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배려와 사랑으로 하나되는 군산풍문초 5학년 1반입니다.^^
올 한해 예쁜 남학생 11명, 여학생 14명과 함께하게 되어 기쁜 마음입니다.
우리반은 클래스팅으로 소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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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5모둠 김하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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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하율~!!! | 등록일 | 23.07.04 | 조회수 | 55 | ||||||
°½e??e¶? i?¹e³?e´?e??=""> 창덕궁의 역사 정리창덕궁
목차창덕궁은 조선 왕조의 공식 궁궐인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모습을 드러낸 궁궐이에요. 창덕궁은 이궁으로 지어졌어요. 이궁이란 나라에 전쟁이나 큰 재난이 일어나 공식 궁궐을 사용하지 못할 때를 대비하여 지은 궁궐을 말해요. 조선의 왕들 중에는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더 좋아한 왕이 많았어요. 많은 왕들이 머물며 나라를 다스리면서 창덕궁은 자연스럽게 조선 왕조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평탄한 곳에 질서 정연하게 건물이 들어선 경복궁과는 달리 창덕궁은 자연과 조화를 이룬 궁궐로 유명합니다. 다른 궁궐들이 왕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지어졌다면 창덕궁은 자연 지형에 맞게 배치되어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지요. 창덕궁은 조선 왕조의 독특한 궁궐 건축과 정원 문화를 대표하는 궁궐이에요. 처음 지어진 건축물들은 전쟁과 화재로 사라졌지만 이후 세워진 건축물들은 조선 시대 궁궐 건축의 변천사를 잘 보여 주고 있어요. 그리고 숲과 나무, 연못, 정자, 화단 등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는 후원은 창덕궁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1392년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1394년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겼어요. 그러면서 나라를 대표하는 궁궐로 경복궁을 지었지요. 태조가 경복궁에 머물며 나랏일을 돌보는 동안 후계자 정하는 일을 두고 왕자들과 신하들 사이에서는 권력 다툼이 벌어졌어요. 태조는 여덟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막내인 방석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었지요. 이에 불만을 품은 다섯째 아들 방원은 사병을 이끌고 난을 일으켜 자신과 반대편에 선 형제인 방석과 방번, 조선을 세우는 데 크게 공헌한 정도전 같은 신하들을 무참히 살해했어요. 이 일이 바로 1398년에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입니다.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잡은 방원은 형 방과를 2대 왕 정종으로 임금 자리에 앉혔어요. 왕위에 오른 정종은 다음 해에 수도를 옛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으로 옮겼어요. 형제들 사이에 벌어진 살인의 현장인 한양이 싫었기 때문이지요. 왕위에 욕심이 없었던 정종은 즉위한 지 2년 만에 동생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어요. 이방원은 3대 태종으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태종은 아버지가 수도로 삼았던 한양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지요. 그러나 형제의 난이 일어났던 경복궁으로 돌아가는 것을 께름칙하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경복궁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세우도록 했고, 그렇게 지어진 것이 창덕궁입니다. 창덕궁은 왕위를 둘러싸고 왕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비극에서 탄생하게 되었답니다.
새로운 궁궐 터로 정해진 곳은 경복궁 동쪽 향교동(지금의 종로구 와룡동)이었어요. 1404년 10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불과 1년 뒤인 1405년 10월에 새 궁궐이 모습을 드러냈지요. 어느 나라든 궁궐은 왕조의 권위와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질서 정연하고 웅장하게 짓는 경우가 많아요. 중국의 궁궐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도 유교 예법에 따라 일직선 상에 질서 정연하고 웅장하게 배치되어 있지요. 그에 반해 창덕궁은 주어진 환경에 맞게 지어져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답니다. 창덕궁의 가장 큰 특징은 자연을 이용한 공간 배치입니다. 창덕궁은 궁궐을 구성하는 건물과 정원은 물론이고 작은 돌과 나무 한 그루까지도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요. 창덕궁에 가 보면 북한산과 매봉산으로 이어진 산줄기가 창덕궁과 연결된 것을 확인할 수 있어요. 이것을 보면 창덕궁이 일부러 터를 만들어 건설한 궁궐이 아니라 자연 지형의 연장선상에서 지어졌다는 걸 알 수 있지요.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에 서면 경복궁이나 창경궁, 경희궁과 달리 정문에서 정전을 볼 수 없습니다. 건물들이 일직선 상으로 배치되지 않고, 자연 지형과 공간의 크기에 따라 제각기 다른 형태로 저마다의 위치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지요. 북쪽에 있는 창덕궁의 후원(정원) 역시 선조들이 얼마나 자연을 중시했는지 잘 보여 주는 곳이에요. 나지막한 언덕, 계곡과 어우러진 숲과 정원은 자연 그대로를 보는 듯합니다. 물론 사람들이 만든 연못과 건물도 있습니다. 그러나 창덕궁 후원의 인공 시설물과 건물들은 전혀 눈에 거슬리지 않아요. 자연과 건축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모두 자연의 일부처럼 느껴진답니다.
