나 근거는 전무하였다.[6]장도영 역시 백운상 대령을 대구로 내려보내 근거를 수집케 하였으나 쿠데타를 입증할만한 아무런 근거도 얻을 수 없었다.[7] 당시 미국 정보국과 장총리의 고문이였던 위태커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이 정보를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변 세력을 이용하기 위해 이러한 행동을 했을거라 보았지만[8] 실상은 윤치영임영신임병직 등의 인사들과도 사전에 여러번 교섭하였고 이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함으로써 5.16은 발각되지 않고 마침내 성공에 이르게 된다.

4.19혁명 이후의 정치권과 사회의 불안정함, 기득권과 이익집단 및 군의 반동적이며 보수적인 경향을 원인으로 볼 수 있다.

박정희를 주축으로 한 군사혁명위원회는 제2공화국의 정치력 부재와 사회·경제적 혼란으로 응축되어 있던 불만이 촉발된 성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5.16 군사정변의 전개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소장이 의장으로 추대된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해 전권을 장악하고, 혁명의 성공과 노산 이은상 선생이 작성한 혁명선언문과 6개항의 '혁명공약을 라디오를 통해 발표하였다.

제2공화국 당시는 의원내각제이었던 상황에서 헌법상의 국정·국군 통솔권은 국무총리인 장면에게 있었다. 그는 장도영의 전화를 받고 새벽 4시경 미국 대사관으로 향해 군사 세력을 진압하려 했지만 직원이 부재중이라 들어갈 수 없었고 카르멜 수도원으로 피신하여 수차례 미국에 사태 진압을 [[소장 2012-08-23}} 5월 18일, 박정희는 유원식을 데리고 청와대로 찾아갔다. 그러나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군을 진압하기보다, '올 것이 왔다.'며 체념하는 태도를 취하였다.[출처 필요] 5월 20일에는 군사혁명위원회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되고 장도영을 헌법에는 없는 "내각수반"으로 임명하였다.

정변 초기에 미8군 사령관 C. B. 매그루더, 야전사령관 이한림 등의 반대로 잠시 난관에 부딪히기도 하였으나 美 정부의 신속한 지지 의사 표명, 장면 내각의 총사퇴, 대통령 윤보선의 묵인 등에 의하여 성공했다.

 

5.16 군사정변의 결과

5월 16일 혁명위원회 포고 제4호로써 민의원, 참의원 및 지방의원 등 대의원 헌법기관은 해산되었고 5월 22일 국가재건최고회의 포고 제6호[17] 정당 및 사회단체는 해산되어 정치활동이 완전히 금지되었다. 따라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장면 내각은 붕괴되었고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한 약 3년간의 군정통치가 이루어졌다. 군정기간 중 정변세력은 특수범죄처벌법정치활동정화법 등의 법적 조치를 통하여 정치적 반대세력과 군부 내의 반대파까지 제거하였다. 또한 핵심권력기구로서 중앙정보부를 설치하고 1963년에는 박정희 대통령 권한대행이 초대 총재로 있는 민주공화당을 창당해 대통령제 복귀 등을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을 하였다. 1961년 8월 17일에는 수도사단이 수도방위사령부가 되고, 그 해 10월 2일에는 출국과 입국 관리 기관의 직제가 외무부에서 법무부로 바뀐다.[18] 1962년 6월 16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내각수반 직을 겸임하게 된다.[19] 박정희가 4·19 혁명으로 하야한 이승만의 귀국을 막았다는 것이 기존의 인식이며 통설이었으나,[20][21] 그와 상반되게 1962년 11월 박정희 대통령 권한 대행은 중앙정보부 김종필 부장이 이승만에게 거금 2만달러를 직접 전달토록 한다.[22]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의장 박정희는 1963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현직 대통령이었던 윤보선을 물리치고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후, 박정희는 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윤보선을 물리치고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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