창덕궁은 외전과 내전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궁궐에서 왕과 신하들이 공식적인 업무를 처리하던 곳을 외전, 왕과 왕족들이 살았던 개인적인 공간을 내전이라고 해요. 외전은 돈화문에서 시작되지요. 돈화문은 지금 남아 있는 궁궐 출입문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문이에요.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라는 돌다리를 건너면 진선문이 나와요. 진선문을 통과하면 인정전의 정문인 인정문이 보이지요. 인정문에서는 특이하게도 왕의 즉위식이 열렸답니다. 물론 대부분의 왕들은 정전인 인정전에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효종, 현종, 영조 등은 인정문에서 즉위식을 가졌답니다. 인정문의 앞마당을 유심히 살펴보면 사각형이 아니라 사다리꼴 모양이라는 걸 알 수 있어요. 인정문 앞마당이 이런 모습을 갖게 된 것도 자연환경을 그대로 활용하여 건축했기 때문이랍니다. 인정문 안쪽에는 2층 월대 위에 인정전이 당당하게 세워져 있어요. 인정전은 창덕궁을 상징하는 건물인 정전입니다. 왕의 즉위식이 열리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등 나라의 공식 행사가 열렸던 장소이지요. 인정전은 겉으로 보기에는 2층이지만 실내는 하나로 트여 있습니다.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보다 규모는 작지만 소박한 옥좌, 일월오봉병(병풍), 아름다운 문양의 천장은 조선 왕조의 위용과 뛰어난 예술성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인정전은 파란만장했던 조선 왕조의 역사를 말해주는 건축물 중 하나입니다. 태종 때 처음 지어진 뒤 임진왜란과 화재로 세 번이나 잿더미로 변했답니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인정전은 1804년에 지어진 네 번째 건축물이지요.
조선의 왕들은 신하들과 수시로 만나 나랏일을 논의했습니다. 나랏일을 논의하던 장소를 편전이라고 해요. 선정전이 바로 편전으로 사용하던 곳입니다. 선정전은 창덕궁에서 유일하게 지붕이 청색 기와로 되어 있어요. 당시에 청색 기와는 값이 무척 비쌌기 때문에 왕이 나랏일을 보던 선정전만 청색 기와를 덮은 것이지요. 훗날 희정당으로 편전을 옮긴 이후에 선정전은 죽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선정전 동쪽에는 희정당이 있습니다. 희정당은 초기에는 왕이 잠을 자던 개인적인 공간으로 사용되다가 조선 후기에 편전으로 사용한 건물입니다. 희정당도 임진왜란을 시작으로 세 차례나 화재를 당했고, 지금의 건물은 네 번째로 지은 것입니다. 마지막 복원할 때는 일본인들이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파괴하고 말살할 목적으로 경복궁의 강녕전을 옮겨 와 건축했답니다. 원래 희정당은 여러 개의 돌기둥 위에 지어진 건물로, 주변에는 연못이 있는 무척 우아하고 낭만적인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복원에 참여하면서 규모는 물론이고 형태와 분위기도 크게 바뀌었습니다. 희정당은 양탄자와 유리 창문, 서양식 의자 등 조선 말기에 들어온 서양 문물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벽에는 해강 김규진이 1920년경에 그린 산수화 2점이 있습니다. 동쪽 벽의 〈총석정절경도〉와 서쪽 벽의 〈금강산만물초승경도〉로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이 김규진에게 직접 지시하여 그리게 했다고 해요. 산수화지만 사실적이고 웅장하며 우리 민족의 기상을 잘 표현한 작품이지요.
희정당 뒤편에는 외부와 철저하게 단절되었던 공간인 대조전이 있습니다. 대조전은 왕과 왕비의 침실이자 왕자와 공주의 탄생지였고, 어린 왕자와 공주를 교육시키던 곳이기도 해요. 매우 중요한 장소였지요. ‘크게 만든다’는 뜻의 대조전이란 이름은 국가의 기틀을 이어 가는 세자를 큰 그릇으로 만들어야 국가와 백성이 복을 누릴 수 있다는 의미에서 지었다고 합니다. 대조전에는 처음에 왕비가 머물다가 훗날 왕과 왕비가 이곳에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중앙 마루를 중심으로 왕은 왼쪽 방을, 왕비는 오른쪽 방을 사용했어요. 부부라면 당연히 같은 방을 쓸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조선의 왕과 왕비는 잠자는 곳이 달랐답니다. 대조전은 창덕궁의 어떤 건물보다도 수난이 많았던 건물입니다. 수차례나 불이 나서 잿더미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1910년 마지막 어전 회의가 열렸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 어전 회의에서 우리나라의 주권을 일본에 빼앗긴 ‘한일병합’이 결정되었고, 519년이란 긴 역사를 자랑했던 조선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대조전은 우리 민족에게는 참으로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입니다.
궁궐 동쪽 끝에는 낙선재라는 소박한 건물이 있습니다. 낙선재는 헌종이 후궁을 위하여 마련한 공간입니다. 헌종은 낙선재를 지은 뒤 옆에 석복헌과 수강재를 추가로 지었고, 이 세 건물이 있는 곳을 통칭하여 낙선재 일곽이라 부르고 있어요. 실용주의자로 검소했던 헌종은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서재와 사랑채로 사용할 건물에 단청을 생략하였고, 대신 창살과 벽을 아름다운 문양으로 장식했지요. 창덕궁에는 이 밖에도 흥미로운 공간이 흩어져 있습니다. 왕세자가 머물던 성정각은 아름다운 2층 누각으로, 원래 1층 건물이었는데 훗날 동쪽 부분만 2층으로 늘려 지었다고 해요. 조선 궁궐 건축의 특징 중 하나인 비대칭 원리를 잘 보여 주고 있지요. 성정각은 일제 강점기에는 내의원으로 사용되었어요. 성정각 마당에는 약재를 만들 때 썼던 절구가 남아 있어요. 성정각 건너편에는 왕세자의 서고와 도서실이었던 승화루가 있지요. 궐내각사에는 왕과 왕족의 의료를 담당했던 약방(내의원)을 비롯하여 왕의 칙령과 문서, 경서, 사적을 관리했던 옥당(홍문관), 오늘날 국립 도서관에 해당하는 규장각 등이 있었습니다. 자연과 인공미가 조화를 이룬 후원창덕궁 북쪽 구역에는 왕실의 정원인 후원이 있습니다. 일반 백성들의 출입이 철저하게 금지되었던 곳으로 한때는 ‘금원(출입할 수 없는 정원)’이라 불리기도 했어요. 후원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어요. 왕과 왕족이 독서를 즐기고 휴식을 취했던 공간이자, 왕의 사냥터와 무술을 연마하는 곳으로도 쓰였지요. 때로는 이곳에서 제사를 올리기도 했고, 연회장과 과거 시험장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창덕궁은 자연 지형과 경관을 잘 활용한 궁궐로 유명합니다. 후원은 이런 특징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장소입니다. 나지막한 언덕과 계곡, 울창한 숲 주변에 세워진 건축물들은 어느 곳이 자연 공간이고 인공 공간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이지요. 각기 규모가 다른 4곳의 골짜기를 중심으로 자연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부용지, 애련지, 존덕정, 옥류천을 보면 조선 왕조의 정원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답니다.
낙선재와 성정각 사이로 이어진 완만한 언덕길을 넘으면 창덕궁 후원을 대표하는 부용지 구역이 나와요. 언덕 아래의 연못과 단아한 건축물들이 어우러진 모습은 저절로 탄성이 나올 만큼 아름답습니다. 원래 부용지 구역은 지금의 모습과는 달리 사방이 담장으로 둘려 있었다고 해요. 지금도 담장이 약간 남아 있지만 옛날에는 사방으로 담장을 쌓아 출입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어요. 부용지의 연못은 면적이 약 1000m2로 후원에서 규모가 가장 큰 곳이에요. 연못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 둥근 섬이 있어요. 부용지는 동양의 음양 사상을 잘 담아 지은 곳이에요. 음양 사상에 의하면 우주는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요. 네모난 연못은 땅을 의미하고 둥근 섬은 하늘을 뜻한답니다. 부용지에는 2개의 기둥이 연못에 들어가 세워진 특이한 모습의 정자, 부용정이 있어요. 부용정은 왕과 왕족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독서를 즐기던 장소였어요. 지금은 부용정 안에 들어갈 수 없지만 옆에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조선 시대 왕세자가 된 것같이 느껴진답니다. 부용지 건너편 나지막한 언덕에는 2층짜리 누각 건물인 주합루가 있어요. 정조 때 지어진 주합루는 2층을 각각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고 해요. 1층은 수만 권의 책이 보관된 도서관 같은 곳으로 규장각이라 했고, 2층은 우주의 모든 이치가 합하여 한자리에 모이게 하는 곳이란 의미로 주합루라 불렀지요. 주합루는 학자들이 책을 읽고 토론을 하는 장소였어요. 정조는 과거를 통해 등용된 인재들의 능력을 기르기 위해 이곳에 주합루를 세워 학문에 매진하도록 했답니다. 주합루 입구에는 어수문이란 문이 있는데 이곳으로는 왕만 통과할 수 있었고, 신하들은 옆의 작은 문으로 드나들었어요. 작은 문은 높이가 낮아 통과하려면 고개를 숙여야 해요.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해 낮게 만들었다고 해요. 부용지 동쪽에 있는 영화당이라는 건물 앞마당에서는 비정기적으로 특별 과거 시험이 치러지기도 했습니다.
부용지 북쪽에는 숙종 때 지어진 애련지가 있습니다. 숙종은 〈애련정기〉라는 글을 통해 ‘내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하며 이곳의 이름을 ‘애련지’라고 붙였다고 해요. 애련지로 들어가려면 늙지 않는다는 의미의 불로문을 통과해야 해요. 조금은 단출한 느낌을 주는 정자 애련정과 나무들이 어우러진 풍경은 마치 조선 시대 선비의 단아함을 닮은 것 같답니다. 애련지 남쪽으로는 효명 세자가 서재로 사용했던 의두합과 창덕궁에서 가장 작은 건물 운경거가 있습니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연경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순조 때 지어진 연경당은 조선 시대 양반집을 본떠 지은 건물이에요. 훗날 순조와 왕비는 연경당에 머물며 손님을 맞았다고 해요. 사랑채와 안채, 서재인 선향재, 농수정 등으로 이루어진 연경당은 99칸까지만 지을 수 있었던 일반 양반집과는 달리 120여 칸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애련지에서 오솔길을 따라 이동하면 존덕정 구역을 만날 수 있어요. 존덕정 구역은 창덕궁에서 마지막으로 지어진 곳이에요. 존덕정 구역 역시 자연 친화적인 공간으로, 아름다운 연못과 존덕정, 폄우사, 승재정 등 여러 석조 건축물을 볼 수 있어요. 2중 지붕에 육각형 모양을 하고 있는 존덕정은 천장에 다른 정자에서 찾아볼 수 없는 청룡과 황룡의 그림이 장식되어 있어요. 존덕정이 곧 왕의 휴식 공간이라는 걸 말해 주지요.
존덕정에서 북쪽 언덕을 따라 이동하면 옥류천에 이르게 됩니다. 사방이 울창한 숲으로 에워싸여 푸근하고 호젓한 느낌을 주는 곳이에요. 옥류천은 인조 때 지어졌어요. 인조는 소요암이란 커다란 바위를 깎아 내고 홈을 파서 물길을 끌어들여 작은 폭포를 만들도록 했어요. 또한 옥류천이란 이름을 친필로 써 바위에 새기도록 했습니다. 인위적으로 만든 물길이지만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모습이지요. 옥류천 주변에는 소요정, 취한정, 청의정, 태극정, 농산정 등 여러 개의 아담한 정자가 있습니다. 인상적인 곳은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청의정으로, 창덕궁 건축물 중 유일하게 초가지붕으로 꾸며졌답니다. 청의정 앞에는 작은 논이 있어요. 왕이 농사일을 직접 체험해 보고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해요. 왕들은 이곳에 와서 직접 농사를 짓기도 했지요. 그리고 벼를 파종하고 거둬들이는 과정에서 나오는 볏짚으로 지붕을 덮었어요. 나머지 정자들은 왕이 쉬거나 독서를 하는 장소였어요. 전 세계에는 수많은 궁궐이 있지만 창덕궁만큼 인위적으로 꾸미지 않고 주어진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지은 궁궐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창덕궁은 처음 건설되었던 모습과는 다르지요. 임진왜란과 화재로 사라진 건물과 정원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일부가 달라졌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고 잘못 복원된 곳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덕궁은 자연을 잘 활용한 궁궐로 명성이 자자합니다. 창덕궁은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자연을 사랑하고 낭만적인 멋을 즐겼는지 잘 보여 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 흥미진진 포인트 ① 15세기 최고의 건축가 박자청창덕궁은 여러 번 발생한 화재와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건축에 참여했습니다. 창덕궁 건축에 참여한 대표적인 사람이 박자청입니다. 박자청은 본래 평민 출신이었어요. 고려 말 궁궐 내시였던 박자청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들어서면서 궁궐을 지키는 병사가 되었지요. 이 사건을 알게 된 태조가 박자청을 신임하여 어전(임금이 있는 궁전)을 지키는 일을 하게 되었고, 이후 박자청은 공조 판서까지 벼슬이 올랐지요. 공조 판서는 국가의 주요 건설 공사와 산림, 도예 공방, 광산 등을 관리하는 책임자였어요. 하지만 곧 이곳 지형의 특징을 보존하면서 최대한 공간을 넓게 사용하기 위하여 앞마당을 사다리꼴로 만든 것을 알게 되었어요. 태종은 박자청을 풀어 주고 더욱 믿어 주었답니다. 그 뒤 끝까지 자신을 믿고 의지했던 태종을 위해 태종의 묘, 헌릉을 만들기도 했지요. 이는 박자청의 마지막 공사이기도 했습니다. ▶ 흥미진진 포인트 ② 백성들이 칠 수 없었던 창덕궁 신문고조선 시대에는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왕이 직접 해결해 주는 신문고 제도가 있었습니다. 신문고 제도는 중국 송나라에서 시작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창덕궁을 창건한 태종 때 시작되었지요. 하지만 백성들이 실제로 신문고를 치기는 쉽지 않았어요. 신문고를 치기 전에 먼저 억울한 일을 주장관이나 관찰사에게 신고하도록 했고, 그러고도 해결되지 않은 경우에만 신문고를 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관찰사, 수령, 상관이나 주인을 고발하는 경우에는 북을 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어려운 점은 신문고를 치려면 미리 내야 하는 상소 절차와 신문고가 설치된 장소로 가는 일이었어요. 글은 물론 복잡한 절차를 모르는 평민, 상인, 노비 등은 절차를 밟기도 어려웠고, 왕이 사는 궁궐의 진선문까지 가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 흥미진진 포인트 ③ 조선 시대의 세자왕의 뒤를 이어 다음 왕위에 오를 사람을 세자, 또는 왕세자라고 하지요. 세자는 궁궐에서 누구보다 귀한 신분이었어요. 세자가 우리 역사에 등장한 것은 삼국 시대부터입니다. 다음 왕위에 오를 사람을 미리 정한 이유는 왕위 계승에 따른 공백 기간을 줄이고, 왕위 계승 과정에서 벌어지는 분열과 혼란을 막기 위해서였어요. 또한 왕으로서 자질을 갖출 수 있도록 미리 학문과 교양을 쌓는 데 목적이 있었지요. 우선 세자가 되면 형제들도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 ‘세자 저하’라고 부르며 예를 갖췄고, 모든 행사에서 왕에 이어 극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살 독립된 건물과 시종을 두었고, 교육을 담당할 기관이 설치되었습니다. 세자라고 하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면서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왕이 될 세자는 그 누구보다도 철저한 교육과 수련을 받으며 성장했지요. ▶ 추천 답사 코스창덕궁 관람에는 두 가지 코스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돈화문부터 인정전, 대조전, 낙선재 등 궁궐 지역을 관람하는 일반 관람 코스이고, 다른 하나는 후원 지역만 따로 둘러보는 특별 관람 코스입니다. 일반 관람 코스를 볼 때는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관람하는 방법과 해설사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관람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 다음 안내서를 받아 곧장 창덕궁을 상세하게 알려 주는 녹음기를 빌리세요. 녹음기는 한글은 물론 영어, 일어로도 창덕궁을 설명해 주고 있어 외국 친구와 함께 관람하는 데도 불편함이 없답니다. 함양문 ? 연경당 ? 의두합 ? 부용지 구역 ? 애련지 구역 ? 존덕정 구역 ? 옥류천 구역 ? 돈화문 5-1반 5모둠 -김하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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